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일은 두배, 봉급은 절반, 내일은 없음

  • 최희정

    입력2005-05-06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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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행가에 또 한 차례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불어닥칠 전망이다. ‘구조조정=나라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앞에서 등이 터지는 것은 이번에도 ‘새우’들이다. 불안과 허탈, 분노가 은행원들의 가슴 가득 밀려든다.
    지난해 12월26일,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직원들이 두 은행의 합병에 반대하며 일주일째 파업을 벌이던 경기도 일산의 국민은행 연수원을 찾았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려 쌓인 눈은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그대로 얼어붙어 몇 분만 서 있어도 두 발이 꽁꽁 어는 듯했다.

    농성장 곳곳에는 초췌해진 은행원들이 드럼통에 땔감을 넣어 불을 지피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언 몸을 녹이고 있었다. 컵라면 한 개로 저녁식사를 때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이겨내려고 소주 몇 잔을 반주 삼아 털어넣는 이들도 있었다. 농성장에서 만난 국민은행 A지점 C대리는 “닷새 동안 머리 한 번 빗지 못했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기 천막이 보이죠? 저 천막에서 우리 여행원 한 사람이 연탄가스에 질식해 병원으로 실려갔어요. 간밤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연탄난로를 피웠는데 그만 가스가 새나왔나 봐요. 점퍼를 두 벌이나 껴 입었는데도 너무 추워 잠이 안 오더라구요. 천막 안에 들여놓은 식수가 다 얼어붙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정리해고 당해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생각하면 이런 추위쯤이야 견딜 만하죠.”

    경비병이 된 은행원



    그 옆에서 묵묵히 불을 지피고 있던 같은 은행 L과장은 “지금 심정이 어떠냐?”는 물음에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설쳐 쌓인 피로가 얼굴 가득 배어 있었다.

    “철저하게 배신당한 기분입니다. 은행을 위해 밤낮없이 일해온 행원들에게 의견 한번 묻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합병이라니요? 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강제합병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천 명의 은행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미래를 놓고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자신이 이렇듯 고통스러운 파업농성에 참가한 것은 순전히 가족을 위해서라고 했다. 자신이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거나 설령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다 해도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겠지만, 자신만 바라보고 사는 가족에게 닥칠 충격과 절망, 설움을 생각하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연수원 휴게실에 들어서자 일단 추위는 바깥보다 덜했다. 하지만 말이 휴게실이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여기저기 배낭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라면박스를 포개 깔고 그 위에서 등을 오그린 채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외투깃을 잔뜩 세우고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는 이들의 표정에는 피로와 추위, 불안한 흔적이 역력했다. 은행 창구에서 보았던 말쑥한 은행원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은행원들이 언제 큰 목소리 한 번 낸 적 있습니까?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지요.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쫓겨나야 할 죄인’ 취급을 하는 겁니까.”

    주택은행 안산 원곡지점에 근무한다는 J씨는 “일주일이면 3∼4일씩 새벽까지 남아서 일한 결과가 고작 이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합병반대’ ‘생존권 보장’이라는 구호를 하도 외쳐서인지 그의 목은 쉴대로 쉬어 쇳소리가 날 정도였다.

    국민은행 대구지점 행원 K씨는 경찰이 투입될 때에 대비해 길쭉한 몽둥이를 들고 연수원 정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자기의 모습이 그렇게 변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고 했다. 입행 5년차인 그는 “한국 최고의 은행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한낱 꿈이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고객들한테는 너무 미안해요. 하지만 우린들 어쩌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이건 먹고 사는 문제 아닙니까. 남들은 크리스마스다 망년회다 하면서 들뜬 연말을 보내고 있을 때 칼바람 부는 벌판에서 이러고 있는 우리 처지도 좀 헤아려 줬으면 합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12월22일 전격 합병을 선언했다. 새 은행을 만들어 두 은행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6월까지 합병작업을 완료한다는 것.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규모에서 국내 1, 2위를 다투는 우량은행으로 두 은행이 합병하면 총자산이 158조 원에 이르는 세계 60위권 대형 은행으로 거듭난다. 이런 대형 은행이 탄생하면 국내 은행권에는 판도 변화를, 대외적으로는 금융 신인도를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우량은행원도 죄인?

