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호

K-방산의 미국 MRO 진격, 20조 원 규모의 ‘방산업체 노후연금’ 확보

[백승주 칼럼]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20대 국회의원

    입력2024-10-0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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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10대 방산 강국 만든 이순신 DNA의 힘

    • 우리 안보와 수출 환경에 미칠 시너지 효과

    • MRO 역량 확충, 핵심 부품 국산화 절실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인 ‘월리시라’호가 9월 2일 함정 정비를 위해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입항하고 있다. [한화오션]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인 ‘월리시라’호가 9월 2일 함정 정비를 위해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입항하고 있다. [한화오션]

    9월 2일 거제시 옥포항에 4만t급(배수량 기준) 군함이 입항했다. 입항 행사장에는 극동미군 해상수송사령부, 국방부, 방위사업청, 거제시 등 한미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입항한 미군 군함의 이름은 ‘월리시라(Wally Schirra)’. 월리시라호(號)의 주요 업무는 해상에서 탄약, 식량, 수리부품, 연료 등을 전투함 등 다른 함정에 보급하는 것이다. 전장 길이가 210m로 축구장(90m)의 2.3배에 이른다. 전폭은 32.2m에 달한다. 우리 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수송함인 독도함이 1만4000t급인 것을 고려한다면 월리쉬라 군함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월리시라는 미국의 군사작전을 위해 입항한 것이 아니다. 거제도에 있는 우리 조선소에 수리·정비를 하기 위해 입항했다. 약 3개월간의 수리 기간을 거쳐 출항할 예정이다. 수리 비용이 수백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K-방산이 한미 관계에 새로운 역사를 만든 셈이다. 장하다. 당연히 역사의 갈채를 받아야 한다.

    필자는 국방부 차관 재임 시절, 우리 기업이 2012년 해군의 지존 국가인 영국으로부터 4척의 군함을 수주한 직후에 진행된 후속 사업들을 격한 마음으로 밀착해서 지켜본 적이 있다. 근·현대사에서 우리나라가 도입한 최초의 동력선, ‘양무호’의 비참한 운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무호’의 슬픈 운명

    대한제국이 1903년 최초로 도입한 동력선 양무호. [위키피디아]

    대한제국이 1903년 최초로 도입한 동력선 양무호. [위키피디아]

    양무호는 대한제국이 1903년 최초로 도입한 동력선이다. 1876년 불과 245t에 불과한 일본 군함 ‘운양호’에 정치군사적 굴욕을 감내한 고종은 동력선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글로벌 차원의 조선소 현황, 동력선 구매 절차나 운용 등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던 고종 조정은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서 건조돼 1893년부터 일본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가 화물선으로 운용하던 중고선을 구매했다.

    구매 예산은 당시 대한제국 국방 예산의 26.7%에 해당했다. 경제성도 없고 함포(80mm) 4문과 기관포(50mm) 2문으로 무장한 빈약하기 그지없는 화물선이었다. 미쓰이상사가 일본 정부의 힘을 업고 고종과 대한제국을 기망해 거래를 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양무함을 스스로 운용할 인적자원도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양무호를 징발해 세작선(細作船)으로 운용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이후 양무호는 일본 기업에 되팔렸다. 이후 상선으로 운용하다가 1916년 해난 사고로 제주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한반도 최초의 동력선은 참으로 슬픈 스토리를 남기고 침몰한 것이다.

    1912년 4원 15일 김일성 생일에 침몰한 타이태닉이 당시 배수량 4만7000t급에 3547명을 동시에 태울 수 있는 초대형 유람선임을 생각하면, 120여 년 전 우리 조선산업이 영국 조선산업을 따라잡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소가 영국 군수지원함 건조를 2012년 수주한 데 이어 성공적으로 납품했다. 영국으로부터 추가적으로 많은 군함을 수주했다. 영국 군함 수주를 넘어, 2024년 8월에는 미군의 핵심 전력에 대한 MRO사업에 본격 진격했다. 진출보다 진격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방산업체 노후연금’ 여겨지는 MRO사업

    MRO사업은 군사 장비를 유지(Maintenance)·수리(Repair)·정비(Overhaul)하는 사업 체계를 말한다. 혹자는 MRO사업을 ‘방산업체의 노후연금’이라고 이름 짓기도 한다. 무기체계를 의인화한, 매우 적절한 비유다. 무기체계도 생로병사하는데 태어나서 들어야 할 연금 같은 비용이 필요한 것이다. 군이 사용하는 핵심 무기체계는 대체로 3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운용된다. 운용 과정에서 정비·수리·분해·조립하는 거대한 후속 시장이 형성된다.

    전문가의 보고서에 따르면 군함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최초 건조비의 50%와 맞먹는다. 1조 원에 군함을 건조하면, 그 군함을 유지하는 동안 5000억 원의 비용이 별도로 든다는 의미다. 공군 전투기의 경우는 신규 획득 비용의 4배가량이 유지하기 위해 쓰인다. 2024년 현재 연간 20조 원가량의 MRO 시장이 형성돼 있다.

    한화그룹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한화오션]

    한화그룹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한화오션]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가 국가안보 차원에서 MRO사업을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한다. 바이든 정부는 2023년 말 MRO사업에 대해 획기적 정책 전환을 추진했다. 2023년 12월, 미국 국방부는 미군 장비를 국외에서 유지·수리·운용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하기 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그 자리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도 초청받았다. 이후 미국은 연속으로 비슷한 협의회와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2024년 5월 16일 미국 국방부는 권역별 정비유지 기본계획(RSF·Regional Sustainment Framework)을 발표했다.

    RSF의 목표는 글로벌 파트너십을 활용해 MRO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있다. 글로벌 차원, 특히 인도태평양 권역에서 유연하게 방위산업 생태계를 확보해 글로벌 및 지역 차원에서 전쟁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데 목적과 비전을 두고 있다.

