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시마당] 견본

  • 이기리

    입력2024-07-1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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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새치 염색 필요해 보인다
    빨래 더미 속에서 꺼내는 형광 조끼
    커터칼 가져와서 현장에서 딸려 나온 거스러미 자른다

    발코니로 가면 실내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둔 작업용 카모 바지
    코를 틀어막고 창문을 활짝 연다

    아버지 내일도 대교를 지으러 가신다
    다리 속에 깊은 동굴이 있다는 걸 아니?
    골조는 어둠으로 채우는 것이란다
    하이바 쓰고 랜턴 없인 절대 못 들어가는데
    전기를 연결해야지 건너는 동안 모두 밝아질 수 있단다

    실은 조금 무서웠단다
    파이프를 끌고 잇대다 보면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해체와 파괴는 다르다 속삭이는 유령이 온단다

    천막 아래서 쪼그려 앉아 먹는 점심도 훌륭해
    어느 일요일의 화창한 오후, 고상한 식탁 위엔
    갓 내려 얼음 찰랑이는 드립 커피와 팽 오 쇼콜라



    며칠 전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다시 지갑에 넣어주었다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
    정면 안 보고 어딜 보고 찍으신 거야 머리는 젤로 떡칠했네
    왼쪽 어깨에 회색 이름을 달았고

    물풀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작아지고 싶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점프가 되고 싶어

    아버지 하여튼 요즘 행복해 보인다
    그거면 됐다고 여길수록 자꾸 트림이 나와요
    손 좀 힘주어 꽉 잡지 말라고 하니까
    미안하니까 그렇단다

    아버지 조만간 그 손톱은
    빠질 것 같아요

    [Gettyimage]

    [Gettyimage]

    이기리
    ● 1994년 서울 출생
    ● 2020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 2021년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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