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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광해군은 聖君, 중립외교의 화신?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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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당주홍(唐朱紅), 즉 중국산 안료인 주홍 600근을 수입해 오려다가 가격이 60동이나 돼 사오기가 어렵게 되자 국내산 주홍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던 기사에 대해 사관이 한 말이다. 주홍이란 수은과 황으로 만든 붉은빛의 고급 안료로 대궐의 문에 칠한다. 지금도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듯이 문에 칠한 붉은빛 도는 안료다. 이 안료로 각 전(殿)이나 월랑(月廊)과 문, 벽 및 누각을 칠했다.

사관은 또 이른바 영건도감의 ‘낭청이라고 하는 자들부터 아래로 장인(匠人)들에 이르기까지 그럭저럭 날짜나 보내면서 한갓 늠료(料·삯)만 허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쌀과 포목은 한계가 있는데 공역은 끝날 기약이 없어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냈으므로 자식들을 내다 팔았으며, 떠도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 왕왕 목매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관은 상황이 이럼에도 ‘저 영건도감에 있는 자들은 너무도 어려워서 계속할 수 없다는 의견을 임금에게 고하지는 않고, 매번 백성들에게 긁어모아 크고 사치스러운 궁궐 짓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고 했다.

인경궁·경희궁을 지으면서 광해군이 백성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철거하는 민가의 주인들에게 각별히 알려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옮겨가도록 하고, 소요를 일으켜 나의 부덕을 더하지 말게 하라. 재목과 기와의 값을 일일이 분명하게 계산해 속히 제급해주라”고 전교했다. 그러나 사관은 철거에 따른 현실을 “궁궐 하나를 지음에 민가를 철거해 도로에 떠돌아다니면서 울부짖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거의 수백 호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전답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포씩 거두는 방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4결당 1필을 거두는 것도 평상시 전세(田稅)의 25% 인상이었다. 25%가 아니라 100% 인상이 추진된 것이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 1결당 1포를 두 번에 걸쳐 나눠 거두자는 의견, 혹 2결당 1포나 3결당 1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복정(卜定)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광해군은 이 중 가장 세금이 무거운 방안, 즉 1결당 1필을 거둬 쓰라고 전교했다. 이제 또 서별궁(西別宮)을 짓게(營建) 되자 광해군 9년 7월, 영의정 기자헌조차 반대하는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릴 정도였다.



궁궐 공사 ‘올인’

임진왜란 이전 국가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전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실제 전결(田結·농사짓는 실제 땅)의 총수는 약 113만 결이었다. 선조 36년(1603) 계묘양전(癸卯量田)으로 파악된, 농사짓는 실제 전결은 29만 결로 줄었다. 전쟁 전의 약 25%였다. 광해군이 할 일은? 권력자나 토호들이 숨긴 토지를 찾아내고 과세해 자영농의 세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으로 드러난 토지에만 결세를 부과해 힘없는 백성들의 삶을 옥죄었다.

앞서 영건도감이 3개월 동안 사용했다는 궁궐 공사 비용을 계산해 봤다. 쌀 6830여 석, 포목 610여 동, 정철 10만 근이 들어갔다고 했다.

① 쌀 6830여 석 + 포 600동[≒7000 석(1동=50필, 1필≒3~4두(4필≒1석), 50필≒12석)]≒1만3000여 석

② 정철 10만 근[정철 1근에 쌀 1두 7승, 쌀 1석≒8근]≒1만2000여 석

①+②≒2만5000여 석. 이것이 석 달 동안의 비용이니 한 달 비용≒8000여 석

계산은 가능한 한 줄여 잡았다. 한 달에 8000여 석이 들어갔다고 보면 1년에 적게 잡아도 9만 석이었다. 정철의 경우 당시 무기 제조를 담당하던 군기시(軍器寺)에서 1년 동안 거두는 공철(貢鐵)이 1만 근이었다(‘광해군일기’ 권80, 6년 7월 25일). 즉, 나라의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도 기억해두자.

한편 이로부터 2년 뒤인 광해군 11년의 기록에 따르면 영건도감에서 1개월 비용을 4000 석으로 잡고 있다(‘광해군일기’ 권101, 11년 4월 22일). 그러면 광해군 9년과 11년의 기록에 따라 대략 1개월에 4000석에서 8000석, 1년에 4만여 석에서 9만 석 정도가 궁궐 공사 비용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호조에서 거둔 전세(田稅)가 연간 8만~9만 석이었다. 그것도 광해군대가 아니라, 양전을 거쳐 형편이 나아졌던 인조대의 통계다. 나중에 대동법 개혁에 따라 전세로 되는 공납이 전세의 3배 정도 됐다. 호조의 전세+선혜청의 대동미, 이것이 일단 조선 정부의 직접세에 해당하는 전세 재정 규모였다. 공납 중에서 지방 재정에 투여되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궐 공사비는 전체 국가 예산의 15~25%가 들어간 셈이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앞서 지적했듯, 과세에서 권력자와 토호는 빠졌으므로 일반 백성의 부담은 훨씬 컸다. 이러니 민란, 반정이 안 일어나면 이상한 일이었다. 광해군대를 그리워하는 분들, 내가 제시한 이 통계에 대해 먼저 해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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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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