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호

두산, 주주·시장에 변신 당위성 증명해야

[In-Depth Story] 세 번째 변신 위한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 ‘삐걱’

  •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

    입력2024-10-02 09:00:0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주식교환 발표 49일 만에 철회

    • 소비재→중공업 이은 세 번째 변신 ‘스마트 제조업’

    • 128년 역사 재계 最古 기업, ‘상업자본’으로 시작

    • 오너 2세 박두병, 소비재 기업 변모해 349배 성장

    • 중공업 기업 전환… ‘밥캣’ 인수로 유동성 위기 직면

    • 계열사 편중 현상 극복하려 ‘합병’ 카드 꺼냈지만…

    • 변신은 무죄지만 영속할 수 있는 ‘혼’ 지켜야

    [Gettyimage]

    [Gettyimage]

    8월 29일 두산그룹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에서 각각 긴급이사회를 열고 양사 간 포괄적 주식교환 계약을 해제하기로 결의했다고 공시했다. 7월 11일 양사 간 합병을 통한 사업 구조 개편을 발표한 지 49일 만의 철회다.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켓의 합병 철회로 원자력·수소에너지 등 ‘클린에너지’ 및 로봇·기계 등 ‘스마트 제조업’ 기업이 되고자 했던 두산그룹의 세 번째 변신 시도는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됐다. 128년 전 포목상에서 출발한 두산그룹의 첫 번째 변신은 맥주로 대표되는 소비재 기업, 두 번째 변신은 기계·중공업 중심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이었다.

    ‌7월 11일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두산밥캣을 인적 분할한 뒤 두산로보틱스 완전 자회사로 편입해 합병하는 방식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른 분할합병·주식교환 증권신고서도 금융감독원에 제출했다. 흡수합병이 종료되면 두산로보틱스는 두산밥캣 주주와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두산밥캣의 잔여 지분을 모두 거둬들이고, 상장 폐지를 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주주의 권익을 해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합병안은 두산그룹에서 영업이익이 우수한 ‘캐시카우’ 두산밥캣의 주식을 ‘만년 적자’ 두산로보틱스 주식과 1대 0.6317462의 비율로 교환하는 것이 뼈대이기 때문이다.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주주들이 극심하게 반발했고, 금융당국까지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면서 두산그룹은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두산그룹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시가총액과 주가 수준 등을 고려하면 적정한 교환 비율이며, 두산로보틱스의 성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주주 설득에 실패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의 비(非)지배주주는 소외되고 그룹 최대주주인 ㈜두산, 즉 오너 일가에 실익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한 모양새다. 합병 계획은 철회했지만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에서 두산로보틱스 산하에 편입하는 작업은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계획대로 되면 두산로보틱스는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유한 두산밥캣 지분 약 46%를 확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반 주주들과 업계는 두산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안 중 일부를 철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절실함이 낳은 밥캣-로보틱스 합병안

    두산그룹은 올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이하 대기업집단)에서 지난해 자산총액 26조9500억 원으로 LS그룹 다음인 17위를 기록했다. 2022년 대비 한 단계 하락했다.

    ‌두산그룹은 2000년부터 20여 년간 10위권 앞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0년부터 서서히 순위가 하락해 2022년 16위, 지난해와 올해엔 17위가 됐다.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 이후 2020년 8월부터 2021년까지 골프장 클럽모우CC(1850억 원), 네오플럭스(730억 원), 두산타워(8000억 원), 두산솔루스(2382억 원), 두산인프라코어(8500억 원) 등 자산 및 계열사를 매각한 영향이다.

    올해 3월 말 기준 두산그룹의 자산총액은 29조3745억 원이다. 지난해 말 28조2868억 원 대비 1조877억 원이 더 불었다. 두산그룹은 다시 재계 10위권 전반에 들기 위해 몸집을 키우고 있지만 특정 계열사 쏠림 현상은 약점이다.

    두산그룹의 자산 규모 증대는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두 계열사가 이끌고 있다. 1분기 두산에너빌리티의 총자산은 16조5735억 원으로 지난해 말 대비 2950억 원 증가했고, 두산밥캣은 11조892억 원으로 8210억 원 늘어 두 곳에서만 총자산이 1조 원 넘게 확대됐다.

