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호

스승 길영희 선생 가르침 이어 받아 세상 풍파를 양심으로 이겨낸 심재갑 선생

[obituary] 세속 명리 따르지 않고 개혁 정신 일관한 삶

  • 김학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입력2026-05-11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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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 물질적 풍요 속 정신적 빈곤 시대에 빛난 그의 발자취

    2025년 12월 9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국민방위군일기’ 북콘서트에서 저자인 심재갑 선생(가운데)이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오른쪽)와 인천시립박물관 관계자와 함께 좌담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2025년 12월 9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국민방위군일기’ 북콘서트에서 저자인 심재갑 선생(가운데)이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오른쪽)와 인천시립박물관 관계자와 함께 좌담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지난 3월 22일, 심재갑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 교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이던 1934년 12월 31일에 인천 서구 가좌동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6년제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인천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 세워진 인천중학교는 광복과 더불어 한국인 학교로 바뀌었고, 이때 초대 교장으로 영입된 분이 길영희 선생이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길 선생은 1919년의 3·1운동에 참가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며 퇴교당했다. 이후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해 졸업한 뒤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역사·지리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그 시절 일본에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더구나 히로시마고사와 같은 명문을 졸업하면 조선 공립중학교 또는 총독부 학무국에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항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기독교인들이 세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이어 경신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길 선생의 생애에서 또 하나의 전환은 항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중국 상해에 머물며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도산은 1935년 2월 서울 지성여관에 묵고 있었다. 도산은 1932년 4월 매헌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에 연루돼 일제에 체포됐다. 이후 국내로 송환돼 대전형무소에서 영어 생활을 하다 출옥해 지성여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때 길 선생은 도산을 직접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22세 연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항일 독립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도산을 그는 존경하고 있었다. 도산은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사건(도산이 조직한 민족운동단체 수양동우회 회원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에 기소된 사건)으로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가 여섯 달 뒤 병보석으로 나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길 선생은 이때 다시 도산을 방문해 가르침을 받았다. 도산은 이듬해 3월에 별세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 길영희 선생

    일제가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쫓아내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했다. 길 선생은 굴복하지 않고 학교를 떠나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열었다. 농장을 경영하면서 동시에 주민들을 상대로 강습회를 열었다. 도산이 제시한 실력 배양 운동의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광복 이후 일제로부터 인천중학교를 인수한 인천시민들이 길 선생을 교장으로 모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6년제 인천중학교는 1951년 8월에 개정된 교육법에 따라 3년제 중학교가 됐고, 인천상업학교가 3년제 인천고등학교로 승격했다. 인천중학교의 동일계 고등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인천 시민의 열망은 1956년 4월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로 결실을 보았고, 자연히 길 선생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을 겸하게 됐다. 1961년에 출범한 박정희 정부가 교사의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추면서 길 선생은 15년 6개월 봉직한 이 학교를 떠났다.



    이 기간에 길 선생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특히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해 교사의 감독 없이 시험을 치르는 무감독 시험제를 실시했다. 길 선생은 또한 “땀을 흘려 일함으로써 나라를 일으키자”라는 뜻의 ‘유한흥국(流汗興國)’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도서관을 비롯해 교사를 신축하거나 개축할 때 학생들과 함께 등짐을 지며 벽돌을 날랐다.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길영희 교장과의 만남

    심재갑 선생은 길 선생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고 일생 동안 그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고자 했다. 1955년 3월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인천중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심 선생은 그사이 어떤 길을 걸었던 것일까.

    심 선생은 인천중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복학했다. 학제 개편에 따라 인천중학교 5학년 때 인천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운영위원장에 선출, 이어 초대 서울대 총학생운영위원장에 선출됐다. 이때만 해도 서울대는 여러 단과대학의 연합대학 같아 구심력이 약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대학교의 모든 단과대학을 아우르는 교표를 제정하기로 결심하고 ‘국립 서울 대학교’에서 세 개의 두문자(頭文字), 곧 ‘ㄱ ㅅ ㄷ’을 모아 지금 서울대 정문에 있는 문양을 교표로 채택했다.

    심 선생은 이 시기에 인천 강화군 출신의 죽산 조봉암을 지지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4월에 항일 독립운동의 도구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공산당으로부터 ‘조선 안의 유일한 공산당’이라는 승인을 받아낸 죽산은 일제강점기 말년에 투옥돼 7년 가까이 복역했다. 광복 직후 소련공산당 그리고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과의 절연을 선언한 죽산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 총선 때 인천에서 당선됐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돼 역사적인 농지개혁을 성사시켰다. 제2대 국회 총선 때 역시 인천에서 재선되면서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죽산은 1952년 8월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에 ‘혁신’을 표방하며 입후보해 네 명의 후보 가운데 차점을 기록해 정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진보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제시하면서 1956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총유효 투표 가운데 약 216만 표를 얻어 23.5% 수준의 득표율을 과시해 보수진영을 놀라게 한다.

    대학생이던 심 선생이 죽산을 지원해 그의 사저 사직동 집을 몇 차례 방문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심 선생은 6·25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었으며, 특히 부정과 부패의 압축판이었던 국민방위군 생활 역시 직접 겪었다. 국민방위군은, 심 선생이 쓴 ‘국민방위군 일기: 한 인천소년이 겪은 6 · 25전쟁’(인천시립박물관·2005)에 잘 나타나 있듯, 전쟁 때 국군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17~40세의 남성들을 입대시킨 뒤 추위와 굶주림에 빠져 죽게 하거나 병자로 만들었다. 고위 장성들이 착복했기 때문이다. 국민방위군 생활을 겪으며 심 선생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됐고, 자연히 혁신과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죽산에게 기대를 걸게 됐다.

    심 선생이 서울대 총학생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죽산을 지지한 사실은 그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려는 심정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는 1971년 5월 제8대 국회 총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와 인천에서 공천을 받았고, 1973년 2월 제9대 국회 총선 때 민주통일당 후보로 역시 인천에서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선거법을 충실히 지킨 30대 청년에게 기성 질서의 벽은 높아 국회 진출은 좌절됐다. 

    이후 심 선생은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수로 교직에 충실했다. 동시에 길 선생을 기념하는 ‘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오늘날까지 활동하게 했다. 길 교장은 만년에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근처 가루실 마을에 ‘가루실농민학교’를 세워 이 일대의 농민 교육에 힘썼다. 심 선생은 “길영희 선생 묘소의 능참봉”을 자처하며 길 선생의 기일인 3월 1일에는 한 차례의 빠짐없이 동문과 함께 묘소를 방문해 가르침을 새기게 했다. 

    심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긴 교훈은, 거듭 말하지만, 은사인 길 선생이 일깨워 준 양심의 부활과 확산이다. 물질적으로 비교적 여유로워지면서도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러한 분위기에 비추어 세속의 명리를 따르지 않고 양심과 개혁의 정신으로 일관한 심 선생의 삶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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