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중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 기치 아래 전세계를 무대로 시장 개척에 앞장섰던 대우자동차 출신들이 국내 수입차 업체에서 대거 중책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사장 등 임원급은 물론 부장 등 간부로 활동 중인 대우차 출신만도 줄잡아 30여 명. 이들 대우맨은 이구동성으로 국내 수입차 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비결로 대우자동차 근무 경험을 꼽았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세요.”
“귀국 일정을 늦추시는 겁니까. 국내 일정이 여럿 잡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슬로바키아를 가봐야겠어요.”
“대우차 관련해서입니까.”
“그래요. 전 대리라고 했던가요?”
“네. 전춘근 대리가 대우자동차 슬로바키아 지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대리에게 법인장을 맡기다
정인섭 대리는 예정에 없던 지시에 부랴부랴 슬로바키아행 교통편을 수소문했고 김 회장은 귀국 일정을 늦춰가면서까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자동차를 이용해 슬로바키아로 향했다. 기업 총수가 대리를 격려하기 위해 일정까지 변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96년 1월. 대우그룹 정기인사에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 동구CIS팀에서 슬로바키아를 담당하고 있던 전춘근 대리는 슬로바키아 지사장으로 발령 받았다. 법인장에 해당하는 직책에 대리 직급이 임명된 것. 요즘이라면 이 같은 파격적인 인사가 경제뉴스에 소개됐겠지만, 당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인사가 아니었다. 전 대리 외에도 대리나 과장, 차장급 인사가 해외 법인장으로 인사명령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 김우중 회장은 “배울 만큼 배웠으면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직원에게 책임 있는 직책을 맡긴다”는 인사원칙을 갖고 있었다.
지사장을 맡은 전 대리는 딜러들을 모집하며 내수 판매망 구축에 착수했다. 직영할 수 있는 한두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현지인 딜러를 모집했다. 판매망이 어느 정도 구축되자 전 대리는 딜러들로부터 자동차 주문을 받았다. 모두 1만대 이상의 주문이 들어왔다.
전 대리가 서울 본사로 오더(order·주문)를 내자 대우차 본사는 발칵 뒤집혔다. 물론 체코에서 독립한 슬로바키아에 독립법인을 설립하기 위해 준비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부임한 지 몇 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1만대가 넘는 오더를 낸 슬로바키아 지사 얘기는 단연 화제였다. 이 같은 소식은 보고라인을 타고 유럽 출장 중이던 김우중 회장에게 보고됐고 이에 김 회장은 즉석에서 일정 변경을 지시한 것. 이듬해 인사에서 전 대리가 입사 동기들보다 일찌감치 과장 승진을 했지만, 사내에서 이상하게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입차 업계에 포진한 대우맨들
위의 얘기는 수입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대우차 출신 인사들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대리 직급을 법인장으로 인사발령 낸 것도 그렇지만, 맡은 직책을 훌륭하게 해내고, 또 그런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 그룹 총수가 일정까지 변경해가며 직접 찾아간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마치 역전의 용사들 무용담을 듣는 것 같았다.
국내 수입차 업계에 진출한 대우차 출신은 줄잡아 30여 명. 이들 가운데에는 전 대리의 경우처럼 대리나 과장 직급에서 법인장으로 일한 이도 있지만 차장, 부장, 혹은 임원으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를 이끌었던 간부급도 적지 않다.
대우차 수출본부에서 임원을 지내고 렉서스 딜러로 프라임 모토를 이끌고 있는 한영철 사장은 대우차 출신 가운데 수입차 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대우차 북미수출본부장을 맡기도 한 그는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대우차 매각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채권단 대표로 포드와 협상을 진행하다보니, 협상이 체결되면 나중에 협상 당사자 밑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될 것 같더군요. 그때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차에 볼보트럭코리아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2001년 7월부터 일을 시작했죠. 수입차 업계로 옮긴 지 벌써 9년이 다 돼가네요.”
한 사장이 책임을 맡은 이후 볼보트럭코리아는 기존의 판매 실적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했다. 이후 2003년에 렉서스 딜러로 변신, 프라임 모터를 설립한 한 사장은 때마침 한국에 불기 시작한 렉서스 열풍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뒀다.
대우 출신 한 인사는 “한 사장이 볼보트럭코리아와 렉서스 프라임 모터에서 거둔 성공은 대우차 출신이 대거 수입차 업계에 발을 들여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며 “일종의 롤모델이었다”고 전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공식 딜러인 더 클래스 효성의 박재찬 사장 역시 대우차 출신으로 자동차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대우 무역부문에 입사해 런던지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박 사장은 대우 자동차수출부문 기획관리본부장을 거쳐 대우차 미국 판매법인 중부지역 담당 임원을 역임했다. 이후 대우차 베네룩스 판매법인장을 지낸 뒤, 국내 수입차 업계에 진출해 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인 한성자동차 대표이사를 지냈고, 현재는 더 클래스 효성 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 닛산의 세일즈·마케팅 총괄 임원을 맡고 있는 엄진환 이사도 대우차 출신으로 수입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엄 이사는 대우차 폴란드 판매법인 지역본부장을 지냈고, GM대우 수출본부에 근무하다 수입차 업계에 뛰어들었다. 아우디와 폭스바겐 공식 임포터(Importer)인 고진모터 임포츠 세일즈팀을 거쳐 한국토요타자동차에서 딜러개발을 담당했고, 현재는 한국 닛산 세일즈·마케팅 총괄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우인 in Kaida
렉서스 프라임 한영철 사장.
이들 외에도 국내 수입차 업체마다 대우차 출신이 한두 명 이상 포진해 활약하고 있다. 렉서스 프라임 정재훈 부사장과 아크로스타 모터스의 김은동 사장, 김진웅 이사, 김상범 과장이 모두 대우차 출신이다.