    매출과 영업이익 편중 현상도 심하다. 올해 1분기 기준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의 매출이 그룹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 수준이며, 영업이익 비중은 95%에 육박한다. 2022년 2월 채권단 관리 조기 졸업 이후 두산그룹은 지난해 4월 반도체 기업 테스나 인수와 함께 IT·반도체,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첨단산업기계 등으로 미래 사업군을 재편하고 과감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업들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9월 4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2024 기후산업국제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이 두산에너빌리티 부스를 찾아 수소터빈 모형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9월 4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2024 기후산업국제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이 두산에너빌리티 부스를 찾아 수소터빈 모형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두산그룹은 창업 130주년을 맞는 2026년 전에 세 번째 변신을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두산그룹의 세 번째 변신은 △에너지(두산에너빌리티, 두산퓨어셀) △기계·자동화(두산밥캣, 두산로보틱스, 두산 로지스틱스솔루션,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 △반도체·소재(두산 전자BG, 두산테스나) 등 3개의 사업 영역 축을 중심으로 한다.

    최근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은 두산그룹의 3대 사업 분야 가운데 기계 부분의 사업 경쟁력 강화 및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사실 이러한 체질 개선 시도는 합병 이전에도 있었다. 올해 4월 두산그룹이 2020년 유동성 위기에 빠져 있던 당시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매각했던 모트롤을 다시 인수한 것이다.

    모트롤은 굴착기용 유압기기 등을 제조하는 민수 부문과 K9 자주포 포탑 구동장치 등을 생산하는 방산 부문을 운영하고 있다. 1977년 동명모트롤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고, 2008년 두산그룹이 ㈜두산을 통해 동명모트롤의 지분 52.9%를 1040억 원에 사들이며 인수했다. 당시는 두산그룹이 한창 사업 구조 개편에 열을 올리던 시기다.

    인수는 두산그룹의 사업 재편 차원에서 이뤄졌다. 모트롤은 꾸준히 현금을 창출하는 알짜 사업부가 됐지만 채권단의 자구안 압박에 몰린 두산그룹이 돈 되는 자산을 줄줄이 매각하면서 잃게 됐다. 2021년 초 사모펀드 운용사인 소시어스 프라이빗에쿼티(PE)-웰투시 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이 4530억 원에 이를 사들였다.

    올해 두산그룹이 다시 사들인 모트롤은 4년 전의 모트롤이 아니다. 모트롤은 지난해 12월 1일 인적 분할을 통해 방산 부문과 유압기기 부문으로 분할됐다. 방산 부문은 MNC솔루션으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있다. 추정 몸값은 1조2000억 원에 이른다.

    두산그룹이 인수를 한 건 나머지 반쪽, 모트롤의 유압기기 부문이다. 규모는 예나 지금이나 유압기기 부문이 크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두 사업 부문의 희비가 엇갈렸다. 유압기기 부문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다. 하지만 두산그룹이 기계 사업부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그마저 절실했다. 이와 같은 변신을 위한 절실함이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 추진을 낳은 것이다.



    最古 기업의 태동, ‘박승직상점’

    두산그룹은 국내 100대 기업집단 가운데 최장수 대기업집단이다. 약 130년 동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영속해 왔고, 그때마다 성장통을 겪었다. 두산그룹의 역사는 1896년 8월 1일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서 박승직(1864~1950) 창업자가 설립한 국내 최초 현대식 상점 ‘박승직상점’에서 시작했다.

    박승직상점은 개설 초기 주로 수입 면포를 다뤘으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 불경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던 비결은 우연히 시작한 ‘박가분’이라는 화장품 판매였다.

    ‘박가분’은 박 창업자의 부인 정 씨가 1915년 남편의 사업을 돕기 위해 면포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주려고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것이다. ‘박가분’을 사용해 본 여성들의 반응이 좋았고,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에 판로가 생겨나면서 박승직상점의 거래 상품으로 자리 잡게 됐다.

    소규모 가내수공업으로 시작된 ‘박가분’은 당시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1930년대 일본 화장품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입소문을 타며 박 창업자를 거부(巨富)로 만들었다. 자본이 모이자 박 창업자는 1925년 박승직상점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바꾸고 회사 사장이 됐다.

    1934년 2층으로 증축, 새 단장한 ‘박승직상점’ 모습. [두산그룹]

    1934년 2층으로 증축, 새 단장한 ‘박승직상점’ 모습. [두산그룹]

    ‌이어 맥주 산업은 박승직상점이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1934년 일본의 소화기린맥주의 국내 첫 시판이 시작됐는데, 일본이 유화정책으로 조선인인 박 창업자를 주주로 참여시킨 것이다.

