2024년 7월호

홍콩 누아르의 시작, ‘호월적고사(胡越的故事)’ 그리고 허안화 감독

[김채희의 시네마 오디세이]

  • 김채희 영화평론가 lumiere@pusan.ac.kr

    입력2024-07-1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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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창설된 홍콩영화상금장상은 중국 본토의 금계백화장, 대만의 금마장과 함께 중화권 3대 영화상으로 꼽힌다. 이 시상식에서 최우수 영화, 최우수 감독, 최우수 각본상, 남·녀주연상을 동시 수상하는 것을 두고 현지에서는 ‘대만관(大滿貫)’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여인사십’(女人四十·1995)과 ‘심플라이프’(桃姐·2012) 두 작품만이 대만관의 영예를 안았다. 이 영화들을 만든 주인공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허안화다.
    허완화는 홍콩 영화사에 지대한 공을 세운, 보기 드문 여성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Gettyimage]

    허완화는 홍콩 영화사에 지대한 공을 세운, 보기 드문 여성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Gettyimage]

    1988년 ‘열혈남아’로 스크린에 데뷔한 왕가위는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가장 유명한 홍콩 감독이다. 이외에도 홍콩에는 호금전(胡金銓), 장철(張徹), 오우삼(吳宇森), 서극(徐克), 관금붕(關錦鵬), 두기봉(杜琪峰) 등 이름만 열거해도 영화팬들로 하여금 그들이 제작한 작품과 함께 추억을 떠올리게 할 감독이 많다. 호금전과 장철은 상반된 스타일로 향수를 자극하는 무협영화의 대가들이었으며, 액션 장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서극과 오우삼은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명장들이다. 관금붕은 섬세한 심리 연출이 돋보이는 세련된 수사법을 구사하는 시네아스트고, 두기봉은 몰락해 가는 21세 홍콩 영화를 여전히 책임지는 거장이다. 그리고 홍콩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기에 반드시 추가해야 하는 한 사람이 있다.

    혼종(混種)의 홍콩, 그 자체인 허안화

    허안화(許鞍華)는 홍콩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감독이다. ‘가을날의 동화’(秋天的童話·1987)와 ‘유리의 성’(流璃之城·1998)으로 잘 알려진 장완정(张婉婷)이 있지만 홍콩 영화사에 대한 허안화의 기여도에 비하면 장완정의 필모그래피는 소박하다. 허안화는 1947년 랴오닝성에서 국민당 간부이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마카오를 거쳐 홍콩에 정착한, 질곡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감한 인물이다. 25세에 아시아 최고 명문대 중 하나인 홍콩대에서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런던 필름 스쿨로 유학을 떠나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후 허안화는 우리에게 ‘대취협’(大醉俠·1965) ‘용문객잔’(龍門客棧·1967) ‘협녀’(俠女·1971)로 잘 알려진 호금전의 프로덕션에서 잠시 일했다. 이때 쌓은 신뢰로 1989년 ‘소오강호’(笑傲江湖·1990)에서 서극과 갈등 상황에 놓여 있던 호금전을 도와 이 작품의 공동 연출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TVB(Television Broadcasts Limited)에 입사해 각본을 쓰면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제작에도 관여하던 허안화는 자신이 연출한 드라마 두 편이 정치적 논란으로 방송이 취소되자, TVB를 떠나 RTHK(Radio Television Hong Kong)로 이적했다. 여기서 그녀는 RTHK의 간판이자 향후 최장수 프로그램(현재도 방영 중)으로 성장하게 될 ‘사자산하’(獅子山下) 시리즈 중 ‘베트남에서 온 손님’(來客·1978)을 연출하는데, 이 작품으로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허안화의 이름을 알린 ‘베트남에서 온 손님’은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 이후 홍콩으로 밀항한 보트피플을 다룬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10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홍콩에서 겪는 좌절, 차별, 착취와 같은 불평등과 부적응을 섬세한 감각으로 연출했다. 이 작품이 영화사의 이목을 끌면서 허안화는 감독 데뷔작인 ‘풍겁’(脚劫·1979)을 연출하게 된다.