    그러나 두 은행 모두 기업보다는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금융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업무의 성격이 비슷하고 점포도 65% 이상 중복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력감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 은행이 시너지 효과를 내려면 적어도 30%(정규직 기준 6000여 명) 가량의 인력과 중복점포를 줄여야 한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두 은행원들이 머리띠를 동여매고 은행을 뛰쳐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와 두 은행장은 “강제적인 감원조치 없이 인력의 자연감소를 통해 10∼20%만 줄이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을 줄이지는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은행원은 없다. 지난해 7월 “강제 합병은 없다”고 선언해놓고 불과 몇 달 만에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저버렸는데, 합병 후에 인력 감축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주택은행에 근무하는 J과장은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댔다. 행여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인생을 걸어 보겠다’며 은행문을 두드린 지 20년. 일가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학창시절 은사까지 쫓아다니며 예금실적을 올렸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닥쳐와 대부분의 은행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자신은 부실 없는 ‘우량은행’ 직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철이 없었다’는 생각뿐이다. 자신도 패배자요, 낙오자였음을 뒤늦게야 깨달은 듯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제 인생이 어느 결에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커가고 앞으로 돈 들 일만 남았는데, 평생을 바친 은행에서 나가라면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나라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거대한 명분 앞에 아무런 미래도 약속받지 못한 채 그저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분노와 허탈감만 밀려들 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은행은 평생직장의 대명사였다. 여느 기업보다 월급도 많이 받았고, 제 발로 나오기 전에는 누구 하나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무풍지대였다. 두 자릿수 금리시대에도 은행원들은 거의 무이자에 가까운 금리에 주택자금을 빌려 썼다. 그래서 중간간부급 은행원 중에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대마불사’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갔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은행원들에게 돌아왔다. 은행 부실의 근원인 관치금융을 주도했던 이들에겐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번에도 꼼짝없이 등이 터진 것은 ‘새우들’이었다.

    98년 구조조정 때 일자리를 잃은 은행원은 4만여 명. 대동은행 동화은행 동남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등이 부실은행으로 퇴출되면서 전체 직원의 80% 이상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합병 당시 거론됐던 고용승계 약속은 그저 말뿐이었다. 퇴출 은행원 대부분은 실업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간혹 운좋게 고용이 승계된 직원도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신분 전환을 감수해야 했다.

    다른 은행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퇴출 은행보다 강도는 약했지만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서도 직원의 절반 이상이 짐을 싸야 했다. 40세가 넘은 직원과 임원들, 그리고 여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은행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중 구조조정 때 명예퇴직한 유병철 부장(현 세일신용정보주식회사)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 대학 중퇴 후 서울은행에 들어가 30년간 오직 회사를 위해 외길을 달려왔던 그였다. 외환위기 때 다른 지점들의 예금이 속속 우량은행으로 빠져나갈 때도 유부장이 이끌던 서울 왕십리지점만은 오히려 예금이 늘어났을 정도로 고객 관리와 은행홍보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런 그였기에 자신은 물론 은행 내에서도 그가 명예퇴직 대상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상사로부터 자신이 퇴직 대상자란 사실을 전해들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소리였다.

    “처음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청춘을 바쳐 일했는데 도대체 나를 자르는 이유가 뭐냐’고 대들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기준으로 대상자를 골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요? 대들다 지쳐 그냥 그렇게 밀려난 겁니다.”

    퇴직하고 나서 1년 동안은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다. 돈 문제뿐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결혼 후에는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해온 그에게 ‘새벽출근’은 30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고, 야근은 단단히 중독된 마약이었던 듯하다. 15년 전에는 대장암 수술을 받고서도 퇴원한 다음날 곧장 은행으로 출근했을 정도다.