    박 창업자는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림과 함께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해 위탁판매를 시작했다. 배급제를 시행해야 했을 만큼 사업은 번창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일본인 소유의 국내 기업에 대한 적산 불하가 시행된다. 이에 소화기린맥주는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게 됐다.

    박 창업자가 지배인으로 추천됐으나 그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했고, 그의 장남인 박두병(1910~1973) 두산그룹 초대 회장이 지배인을 맡게 됐다. 훗날 동양맥주가 탄생하게 되는 계기다. 한편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은 1946년 ‘두산상회’로 개명한다.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은 쌀을 한 말(斗), 두 말 쌓아 올리듯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큰 산을 이루라는 뜻을 담았다. ‘두산’을 아들에게 물려준 박 창업자는 1950년 12월 생을 마친다. 그는 두산그룹을 상업자본 바탕 기업에서 제조업 기업으로 변모하는, 첫 번째 변신 준비를 마치고 떠난 셈이다.

    ‘맥주’ 발판 삼아 349배 성장 이루다

    미국 군정청으로부터 소화기린맥주 지배인으로 임명된 박두병 회장은 1947년 상호를 ‘동양맥주 주식회사’로, 상표를 OB(Oriental Brewery)로 바꿨다. 1948년 7월엔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해 ‘두산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두산상회는 1951년에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발족했다. 이때부터 박 회장은 본격적으로 두산그룹의 발전을 이끌었다.

    동양맥주는 전쟁으로 파괴된 영등포 공장의 재건에 힘써 1953년 6월 생산 작업에 돌입, 8월에 맥주 출하를 재개한다. 휴전 직후 동양맥주의 OB는 라이벌 조선맥주보다 한 달 더 앞서 시판하고서도 판매실적은 그 절반에 그치는 등 열세에 힘겨워했다. 광복 직전 조선맥주의 선조인 대일본맥주의 시장점유율이 70%에 달하는 등 조선맥주의 세가 강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조선맥주와 치열하게 시장점유율 전쟁을 벌였다. 미스코리아, 유명 무용가 등 인기인을 모델로 한 컬러 캘린더를 제작·배포하는 등의 마케팅과 함께 대리점주와의 신의를 강조하는 등 ‘신용’ 전략을 썼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58년 시장점유율 57%를 기록하며 역전을 이뤄낸다. 동양맥주의 높아진 시장점유율을 기반으로 두산상회는 1960년대에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한양식품, 1967년 윤한공업사를 설립하고 1968년 한국병유리(현 테크팩솔루션)를 인수하는 등 이후 두산그룹의 근간이 되는 주요 회사들을 잇달아 출범시킨다.

    박 회장은 음료부터 소비재, 무역, 건설 등에 이르기까지 13개 회사를 세워 박 창업자 때 대비 매출을 무려 349배 성장시켰다. 박 창업자가 강조한 ‘한 말 한 말 쌓아 태산을 이룬다’는 뜻을 지키며 정도를 걸은 결과였다. 박 회장은 살아생전 “부끄러운 성공보다 좋은 실패를 택하겠다면 그 생각이 옳다”며 “좋은 시도가 있는 실패는 한 번의 기회를 잠깐 놓치는 것뿐이지만 부끄러운 성공은 수많은 기회를 모두 잃게 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박 회장은 1969년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를 자식이 아닌 전문경영인 정수창(1919~1999) 회장에게 넘겼다. 박두병 회장은 1973년 8월 4일 서울 연지동 자택에서 63세에 별세, 경기 광주시 선영에 안장됐다.

    B2C → B2B 전환 둘러싼 형제 갈등

    두산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10년 이상 지속한 후 1981년부터 ‘공동 소유, 공동 경영’을 뼈대로 하는 형제 경영 시대를 맞이했다. 박 회장이 만든 두산그룹의 맥주, 건설, 기계, 무역, 전자 사업 부문은 1980년대 ‘3저 호황’과 더불어 내수·수출의 호조세로 호황을 누린다.