    1979년 개봉된 허안화의 감독 데뷔작 ‘풍겁’. [IMDB]

    1979년 개봉된 허안화의 감독 데뷔작 ‘풍겁’. [IMDB]

    ‘풍겁’은 오늘날 홍콩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린 영화로 평가받는 명작이다. 에드워드 양(楊德昌)의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 신동아 4월호 참고)의 히로인 장애가(張艾嘉)가 피살된 연인의 친구로 등장해 사건을 조사하는 배역으로 출연한다. ‘풍겁’은 시공간의 몽타주를 대담하게 활용하면서 ‘이창’(Rear Window·1954)의 모티프와 ‘현기증’(Vertigo·1958)에서 사용된 줌인 트랙아웃 등을 차용해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 영화가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 ‘풍겁’에서 허안화는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식의 고어 장르 분위기를 풍기면서 스릴러와 시각적 스펙터클을 적절히 배합하는 연출력을 선보인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홍콩의 문화적 근원을 탐색한 영화 ‘당도정’(1980). [IMDB]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홍콩의 문화적 근원을 탐색한 영화 ‘당도정’(1980). [IMDB]

    이 작품으로 입지를 다진 그녀는 이듬해 ‘당도정’(撞到正·1980)이란 작품을 발표한다. ‘당도정’은 겉보기에는 ‘귀신이 나오는 장르 영화’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홍콩의 문화적 근원을 탐색한 상업성과 작가성이 교묘하게 얽힌 작품이다. 이후 그녀는 베트남과 관련된 ‘호월적고사’(胡越的故事·1981)와 ‘망향’(投奔怒海·1982)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먕향’이 개봉된 이후, 언론과 영화팬들은 그녀가 1978년 RTHK에서 제작한 ‘베트남에서 온 손님’을 소환해 ‘호월적고사’ ‘망향’을 ‘베트남 3부작(越南三部曲)’으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베트남 3부작의 처음과 끝

    3부작의 첫 번째 작품, ‘베트남에서 온 손님’이 수록된 ‘사자산하’ 시리즈는 1972년부터 RTHK에서 송출을 시작한 에피소드식 구성의 드라마로, 홍콩 시민의 삶을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린 역작이다. ‘사자산’은 홍콩섬, 주룽반도, 신계지가 모두 내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며 사자 얼굴 모양을 한 바위산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의 제목인 ‘사자산하’는 사자(바위)산 아래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엮어 홍콩 현대사를 재현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것이다. ‘베트남에서 온 손님’은 ‘사자산하’ 시리즈 중 유일하게 패망 후 홍콩으로 넘어온 월남 보트피플 이야기를 다뤘다. 허안화의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는 전쟁에서 패배해 전 세계를 유랑하는 보트피플의 처지가 1997년으로 예정된, 반환 이후의 홍콩 상황을 유비적으로 떠오르게 한 데 있다.