    약 20조 원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MRO시장에 모든 국가의 방산업체가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 국가, 기업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첫째, 정치·군사적 신뢰다. 미국 정부와 국가지도자 간, 국가와 기업 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보안시설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가 ‘보안성 보장’의 생명선이다. 보안이 담보되지 않은 국가나 기업에 미국이 MRO사업을 맡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

    둘째, 프로그램별 참여 기업의 능력이다. 우리 방위산업은 우리 안보의 특수성을 반영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미국 국방부는 2023년 말 이후 동맹국가의 국방부 관리 및 방산 관계자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워크숍을 통해 미국은 MRO사업을 맡길 만한지 다른 나라 방산 기업들의 역량을 점검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관련 기업 정보에 따르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운용되는 미 공군 F-15·F-16, 육군 주요 헬기, 해상보급선 등이 1차 프로그램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유기적 협력 체제 구축 가능성이다. 미국이 RSF 프로그램과 연계한 MRO사업을 동맹국과 협업하려는 이유는 미국의 전시 대응 능력, 지역분쟁 능력을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있다. MRO사업은 여느 민간사업과 달리 적시성이 보장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MRO역량을 지속적으로 확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새로운 무기체계가 등장할 때 그에 상응하는 정비 능력이 확충돼야 하는 것이다.

    미국 RSF와 국제 안보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 글로벌 차원에서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혹자는 분쟁에 참가하는 국가와 분쟁 강도를 고려할 때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동맹국들에 미군 핵심 장비의 MRO시장을 개방하는 의도는 다음 몇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 오바마 정부 이후 미국의 전략가들이 집착하는 동맹그물망(Net of Alliance) 전략을 방산 차원에서 접목하려는 정책이다. 강화된 군사적 신뢰라는 상부구조를 더 튼튼하게 할 국방경제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둘째,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전시 준비 태세를 획기적으로 증대하려는 것이다. 다양한 지역에 배치한 장비를 현지에서 정비·유지함으로써 미국은 핵심 장비 가동률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장비 가동률의 수직 상승은 미국의 전시 준비 태세, 분쟁 대비 태세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셋째, 미국과 동맹국 간 핵심 장비의 호환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핵심 장비의 호환성 증가는 쌍무동맹전력, 다자동맹전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도량형을 통일하고, 아시아에서는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해 산업 발전의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 미국과 동맹국이 사용하는 핵심 장비에 대한 핵심 부품 제원이 급속하게 표준화하면 상호운용 전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권역별 국제 안보 역량도 강화될 여지가 크다. 정부 차원이 아닌 경제 상황에 예민한 민간기업 차원의 협력 강화는 동맹 필요성에 대한 우방국 국민이 결속을 다지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K-방산의 새로운 대장정 전진기지

    8월 29일 거제도에 소재한 우리 조선 기업이 미국 MRO사업에 진출한 것은 K-방산의 새로운 대장정 전진기지가 마련된 셈이다. 정부와 기업, 한미 국방 관계자들의 정보에 따르면 인도태평양 권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 MRO사업에 다수의 K-방산 기업이 참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K-방산의 미국 MRO사업 참여는 여러 측면에서 한국 안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미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질적으로 다르게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우리 기업과 한국에 대한 미국 안보의 의존도가 다른 차원에서 형성될 것이다. 둘째, K-방산이 새로운 시장, 경제성장을 견인할 경우 한미동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셋째, 이미 세계 방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K-방산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가 더 높아지고, 수출 환경을 극적으로 개선하는 전기가 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지원 속에서 국방부는 군수 분야 최고전문가와 기업 대표들을 미국 국방부 주최 연찬회에 참석시키는 등 미국 MRO시장에 진입하는 K-방산을 시의적절하게 돕고 있다. K-방산의 미국 MRO사업 진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길은 핵심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있다. 항공, 함정 등 핵심 부품 국산화율을 끌어올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태 환경을 구축하는 데 추가적이고, 지속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번개사업’ 시즌2를 기대하며

    8월 29일 미국 상원의원인 잭 리드 군사위원장(가운데)이 한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6·25전쟁실에서 전시 해설을 듣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8월 29일 미국 상원의원인 잭 리드 군사위원장(가운데)이 한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6·25전쟁실에서 전시 해설을 듣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건국 후 최초로 추진한 방위산업 육성 프로젝트 이름은 ‘번개’다. 1971년 1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번개처럼” 빨리 전쟁 초기 대비 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소총, 기관총, 박격포, 지뢰, 수류탄 등 기본 병기였다. 그 기본 병기조차 스스로 만들 수 없었던 처절한 방위산업 상황을 반영한 프로젝트 이름이다. 그 이후 역대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 영국에 군함을 수출하고, 미국 MRO사업에 진출하는 등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세계 10대 방산 강국을 만들어냈다.

    우리 기업이 미국 MRO 진출을 확정 지은 8월 29일, 미국 상원 잭 리드(J. Reed) 군사위원장이 한국의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는 우리 정부 예산의 1.5배인 약 900조 원에 대한 예산 편성 및 심의권을 갖고 있다. 전쟁기념관 거북선 모형 전시실 앞에 서 있는 리드 위원장에게 필자는 “400여 년 전 세계 최고의 군함, 거북선을 만든 DNA를 한국 기술자들이 갖고 있다. 미국이 우리 기업의 MRO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K-방산을 이끈 번개사업을 결심한 박정희 대통령, 이를 집행한 심문택 박사 등 K-방산을 개척한 모든 이에게 역사는 따듯한 갈채를 보내야 한다. 국민은 새로운 번개사업을 개척하는 정치의 진격을 갈망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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