BMW코리아에는 이재준 이사와 이윤모 부장, 조경식 부장, 박혜영 과장 등이 있고, 미쓰비시 모터 세일즈 코리아 최종열 사장,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박성현 부장과 GM코리아 우현 부장, 도요타 모터 코리아 김성근 차장과 변재형 과장, AM 모터스 이종한 상무, 닛산코리아 정일영 과장 등도 대우맨이다.
2000년 이후 한국에서 수입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배경에는 이들 대우맨의 활약이 적지 않았던 셈이다.
크라이슬러코리아 안영석 사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정통 대우맨’ 출신이다. 크라이슬러코리아에는 안 사장 외에도 송재성 상무와 김재일 이사, 이창하 부장 등 대우맨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안영석 사장은 수입차 업계에서 활동하는 대우차 출신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 자동차회사에서 직접 세운 한국 법인의 법인장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우차에서 근무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2007년 초반 이후 ‘대우인 in Kaida(한국수입자동차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분기에 한 번 정도 모여 식사를 함께 하며 친목을 다져오고 있다.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크라이슬러코리아 송재성 상무는 “수입차 업계 내의 이익집단으로 비칠까 조심스럽다”며 “서로 경조사를 챙기고 안부를 묻는 순수한 친목모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대우차 출신이기는 하지만 담당했던 역할이 서로 달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저마다의 위기극복 노하우를 공유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오선판재를 아십니까?
크라이슬러코리아 안영석 사장.
“대우자동차 출신은 본사 근무를 하면서는 해외지사 관리를 하고, 또 해외지사에 파견돼서는 직접 임포터(Importer)로 일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수입차 업계의 생리를 꿰뚫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오선판재라고 들어보셨어요? 우리는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인데요. ‘오더-선적-판매-재고’ 등 본사와 해외지사 간 협업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네 단계 업무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해외에서 임포터로 딜러들과 함께 자동차 마케팅과 세일즈를 모두 해본 경험은 수입차 업계에서 일하는 데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일의 성격이 비슷하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외국에서 영어로 하던 일을 한국말 써가면서 하는데 훨씬 쉽지 않겠어요.”
자동차 영업 방식은 크게 딜러제도와 직영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가 국내에서 판매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직영체제라면, 국내 수입차 업계가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 딜러제도다.
직영체제는 본사와 공장을 중심으로 각 지역본부와 대리점을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며 수요와 공급,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체제인 데 반해, 딜러제도는 본사와 공장을 정점으로 디스트리뷰터(해외의 경우 현지 법인)와 각 딜러 사이에 권한과 역할, 책임을 분산시켜놓은 것이 특징이다.
한영철 사장이 서울 서초동에서 운영하고 있는 렉서스 프라임 모터의 경우 7층 규모의 사옥에 전시판매장이 2개층인 데 반해, 3개층을 정비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경정비는 서초동 사옥에서 담당하지만, 사고 등으로 더 많은 수리가 필요한 차량은 강서구에 있는 별도 정비공장에서 고친다. 이처럼 딜러 차원에서 판매는 물론, 정비와 수리까지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본사나 디스트리뷰터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판매망을 구축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현대·기아차와 같이 국내 시장의 80%를 점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러 업체가 경쟁하는 시장에서는 딜러제도가 효과적이다. 대우자동차가 해외 판매망을 구축해 운영하던 방식이 바로 딜러제도였다. 대우차는 1990년대 초 일찌감치 딜러제도를 국내에 도입해 시행하기도 했다. 대우차 출신들이 국내 수입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데에는 대우차에서 일찌감치 딜러십 제도를 몸에 익힌 것이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한 셈이다.
독특한 인재양성 방식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었던 김우중 회장 재임 시절 대우자동차 직원들은 해외에서 근무할 기회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대우자동차 수출본부의 운영 방식 때문이었다.
일단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지역별-북미, 서유럽, 동구CIS, 남미, 아시아태평양팀 등-수출팀에서 조수로 수출보조업무를 배우게 했다. 물론 사수는 따로 있었다. 자동차 수출입 관련 실무에 어느 정도 숙달되면 실제 담당국가에서 실상을 배우도록 하고, 한 국가의 담당자가 되면 현지 법인장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 나라의 오퍼레이션(Operation)을 법인장과 동일한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 법인의 차석 또는 세일즈 매니저 등으로 4~5년간 실무 경험도 쌓게 했다. 각 지역팀의 과장급 이상은 대우자동차 생산부문 회의 등에 참석해 자동차 생산과정에 대한 업무도 익히게 했다. 이 같은 경험을 쌓으면서 나라별 담당자는 언제든 해당 국가의 법인장과 순환근무가 가능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에서 이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1996년 무렵에는 과·차장급 실무자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권한을 주고 책임을 지운 조직은 대우가 유일했다.
1990년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기치 아래 세계 각국에서 열정과 땀으로 척박한 시장을 개척했던 대우맨들의 소중한 경험이 10여 년이 흘러 국내 수입차 업계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셈이다. 크라이슬러코리아 안영석 사장은 국내 수입차 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대우맨들의 활약상이 더 두드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우차에 근무하면서 익힌 ‘오선판재’ 리스크 매니지먼트나 딜러와의 관계, 처음해보는 업무에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한 노력, 촉박한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 마감 개념 등이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대우차 출신을 돋보이게 만든 측면이 있을 겁니다. 과거 수입차 시장 영업방식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시장이 커질수록 차량 대당 마진은 줄어들게 마련이거든요. 결국 큰 시장에서 크게 영업해본 사람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