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혜의 자연환경과 찬란한 문화유산을 머금은 고도에서 자전거로 녹색의 운하길을 달리는 델프트 사람들. 그들의 ‘느림보 철학’은 여유와 낭만의 원천이며 델프트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원동력이다. ‘빠름’의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없는 힘이기도 하다.
사방팔방 도시를 가로지르는 녹색의 운하와 고색창연한 중세건물이 자아내는 멋이 수백년 동안 변함없는 곳, 낮에는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저녁엔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이 때묻지 않은 낭만을 연출하는 곳, 바로 델프트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북해 연안의 작은 도시는 이처럼 깔끔하고 정연하면서도 소박하고 부드러운 자태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도시인가 하면 농촌이고 농촌인가 하면 다시 도시다.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된 델프트는 유럽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오렌지 공의 도시
기차가 델프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기차에서 자전거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자전거를 탄 무리를 따라 개찰구를 나섰다. 중앙역 바로 앞은 버스터미널이다. 버스터미널엔 버스노선과 지도를 무료로 출력해주는 무인정보안내 스탠드가 있는데, 공공화장실 사용요금까지 내야 하는 네덜란드에서 무료로 지도를 받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델프트에 대한 첫 인상도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도 따뜻했다. 지도를 펴 들고 행인에게 길을 물으면 모두가 목적지가 보이는 큰길까지 데려다주면서 길잡이를 해준다. 사람들은 혹여 길을 잃을까 또렷한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길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암스테르담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고속열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델프트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 분사한 이준 열사의 발자취가 있는 헤이그와 마라톤 대회로 유명한 로테르담에 이웃해 있다. 버스로 각각 10분 남짓 걸리는 행정도시 헤이그와 무역도시 로테르담과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다.
델프트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건국의 아버지이자 네덜란드 왕가의 시조인 오렌지 공이 독립운동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국왕(필립2세)이 보낸 밀사에 의해 델프트에서 살해당한 그를 기려 이곳 사람들은 델프트를 ‘오렌지 공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인 ‘오렌지 군단’도 오렌지 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베르메르가 그린 ‘델프트의 풍경’
“세계는 신이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조금은 불경스럽고 오만하게 들리는 얘기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의 ‘바다와의 목숨 건 싸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다. ‘낮은 땅(low land)’이란 뜻의 네덜란드는 해수면보다 낮은 국토를 보호하기 위해 바다를 막고 둑과 운하를 만들면서 살아온 나라다. 국토의 25%가 수면보다 낮아 방파제, 방수제, 방조제로 물을 막지 않을 경우 국토의 60%가 물에 잠긴다. 또 국토의 25%가 간척사업을 통해 넓힌 땅이다.
다소 의외일지 모르지만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감각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도자기와 다이아몬드 세공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렘브란트, 고흐, 베르메르 등 미술계의 거장들을 많이 배출했다. 델프트는 네덜란드에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높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델프트의 풍경’ ‘회화의 우의’ 등의 명작을 남긴 17세기 거장 베르메르의 고향이 바로 델프트다.
델프트 역시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처럼 북해를 막아 만든 운하로 이뤄진 도시다. 시내는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며 구시가는 오래된 도시 특유의 독특한 정취를 풍긴다. 도시의 크기는 시민들이 ‘마을’이라고 부를 정도로 작다. 자전거로 한두 시간 정도면 시내를 훑어보기에 족하다. 그러나 네덜란드 황금시대 중심도시였던 이곳에 녹아든 문화와 예술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려면 1주일도 모자란다.
델프트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중세풍의 건물들이 운하를 따라 늘어서 있는 광경은 마치 한 폭의 완벽한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베르메르가 17세기에 그린 명화(名畵) ‘델프트의 풍경’은 도시 곳곳에 그림이 아닌 현실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동화책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기자기한 작은 집들, 주택가 현관 앞에서 헤엄치는 철새 떼, 벽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형 창문에 놓인 형형색색의 꽃들…. 이러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예술적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엔 꽃가게가 많았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튤립을 비롯해 국화, 백합 등 갖가지 꽃들이 팔리고 있었다. 델프트 시민들은 모두가 꽃을 사랑한다. 꽃을 가꾸는 것, 구경하는 것, 선물하는 것, 선물받는 것 모두를 좋아한다. 델프트 시민이라면 누구나 훌륭한 정원을 꾸민다. 꽃을 심고, 잡초를 뽑고, 새집을 만들어 찾아온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 델프트 사람들의 취미다.
식료품점에 들러 진열된 상품들을 보고 그 다양함과 풍성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1년 내내 골고루 내리는 비는 초원의 풀을 쑥쑥 자라게 하고 이를 먹고 자란 가축은 1년 내내 세계최고 수준의 유제품과 고기를 제공한다. 치즈, 요거트, 육가공품, 채소류 모두 맛도 일품이지만 가격 또한 저렴하다. 이런 음식을 먹고 자라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키가 무척 크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발을 살짝 들어 높이를 맞춰야 했을 정도. 네덜란드 성인의 평균신장은 남자가 185cm, 여자는 171cm에 이른다.