    이어 1990년대 초입 두산그룹은 주력 계열사 OB맥주를 필두로 병뚜껑을 만드는 삼화왕관, 코카콜라를 유통하는 두산음료, 랄프 로렌(폴로 셔츠)을 유통하는 두산상사를 거느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두산그룹은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두산전자의 페놀 원액 유출)’ 사건으로 최대 위기를 맞이, 하향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경북 구미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 약 31만t이 들어 있는 저장 탱크와 생산라인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파열되며 페놀이 낙동강에 유출된 것이다. 페놀은 인체에 들어오면 신경계와 순환계를 모두 손상시키는 독성물질이다. 또 사측 담당자들이 사건을 은폐하면서 결국 소비자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졌다.

    그 결과 오비맥주의 시장점유율은 급격하게 하락했고, 1995년 두산그룹의 적자 규모는 9080억 원, 부채비율은 625%에 달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박정원 현 두산그룹 회장의 부친인 박용곤(1932~2019) 두산그룹 3대 회장이 2년 동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93년 복귀하기도 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두산그룹은 60여 년간 그룹의 주축을 담당하던 소비재 산업, 음료·주류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두 번째 변신의 시작점이다. 이 과정에서 사업 재편을 두고 형제 간 의견이 강하게 충돌했다. 둘째 박용오(1937~2009) 회장(6대)은 “소비재 산업을 버리는 것, 특히 집안의 뿌리나 다름없는 오비맥주를 버리는 것은 가문의 정체성을 집어던지는 일”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반면 셋째 박용성 회장(7대), 5남 박용만 회장(9대)은 “다 죽게 생겼는데 가업이 무슨 소용이냐”며 소비재 사업 철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오너 일가는 가족회의 끝에 OB맥주를 비롯한 소비재 계열사들을 매각하고 소비재 산업에서 인프라 사업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하기로 결정한다. 2000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두산에너빌리티)을 시작으로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HD현대인프라코어)를 인수하면서 두산그룹을 경공업 중심의 B2C 기업에서 중공업 위주의 B2B 기업으로, 업의 본질을 통째로 변신시킨다.

    밥캣 인수로 ‘승자의 저주’ 빠지다

    하지만 변신엔 고통이 뒤따랐다. 2005년 7월 21일 박용오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회장이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유용하고 해외 밀반출을 해온 것이 본인에게 적발되자, 공모해 일방적으로 자신을 회장직에서 내몰았다”고 주장하며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아울러 두산그룹은 박용오 회장이 비자금 등의 내용을 담은 투서를 검찰에 제출함으로써 ‘비자금 조성’ 파동에 휩싸이게 됐다.

    ‌‌이 기자회견이 있기 나흘 전, 회장실에 모인 박용곤 회장, 박용성 회장, 박용만 회장 등 두산그룹 3세 경영인과 박정원 회장(박용곤 회장의 장남) 등 4세 경영인 등 오너가(家) 경영진 15명이 박용곤 회장의 의견으로 “박용성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도록 하자”고 발표했고, 박용성 회장이 “가족의 뜻에 따르겠다”며 박용오 회장을 회장직에서 밀어낸 것이 발단이 됐다.

    ‌두산그룹의 형제 간 분쟁은 ‘박용오’ vs ‘박용곤-박용성-박용만’ 구도로 진행됐다. 결국 이 사건 이후 박용성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으로 추대됐고, 박용오 회장은 ㈜두산의 명예회장을 맡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두산그룹 형제의 난이 마무리되면서 두산그룹의 B2B로의 체질 개선은 다시 시작됐다.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를 통해 2007년 7월 30일 약 5조 원 규모의 미국 ‘밥캣’ 인수합병을 성사시켰다. 당시 기준 한국 기업 해외 인수합병 역사상 최대 금액이다. 다만 체질 개선과 경영 성공은 별개의 문제였다. 위기가 닥쳤다.

    두산인프라코어의 밥캣 인수합병 협조 융자 대주단엔 주관사인 한국산업은행을 비롯해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기업은행 등 총 12개 금융기관이 참여했다. 이들은 신디케이티드 론(syndicated loan·둘 이상의 은행이 해외 기업체에 공동으로 자금을 대출하는 것) 방식으로 39억 달러 지원을 결정했다. 당시 한국산업은행 이사가 “외국계 금융기관이 주도하는 대규모 해외 M&A 인수금융시장에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자체 능력만으로도 대규모 인수금융을 주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라며 자축했을 만큼 이례적 일이었다.