    “도대체 바깥 출입을 못하겠더라구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볼지 두려웠던거죠. 50평생을 살면서 그때처럼 견디기 힘들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일은 내 삶 그 자체였어요. 요즘 금융대란이니 파업이니 하는 소식을 다시 들으니 ‘또 나 같은 사람들이 다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구조조정도 좋지만 적어도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만은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부 은행원들도 피해자였다. 부부가 같은 은행에 다닐 경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은행을 그만둬야 했다. 외환은행 직원 P씨의 경우에도 직장동료인 부인이 사표를 내야 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무언의 퇴직 압력에도 시달렸지만 무엇보다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원 중에는 사내 결혼을 하는 경우가 꽤 많아요. 그런데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은행측은 당연한 것처럼 맞벌이 부부 여직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사직 압력을 넣었어요. 출산휴가를 받아 휴직중인 여직원들에는 복직시기를 늦추게 했죠.”

    절반으로 잘린 임금

    다행히 P씨의 부인은 퇴직 후 J은행에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녀가 J은행에서 받는 연봉은 1200만 원. 연봉 외에 수당이나 상여금은 전혀 없다. 그녀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 정도 은행에 근무하면 대개 2500만 원 안팎의 연봉을 받는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돈이다. 아이 맡기는 놀이방에 다달이 내는 돈과 교통비 등을 빼면 거의 ‘남는 게 없는 장사’다.

    “그래도 지금껏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데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다시 불안해지고 있어요. 3년 전 그 난리를 겪었으니 이제는 구조조정도 웬만큼 됐겠지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앞으로는 더 강도 높게 구조조정을 한다니 ‘만만한’ 계약직인 아내는 물론, ‘중참’이 된 저도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에만 3개 은행이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서울은행은 9월 말에 650명을 내보냈고, 한빛은행과 외환은행도 11월에 각각 1100명과 860명을 명예퇴직시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은행원들 사이에는 “떠밀려 나가느니 내 발로 나가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정년도 보장되지 않은 은행에서 끊임없이 생계를 걱정하면서 일하느니 아예 명예퇴직금 몇 푼이라도 챙겨서 스스로 은행문을 나서겠다는 것.

    9년간 근무하다 지난해 사직서를 낸 외환은행의 한 여직원은 “내 집처럼 여기던 곳에서 떠밀려 나간다면 얼마나 참담하겠어요. 어느날 갑자기 그런 험한 꼴 당하느니 일찌감치 마음 편히 먹고 나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구조조정 와중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은행원들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언제 정리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다. 전 직원의 30% 이상이 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정규직원들의 업무량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고, 2년이 넘게 월급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

    S농협 경영관리팀 J팀장은 “그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월급쟁이 신세뿐이다”라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당연히 직원들의 애사심도 많이 사라졌다. 정리해고 당하지 않으려면 더 기를 쓰고 일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목숨’이 부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한 것은 80년대 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일하기도 편했다. 정부가 정해주는 금리를 그대로 따르면 됐고 ‘오는 고객 받고, 가는 고객 안 말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금리자유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농협도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다른 은행들과 경쟁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예금을 유치하느냐에 따라 직원들의 근무성적이 매겨졌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친척과 친구, 친구의 친구까지 끌어들였다. 그러다 자칫 신용대출을 잘못해서 대출금을 떼이면 담당직원이 대신 물어야 했다.

    흔히 은행원들은 9시30분에 출근해 은행문을 닫는 4시30분이면 퇴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낮에는 창구 업무에 매달리고 근무시간 이후에는 채무자나 대출금 연체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빚 독촉을 해야 한다. 심지어 대출금을 받기 위해 채무자의 집 앞에서 밤샘 잠복근무를 하기도 한다.

    J팀장은 “어떻게 해서든 채무자의 연고지를 알아내 불시에 들이닥친 적도 있고, 어느 아파트 공사장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넓은 공사장을 샅샅이 뒤진 끝에 채무자를 찾아낸 적도 있다”며 “이럴 때는 말이 은행원이지, 형사나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왜 검정 스타킹 신었어?”

    한 은행원은 “요즘 은행에는 고객만 있지 은행원은 없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고객은 왕’이라는 말은 백번 맞는 얘기지만, 그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라고 강요받다 보니 더러 짜증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 용역회사에 의뢰해 은행원들의 근무태도를 낱낱이 감시하기도 한다는 것.