    허안화의 이름을 알린 ‘베트남에서 온 손님’(1981).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 이후 홍콩으로 밀항한 보트피플을 다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허안화의 이름을 알린 ‘베트남에서 온 손님’(1981).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 이후 홍콩으로 밀항한 보트피플을 다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베트남에서 온 손님’은 가족과 함께 베트남을 탈출했지만 홀로 남겨진 청년 아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문은 홍콩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가련한 노인에게 적선하는 마음씨 착한 인물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홍콩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주 속고 몇 푼 안 되는 돈까지 갈취당한다. 어렵게 재회한 사촌 형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성매매를 하면서 신분증을 위조해 미국으로 밀항할 날만 기다린다. 아문은 또 다른 베트남 청년 아청을 만나게 된다. 아청은 값싼 복제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형에게 실망한 아문은 아청과 함께 살면서 그의 일을 도와주고 틈나는 대로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홍콩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 그러던 중 사촌 형이 손님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청과 아문은 사촌 형의 신분을 확인하라는 경찰의 요구에 따라 시체 안치소로 향한다. 너무나 평온하게 누워 있는 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아문에게서 취잿거리를 찾으려는 기자들이 생전 사촌 형의 행적을 캐묻는다. 하지만 아문은 입을 꼭 다문 채 영안실을 빠져나온다. 두 달 뒤, 믿고 따르던 아청마저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돼 베트남으로 송환되고 아문은 이 장면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홍콩인들에게 ‘베트남에서 온 손님’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1970년대 후반 영국이 홍콩을 보트피플 제1수용소로 지정하는 조약에 서명한 후, 홍콩 사회는 막연한 공포에 시달렸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 허안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망명객에게 돌렸다. 국내에 정식 개봉된 적 없는 ‘망향’은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원제는 ‘投奔怒海(투분노해)’. 성난 바다에 몸을 의탁한다는 뜻이다. ‘망향’은 특이하게도 일본인으로 설정된 주인공, 사진기자 아쿠타가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베트남 혁명정부는 그가 촬영한 사진이 새로운 정부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그를 환대한다. 아쿠타가와는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소녀 응우옌깜넝과 우연히 만난다. 이를 계기로 그는 통일된 베트남의 이면에 묻혀 있는 추악한 진상을 목격한다. 여기서는 반동분자로 몰리면 즉결처분되고, 맨몸으로 지뢰 제거 임무에 내몰린 젊은이들이 죽는 사고가 매일 일어난다. 깜넝의 어머니는 그동안 남몰래 성매매를 해 돈을 모으고, 이 돈으로 다른 나라로 밀항하려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탄로나자 어머니는 수치심을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 아쿠타가와는 고아가 된 불쌍한 소녀와 동생을 보트에 태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선장이 요구한 디젤 기름이 가득 담긴 통을 어렵게 구하는데 이 기름통을 사수하려다가 그만 경비대가 쏜 총에 맞아 산화하고 만다. 사람들을 가득 태운 보트는 더는 출발을 미룰 수 없어 성난 바다로 출항하고 깜넝은 부둣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저 멀리 불덩이에 휩싸인 아쿠타가와가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허안화는 베트남 3부작이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당시의 상황에 당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향’(1982)은 베트남 3부작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일본인 사진기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IMDB]

    ‘망향’(1982)은 베트남 3부작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일본인 사진기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IMDB]

    “사실 정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베트남 이야기를 찍고 있었지만, 정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됐을 때 사람들이 본토와 홍콩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홍콩의 유명 감독들은 ‘무협’ ‘누아르’ ‘액션’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색이 강하든지 현란한 편집, 유려한 카메라 무브먼트, 스텝프린팅과 같은 기술적 인장이 매우 뚜렷한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허안화의 영화 세계는 장르와 결부하기 어렵고 작가적 인장을 찾기도 힘들다. 그녀는 사회 심리극, 무협, 액션, 귀신 이야기, 멜로드라마, 코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제작자와 연극 연출가로 영역을 확대하고 여러 작품에서 감초 같은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호월적고사’는 베트남에 뿌리내리고 살던, 이른바 재월화인(越南華人)의 삶을 영화 소재로 다룬다.

    ‘호월적고사’로 만난 26세 주윤발의 여운

    3부작 중 정치적 측면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는 특이한 서사 구조를 지닌다. 아무렇게나 줄에 매달린 말린 생선, 썩어버린 곡식이 몽타주로 보이고 나면, 카메라는 지친 사람들이 보트에 가득 탄 장면을 비춘다. 너무나 남루한 사람들의 얼굴과 풍경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리지! 호월이오. 내일이면 사이공을 떠나 홍콩으로 가오. 전쟁에 참여했던 몇 년간은 편지도 할 수 없었소. 홍콩에 가서 연락하겠소. 중학교 시절 펜팔로 사귄 후 우리는 사진으로만 만났지요. 난 당신을 알아볼 것 같은데, 지금의 나를 당신은 알은척이나 할는지…”

    ‘호월적고사’는 홍콩 누아르의 모태가 된 작품.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치환해 이야기를 분리하는 특이한 전략을 사용한다. [IMDB]

    ‘호월적고사’는 홍콩 누아르의 모태가 된 작품.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치환해 이야기를 분리하는 특이한 전략을 사용한다. [IMDB]