    그러나 밥캣은 곧 두산그룹을 유동성 위기에 몰아넣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용만 회장(당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이 타격이 없을 거라 자신하던 서브프라임 사태는 2008년 금융위기라는 이름의 세계 규모 경제위기로 번지면서 글로벌 경기를 냉각시켰고, 밥캣의 주력 부문이던 건설 경기도 싸늘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이로 인해 두산그룹은 지분법 손실(피투자회사의 당기순이익에 투자회사가 보유한 지분율을 곱해 계산한 금액)로만 1조30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인수 자금 49억 달러 가운데 대부분인 39억 달러를 차입에 의존한 점이 위기의 싹을 키웠다.

    이 사태는 모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를 흔들기 시작했다. 2008년 두산인프라코어의 총 차입금은 6조982억 원으로, 밥캣을 인수하기 전(1조2864억 원) 대비 5배 가까이 증가했다. 부채비율도 급격히 높아져 2010년 526.5%를 기록, 최고치를 찍었다.

    2011년부터 미국 건설 경기가 반등하면서 두산밥캣과 두산인프라코어는 동반 회생했지만 밥캣 인수가 불러일으킨 유동성 위기는 그룹 구조조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수 뒤 시간이 흘러 두산밥캣은 알짜 회사가 됐지만 두산인프라코어는 유동성 위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 여파는 두산그룹 전체로 번졌다. 실제 두산인프라코어의 순차입 규모는 2018년 2조9989억 원으로 2조 원대 턱걸이에 성공했지만 부채 부담은 여전히 컸다.

    두산그룹은 2016년 3월 박정원 회장 취임을 시작으로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박 회장은 3세 경영 시대에 시작한 두 번째 변신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감당해야 했다. 2020년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갚아야 하는 차입금 규모는 4조2000억 원에 달했다. 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이 긴급 운영자금을 최대 1조 원 지원하기로 했다. 나머지 3조 원은 만기 연장, 유상증자 등을 통해 해결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불투명했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전 세계 발전 수주가 줄어드는 데다 정부의 탈원전·석탄 정책이 맞물리면서 엎친 데 덮친 상황을 겪었다. 2018년 이후 2020년까지 두산중공업의 당기순손실은 1조 원이 넘었다.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 2600여 명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지만 신청자가 500명에 그치자 휴업을 검토할 지경이었다.

    결국 두산그룹은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했다. 두산중공업의 단기 유동성 조달을 위해 2020년 6월 산업은행에서 빌린 긴급자금 3조 원 가운데 절반가량을 다음 해인 2021년 상환했다. 2020년 8월 클럽모우CC를 시작으로 같은 달 네오플러스, 9월 두산타워, 10월 두산솔루스 등 친환경 에너지 분야와 연관성이 낮은 사업들을 연이어 매각하고, 12월 1조3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진행해 빠르게 자금을 확보했다.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까지 매각하며 차입금 대부분을 상환했다.

    박 회장은 2020년 4월 2조4000억 원 규모 채권단 지원을 받고 3조 원이 넘는 대규모 자구안을 채권단에 제출한 뒤 22개월 만에 채권단 체제를 조기 졸업함으로써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동시에 두산그룹의 세 번째 변신을 시작했다.

    두산, 무엇을 지키며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박 회장이 택한 세 번째 변신의 핵심은 사업 부문 다변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흔들리면 두산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형태의 사업 구조가 갖는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기존 원자력 중심에서 원자력을 포함한 수소에너지 등의 ‘클린에너지’ 사업 부문과 로봇·기계 등의 ‘스마트 제조업’, 마지막으로 반도체 후공정 기업인 테스나 인수에 기반한 ‘반도체 테스트 사업 및 의료기기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올해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간 합병은 이런 변신을 위한 구조조정 계획이었으나 두산그룹은 주주들과 시장으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변신은 무죄다. 다만 변신에는 그 기업이 영속할 수 있는 ‘혼’이 살아 있어야 혹독한 대가를 피할 수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하면서 시대에 발맞춰 변해야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 박승직 창업자는 아들 박두병 회장에게 기업을 물려주면서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지라’라며 ‘두산’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현재의 두산그룹은 세 번째 변신을 하면서도 무엇을 차근차근 쌓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무엇을 지키면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 또한 주주들과 시장에 보여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명쾌할 때 두산그룹은 세 번째 변신에 성공한 130주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