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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높고 깊고 아득한 모악산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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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구도의 길

나는 그 산이 무서웠다. 산에서 도망치려고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돌아보니 검은 산이 계속 쫓아왔다. 월악산이 계속 나를 쫓았다. 골짜기를 벗어나도 또 다른 골짜기였다. 산자락은, 내 예상보다 너무도 길어서 하루 종일 장마철 폭우를 뚫고 충주에 이르러서야 녹슨 자전거의 거친 행로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포장 공사를 이제 막 시작한 곳이라서, 길은 자갈과 진흙으로 뒤엉켜 있어 타고 가는 일보다 오랜 친구처럼 핸들을 붙잡고 자전거와 나란히 걷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월악산 언저리를 벗어난 뒤로부터 나는 언제나 산을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크고 넓은 산, 이를테면 모악산은, 그 근처의 큰 도시들, 그러니까 남원, 김제, 전주 등지로 자주 다니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산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교황이 다녀간 뒤로, 모악산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그저 큰 산이 아니라 근세기 이래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종교가 태를 묻은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올레길 열풍 이후 곳곳에 호젓하게 걷는 길이 많아졌다. 큰 산의 허리를 감아 돌면서 천천히 완상하는 북한산이나 지리산의 둘레길,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길을 걷는 부안 변산의 마실길, 근대 건축문화유산을 따라 걷는 군산 구불길, 옛 시골의 정회를 느끼게 하는 강화 나들길, 서정주 시인의 문향을 따라 걷는 고창 질마재 100리길, 500년 도읍지를 돌아보는 서울 한양도성길, 느림과 걸음이 결합된 청산도 슬로길 등이 그것이다.

모악산 일대는 순례길이다. 순례, 즉 종교적 의미가 도드라진 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악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미륵신앙의 본산 금산사를 비롯해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증산교 등 근세기 이후 이 나라에서 중요한 종교의 중심이자 근원이 되는 신성한 처소가 모조리 이 모악산 골짜기에 모여 있다. 이 나라 산 중에서도 종교적 신성성이 뛰어나다는 태백산이나 마니산도 모악산의 이만한 풍경을 따라오지 못한다.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수류성당과 그 안의 소박한 고해실.

단아한 수류성당

나는 지리산 구례에서 출발해 쾌속의 고속도로와 드넓은 국도를 버리고 오래된 국도를 따라 천천히 달려 남원을 지나고 임실을 지나자마자 곧장 방향을 틀어 완주, 김제, 전주를 평평하게 가르는 국사봉, 화율봉을 따라 모악산으로 갔다. 국사봉 고갯마루에서 모악산 방향을 바라보니, 날씨도 흐린 탓에 첩첩한 산들은 묵객들이 여가 삼아 산수화를 그린 듯, 은은하면서도 장엄하게 번져 있었다. 그 산들 사이사이마다 이 나라 종교 문화의 신성한 장소들이 있다.

국사봉을 넘고 화율봉의 터널을 지나면 금산면 골짜기다. 지금이야 교통도 발달하고 터널도 뚫려서 김제, 완주, 임실, 남원으로 쉽게 나가고 또 들어올 수 있는 마을이 됐지만, 오래전에 이 마을은 산중 오지 깊숙한 은신의 땅이었다.

옛날의 지리적 감각으로 말하자면, 깊고 깊은 오지에 수류성당이 들어섰던 것이다. 지금은 화율리지만 당시 지명은 수류면이었다. 무려 1895년의 일, 이제 곧 120주년이 되는 역사다. 전북 지역의 천주교는 1889년 축성된 전주 전동성당과 완주 배재(梨峴)본당을 근거로 한다. 이 배재본당이 6년 뒤인 1895년 김제 수류면 소재지였던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수류본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00여 년 전, 전북 지역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소작 쟁의로 시작한 이 혁명은 봉건적 신분제 폐지와 척양척왜까지 외치는 수준으로 크게 불길이 일었는데, 혁명이 좌절된 이후에도 그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아서 전북 일대의 농촌 지역에서는 동학사상의 불씨가 응어리를 앓고 있었다. 수류면도 그러했다. 그런 까닭에 천주교 성당이 들어선다고 하자 당시 주민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고 아예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 그 후 수류면 일대 사람들은 수류성당으로 인해 대부분 천주교 신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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