    이윽고 카메라는 내레이션의 주인, 호월을 비춘다. 26세의 주윤발(周潤發)이다! 홍콩 누아르의 또 다른 출발점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TV 드라마 ‘상해탄’(上海灘·1980)의 인기를 업고 이제 막 톱스타로 등극한 주윤발은 아직은 신출내기이던 허안화를 믿고 홍콩과 마닐라를 오가는 여정에 동참한다. 리지와 호월은 펜팔로 우정을 나눈 끝에 드디어 난민 수용소에서 만난다. 사회복지사인 리지는 에이전트를 통해 호월에게 미국 여권을 마련해 주려고 동분서주하고, 그 와중에 호월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심청을 알게 된다. 심청 역할을 마네킹처럼 연기하는 배우는, 임청하(林靑霞)·장만옥(張曼玉)·매염방(梅艷芳)과 더불어 ‘하옥방홍(霞玉芳紅)’으로 불리던 그 유명한 종초홍(鍾楚紅)이다. ‘벽수한산탈명금’(碧水寒山奪命金·1980)이라는 두기봉의 데뷔작을 통해 은막에 발을 들여놓은 종초홍. 두 번째 작품인 ‘호월적고사’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력을 부족하다고 탓하기에는 아직 섣부르다. 그녀가 ‘오복성’(奇謀妙計五福星·1983)을 거쳐 ‘가을날의 동화’와 ‘종횡사해’(縱橫四海·1991)에서 성숙한 연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이 예상하듯이 호월과 심청은 사랑에 빠진다. 리지 입장에서는 너무 야속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가 멈췄더라면 삼각관계를 다룬 일반적 멜로드라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허안화는 그들을 미국 대신 필리핀으로 보내면서 위기에 빠뜨린다. 심청이 납치되자, 호월은 그녀를 구하려고 사지로 뛰어든다. 심청을 납치한 마닐라의 범죄 조직은 미국 여권을 미끼로 두 연인을 볼모로 잡는다. 호월은 두목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런데 어느 지점부터 영화는 조직에 미리 몸담고 있던 아산과 호월의 버디 무비로 급변한다. 호월과 심청의 처지에 동감한 아산은 적과 싸우다가 죽고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심청 역시 호월 곁을 떠난다. 분노에 찬 호월은 두목을 살해한 후, 심청을 바다에 떠내려 보내는 이별 의식을 치른다. 영화는 몇 차례에 걸쳐 호월이 리지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허안화는 호월의 내레이션이 끝나면 언제나 리지가 편지를 읽는 장면을 이어 붙여 극을 진행한다. 호월은 심청을 떠나보내며 다음과 같이 마지막 내레이션을 한다.

    “리지, 호월이오. 친구들과 함께 내일이면 미국으로 향하오. 아산은 차이나타운으로 가게 되었고 부푼 꿈에 젖은 심청은 부엌이 딸린 집에서 내게 멋진 월남 음식을 해주겠다고 하오. 무사히 도착하면 수용소에서 헤어진 그 아이도 데려다 키워볼 생각이오.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노력하겠소.”

    허안화는 호월의 마지막 내레이션 뒤에 리지가 편지를 읽는 장면을 연결하는 대신 물 위에 떠 있는 심청과 이를 바라보는 호월의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편지는 부치지 못했거나 호월이 마음속으로 쓴 편지일 것이다. 호월과 우정을 나누던 아산은 정창화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天下第一拳·1972)의 히어로 나열(羅烈)이 열연했다. 홍콩식 발음으로 로례(Lo Lieh)라고 하던 쇼브라더스의 명배우를 영화팬들은 기억할 것이다. 게다가 리지 역을 맡은 배우는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恐怖份子·1986)에서 여주인공 주울분을 연기한 무건인(缪骞人)이다. 그녀는 ‘호월적고사’ 이후 허안화의 작품 세계에 깊이 공감해 베트남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망향’에도 함께한다. ‘호월적고사’는 암흑가, 남자들의 우정, 격렬한 총싸움, 비장한 최후라는 컨벤션으로 1980년대 중·후반을 수놓았던 홍콩 누아르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치환해 이야기를 분리하는 특이한 전략을 사용한 이 영화는 서사적 재미와 더불어 조만간 홍콩을 대표할 배우들의 초창기 시절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올드팬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아마 “그들도 우리처럼”(늙어가는구나)이라고 외치는 대신 “우리도 그들처럼”(젊은 시절이 있었구나)이라고 되뇌게 될 것이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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