델프트 도자기를 빼고 델프트의 문화에 대해 논하는 것은 네덜란드에 대해 말하면서 풍차를 빠뜨린 것과 마찬가지다. 델프트 시내엔 수십여 개의 도자기 판매점이 있다. 우리의 청화백자와 유사한 델프트 도자기는 유럽에선 꽤 유명한 관광상품이다. 도자기 상점에는 우리 돈으로 1000원 정도 하는 저렴한 것에서부터 수백만원에 이르는 다양한 도자기가 진열돼 있다.
중국의 자기 기술을 수입해 이네들만의 독특한 기술로 발전한 델프트 도자기는 17~18세기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유행한 실용 예술작품이다. 델프트도자기의 문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중국 것을 그대 모방해 중국풍의 무늬를 살린 것과 유럽의 산물 풍경을 넣은 것이 있다. 얇은 두께의 도기와 거기에 정교하게 새긴 푸른색의 그림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델프트 도자기의 매력이다.
“델프트 사람들의 풍부한 감수성이 없었다면 ‘델프트 블루’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유럽에서 도자기의 발전이 늦은 것은 중국처럼 좋은 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델프트를 제외한 지역에선 금속그릇이나 유리그릇이 발전했지요. 이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세기경 중국식의 도기가 전해지고 거기에 델프트 사람들의 창의성이 더해지면서 고급스러운 도자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델프트에서 도자기 상점을 운영하는 슈니더씨의 말이다.
한편 델프트는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1842년 국왕인 윌리엄 2세가 세운 왕립토목학교가 델프트를 무역의 도시에서 교육의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왕립토목학교는 오늘날 델프트공대로 발전해 수리와 토목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공학 분야에서 네덜란드를 대표하고 있으며 유럽이 자랑하는 명문대학 중 하나다. 델프트 인구의 4분의 1이 학교와 관련된 사람들일 만큼 이 대학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이처럼 델프트는 수려한 자연환경, 고색창연한 문화유산, 풍성한 먹을거리, 최고 수준의 대학을 품고 있는 도시다. 이러한 조건만으로도 델프트는 살기 좋은 도시로 불리는 데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델프트가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지게 된 데는 또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교통체증과 환경오염을 자전거를 이용해 가장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네덜란드의 국토면적은 어림잡아 한국의 3분의 1. 인구도 우리나라의 3분의 1정도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의 도시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환경과 교통문제다.
1970년대 네덜란드에 등록된 차량은 이미 230만 대를 넘어섰고, 대부분의 도시들이 교통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차량이 배출하는 매연은 도시의 공기를 빠르게 오염시켰다. 델프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9년 좁은 도심에 넘쳐나는 자동차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시는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차량증가에 따라 도로를 늘리던 교통정책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델프트시는 자전거 도로망을 확충하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한편, 자동차가 도심으로 들어오면 불편하도록 만드는 차량증가 억제정책을 폈다. 무료였던 기존의 미터식 주차시설에 요금을 부과하고 주차장 확장계획을 폐기했다. 델프트는 분초를 다투는 시대의 흐름에 역으로 맞서며 ‘느림보 철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이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하면 페달을 밟자. 우리 아이들에게 숨쉴 공기를 주고 싶다면 페달을 밟자.’
델프트가 시민들에게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며 만든 구호다. 오늘날 델프트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하루도 찾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시장이나 상점에 갈 때, 학교와 직장에 갈 때, 교회에 갈 때, 애인과 데이트를 즐길 때 자전거와 함께 움직인다.
델프트에는 거의 모든 도로에 자전거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고, 가정집의 대문 앞에는 2~5대를 넣을 수 있는 ‘바이시클 드럼(bicycle drum)’이라고 불리는 자전거 주차공간이 마련돼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전체 도로망의 30%를 차지한다.
자전거 뒷좌석에 장바구니를 매단 주부, 유모차가 달린 자전거를 모는 사람, 그물 스타킹에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오피스 걸, 속도는 느리지만 능숙한 솜씨로 자전거를 타는 70대 노인까지. 800년 고도는 자전거 행렬로 붐볐다. 좁은 골목길과 그 사이를 흐르는 아름다운 운하를 따라 시민들은 ‘느림보 철학’을 실천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주말이나 휴가 때도 차에 자전거를 싣고 떠나는 시민이 많습니다. 일단 휴양지까지는 차를 갖고 가지만 도착하고 난 뒤엔 다시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델프트의 인구는 1월 현재 9만6441명이에요. 그런데 등록된 자전거 대수가 12만 대가 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2대씩의 자전거를 갖고 있는 셈이죠”
델프트 시청 관계자의 말이다.