    “회사에서 의뢰한 모니터들이 고객으로 가장하고 은행에 나와 매일 직원들의 태도를 체크합니다. 요즘 행원들이 워낙 친절해서 꼬투리 잡을 게 없다 보니 여직원이 살색 스타킹 대신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다고 지적받은 경우도 있어요. 손님에게 웃지 않았다고 체크되기도 하고…아니, 친절도 좋지만 고객 앞에서 마냥 히죽히죽 웃고만 있어야 합니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어딘가에 숨어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니까요.”

    용역회사 직원이 모니터하는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 그러나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10분간의 감시를 의식해 창구 여직원들은 온종일 화장실도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만지는 직업이라 해도 무엇보다 사람을 우선으로 여기는 일터였으면 합니다. 자기들 필요할 때 뽑았다가 위에서 구조조정하라니까 합당한 기준도 없이 무 자르듯 약자들을 내모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직원들이 정말 애사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절실합니다.”

    제일은행 노동조합이 지난해 9월 전직원을 대상으로 고용안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직원의 70% 이상이 고용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더욱이 이 은행은 회사측에서 성과급제 도입을 서두르고 있어 직원들의 불안감이 더해졌다. 제일은행 노동조합 정구철 홍보부장의 말.

    “성과급제가 도입되면 행원들은 서로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자가 되겠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달리한다’는 성과급제가 얼핏 매력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능력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겁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 제도부터 덜컹 도입하면 결국 상사의 주관적 판단이 모든 걸 좌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동의 강도는 더 심해지고, 수치화된 성과가 낮은 직원은 자연히 정리해고되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 ‘사람’이 없는 은행을 만들겠다는 얘기지요.”

    제일은행 본점 복도에서 만난 S씨는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제일은행은 국내에서 법인세를 가장 많이 내는 은행이었다. 그래서 은행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일하고 싶은 은행’ 1, 2위에 꼽혔다. S씨와 함께 입사시험을 치렀다가 낙방한 친구들은 얼마 전까지도 그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제일은행은 한보사태 이래 대형 부실사건의 단골 주거래은행으로 지목되면서 관치금융이 낳은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결국은 은행도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이제 직원들에게는 ‘서구식 경영합리화’를 위한 또 한 차례의 대규모 정리해고 바람이 불어닥칠 전망이다.

    “우리 은행이 어려움을 겪을 때 직원들은 월급의 10%를 반납했고,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우리 사주를 몇백 주씩 샀어요. 그런데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반이 넘는 직원들이 잘려나갔고, 그나마 그때 살아남은 직원들도 고용불안에 떨고 있어요. 우리처럼 힘없는 은행원들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몇 번씩 이런 고통을 준단 말입니까.”

    2001년 1월, 대한민국 은행원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정리해고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전 구조조정 당시 퇴직한 동료들이 은행문을 나선 뒤 제대로 자리잡고 일하는 경우를 보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집까지 날린 사람, 창업을 했다가 말아먹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비교적 잘 된 경우도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정도였다.

    그나마 35세 이전에 퇴직한 사람들은 다른 직장에 재취업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40대 이후의 퇴직자들을 받아주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특히 여직원들의 재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다. 국민·주택은행원들이 합병에 반대해 일주일이나 파업을 벌인 것도 선배, 동료들의 그런 처지를 보고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은행 퇴직자들이 재취업하기를 가장 희망하는 곳은 신규 인력을 선발하는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 같은 금융계열 공기업.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씩 쌓은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남의 빚을 대신 받아주는 신용정보회사 같은 곳에도 문을 두드리고 있으나 마땅한 일자리가 않다. 상당수는 당장 생계 방편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지난해 감원바람이 불었을 때 직장을 잃었다는 한 명예퇴직자는 “재취업은 아예 고려하지 않고 자격증을 취득해 이민을 떠나겠다는 퇴직자도 많다”면서 “명문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인재들도 취직하기 어려운 요즘 중년의 퇴직 은행원들이 들어갈 자리가 얼마냐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고교 졸업 후 18년간 몸담았던 은행에서 지난해 5월 퇴직한 Y씨는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봤지만 오라는 곳은 없었다. 간혹 연락이 오는 곳에선 그녀가 결혼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턱없이 낮은 보수를 제의했다.