델프트 시민들이 자전거를 얼마나 많이 타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른 아침 중앙역 광장에 나가봤다. 역 주변은 열차를 타고 인근 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타고온 자전거로 북새통을 이뤘다. 역전(驛前) 자전거 보관소는 3500대를 수용할 수 있는데도, 자전거 주차전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늦게 온 사람들이 광장 주변에 불법주차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중앙역 광장에서 만난 린다 드부르(37)씨는 자전거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전거는 생활의 일부입니다. 어릴 적부터 매일 자전거를 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자전거 문화를 색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해요. 인류가 만든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 자전거 아닙니까.”
델프트 시청 자료에 따르면 자전거의 교통 분담률은 45%에 이르는 반면 자동차는 20%에 불과하다. 또한 등교하는 학생들의 3분의 2가 자전거를 통학수단으로 이용한다. 도보로 통학하는 학생을 고려하면 거의 모든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셈이다.
델프트시장 광장에서 초등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에서 신호와 교통표지 읽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어린이들은 4세 때부터 8년 동안 자전거 타는 법, 자전거 신호 읽는 법, 안전 운행법 등으로 이뤄진 정규교과 과정을 통해 자전거 안전교육을 받는다. 초등학교 졸업 때 ‘자전거 능력시험’을 통과하면 그때부터 ‘자전거 오너’가 되는 것이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루치 대여료는 우리 돈 1만원 정도다. 한적한 시골길에선 신호등이 필요없지만 도심에선 자전거도 자전거용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신호가 바뀌면 사람들은 페달을 힘껏 밟으며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교차로에서 사람들은 손을 들어 진행방향을 주변에 알려준다. 왼손을 들면 좌회전, 오른손을 들면 우회전을 나타내는 것. 손이 ‘깜빡이’ 구실을 하는 셈이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자전거가 그려진 둥근 표지판이나 검은색 글자로 ‘자전거길(fietpad)’이라고 쓴 자전거 표지판은 자전거 전용도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갈림길마다 각각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자전거 이정표도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지도를 들고 자전거로 목적지를 찾는 것이 훨씬 쉽다.
‘주위에 다른 차가 지나갈 경우엔 2명 이상 나란히 갈 수 없다.’
‘야간에는 자전거 등을 켜야 한다.’
‘10세 이하의 어린이는 어린이용 의자에 앉혀야 한다.’
자전거 운행에 관한 기본 수칙의 일부다. 시는 자전거가 안전하게 운행하도록 자전거 교통법규도 만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둘러보는 동안 자전거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거나 경적을 울리는 차량을 단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자전거 옆을 지나갔다. 자전거와 보행자, 자동차를 동시에 수용하려는 목적에서 수립된 ‘보네프 정책(woonerf, 생활의 터전)’ 때문에 차량들이 느린 속도로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델프트의 도로엔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차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공놀이하는 모습을 그려넣은 ‘보네프’ 표지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 표지판은 ‘차와 사람이 공존하는 도로’를 나타낸다. 보네프 표지가 있는 곳에서 차량들은 시속 15~18km로 서행해야 한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차량이 시속 5km 내외로 운행하고 있었다. 표지판이 있는 지역에서 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든 차량을 운행한 쪽의 과실이 되기 때문이다. 보네프 정책으로 자동차를 타는 것이 불편해지면서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보네프 표지판이 있는 도로는 일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설계돼 있고, 과속방지턱을 곳곳에 만들어 운전자가 과속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도 등장한 과속방지턱은 델프트가 세계 최초로 고안한 것이다.
델프트공대 하인 보트마 교수(도시공학)는 “보네프 표지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등장했고, 주택가나 이면도로에서 보행자가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는다는 ‘보네프 정신’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자동차 억제정책을 처음 시작할 땐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특히 상인들의 반발이 거셌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어나면 도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그만큼 장사가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는 꾸준히 주민들을 청사로 불러모아 설명회를 열었고, 지역신문에 자전거 이용 홍보 광고를 내는 한편 자전거 지도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자전거 박람회를 여는 등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명기구점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초기에는 자전거 프로젝트에 상인들이 반대했다”며 “하지만 차를 처분하는 가정이 늘면서 가족끼리 산보 삼아 쇼핑을 나오는 일이 많아져 상인들도 이젠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자전거 프로젝트가 성공하면서 델프트의 인구도 크게 늘었다. 현재인구 9만여 명은 1980년대 중반보다 5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면 자전거 정책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환경친화적 정책에 힘입어 지오델프트 등 세계 수준의 환경관련 기업이 뿌리를 내렸고, 델프트공대는 친환경산업 분야에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찬란한 문화유산을 머금은 고도에서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로 녹색의 운하길을 달리는 델프트 사람들. 그들의 ‘느림보 철학’은 ‘빠름’의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없는 힘이기도 하다. 여유와 낭만의 원천이며 델프트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