    매달 꼬박꼬박 받아오던 월급이 끊기자 생계가 막막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용보험에 가입한 덕분에 매달 84만 원씩 5개월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직장에 다닐 때는 매달 2만 원씩 내던 고용보험료가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실직자가 되어 실업급여를 받게 되니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업급여에 생계를 의지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경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부당하게 낮은 보수를 받으며 일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창업을 해서 내 일을 가져야겠는 생각에 얼마 전부터 양재학원에 다니고 있다.

    “재봉틀 하나 놓고 옷 수선집을 차려도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 양장점이라도 차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양재 일이 적성에 맞아 다행이에요. 직장을 나와 보니 실직자가 자기 적성을 살려 재취업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더군요. 기껏해야 남자는 컴퓨터나 자동차 정비, 여자는 요리나 양재 정도뿐이었어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면 다양한 재교육, 재취업 프로그램부터 마련돼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나 고급인력이라 할 은행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도 길은 있다

    그러나 자의반 타의반 은행을 떠난 이들 가운데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거나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멋지게 구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은행원이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억대 연봉자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세계적 금융그룹인 ING생명보험의 FC(재무상담사)로 근무하는 안치도씨. 그는 퇴직과 사업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입사 1년 반 만에 억대 연봉을 받는 인물이 됐다. 안씨의 전 직장은 한일은행. 상업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후 20년을 불만없이 다녔다. 그러나 반복되는 업무와 평생 월급쟁이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 같은 자신에 대해 회의가 일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한일은행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손에 쥔 퇴직금은 1억5000만 원. 그는 퇴직금에다 그간 저축한 돈을 털어 숙박업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지만, 생각보다는 퍽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보증을 잘못 서면서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고 수억 원의 빚까지 떠안은 것이다.

    한때 자살까지 결심했던 그가 ‘죽을 용기로 다시 한 번 도전해보겠다’며 문을 두들긴 곳이 지금의 직장이었다. 그는 죽기살기로 뛰어다닌 결과 지난 1년 반 동안 350건의 계약을 성사시켰고 억대 연봉을 받는 보험 영업맨으로 변신했다. 전문적인 세일즈맨으로서 보람과 긍지도 느낀다.

    그는 매일 아침 6시30분에 출근, 신문의 동정과 부음란을 읽어보면서 고객의 경조사를 챙긴 뒤 하루 6∼7명의 고객을 만나고 자정이 넘어 퇴근하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전력투구를 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일자리를 주겠냐’고 한숨만 쉴 게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찾아보세요. 할 일은 참 많습니다.”

    현재 한빛은행을 비롯해 서울은행 조흥은행 외환은행 등에서는 퇴직자를 위한 취업지원센터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빛은행의 경우 거래 기업체 7000여 곳에 퇴직자 취업협조문을 보내 취업을 의뢰한다. 전문 컨설팅 회사와 제휴를 맺고 퇴직 후 진로에 대한 상담이나 각종 창업정보를 주기도 한다. 또한 은행 홈페이지에 취업 관련 사이트를 개설, 취업 및 창업정보를 게재하고, 자유게시판에는 퇴직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장도 마련해 놓았다.

    한빛은행 취업지원센터 정경열 차장은 “은행에 근무할 때는 다양한 업종의 거래처 사람들을 접하므로 퇴직하면 당장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며 “아직은 취업센터의 성과가 미미한 편이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취업지원 활동을 펴 나갈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국민·주택은행에 이어 또 다른 우량은행간의 합병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이제 은행간 본격적인 짝짓기가 시작되면 은행원은 다시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구조조정을 해야 나라 경제가 산다’는 대의명분에 가려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외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구조조정의 당위성만 내세울게 아니라 은행원들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 퇴직자들의 재취업이라는 ‘애프터서비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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