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수용
한반도의 등골을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해변을 따라 휘어져 내려오다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어 속리산으로 이어지고, 속리산에서는 다시 남쪽으로 진로를 꺾어 지리산으로 내려간다. 그 결과 한반도의 동남지역은 높은 산맥으로 차단되어 별구(別區; 따로 떨어진 구역)를 이루게 되니, 옛 신라땅인 경상도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이 지역은 교통의 불편으로 자연 문화전파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어 외래문화 충격을 상당 기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 인심 역시 자연 보수성과 배타성이 강화돼나갔으므로 외래문화 유입을 갈수록 꺼리게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지역이 중국의 한사군 설치로 인해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아 세계화하고 있을 때, 이 지역만은 이를 외면한 채 전통문화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성숙과 인접 국가의 문화 성장은 신라로 하여금 더 이상 외래문화 유입을 거부할 수 없게 하였으니, 김씨 왕들이 본격적으로 세습을 시작하는 눌지왕(訥祗王, 417∼457년)대부터 불교의 전도승들이 고구려로부터 흘러 들어와 문호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사문(沙門; 쳒ramana의 음역으로 출가 수행자, 즉 승려를 일컬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으로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아도기라(阿道基羅; 아도가 신라에 터잡다)의 내용은 이런 상황을 짐작케 해준다.
그런데 배타적인 신라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던 듯, 묵호자는 모례의 집에서 굴실을 파고 숨어 살아야 했다고 한다. 이때 눌지왕은 이미 불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22년(412), 즉 신라 실성왕(實聖王) 11년에 눌지왕의 둘째아우인 왕자 복호(卜好)가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고구려 장수왕 6년(418)인 눌지왕 2년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복호왕자는 광개토대왕릉의 수묘인(守墓人; 묘를 지키며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말하고 있는 한예(韓穢) 220가(家) 수묘인 연호(烟戶; 굴뚝에서 연기 나는 집이란 의미로 백성의 집을 가리킴) 중의 하나로 편입돼 있다 돌아온 듯하다. 그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경주 호우총(壺塚)에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명문이 바닥에 양각된 청동제 대접(壺)이(도판 1)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던 6년 세월 동안 당시 신지식이던 불교와 충분히 접촉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불교는 환란을 구제하는 구세의 이념이고 복호는 강국에 인질로 잡혀와 있는 약소국의 왕자로서 항상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 터이니, 불교 미전도국(未傳道國)의 왕자와 불교 교단의 접촉은 상호 이해관계 위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묵호자의 선산 지역 전도는 복호 왕자와의 선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워낙 배타적 성향이 강하여 도저히 드러내놓고 불교를 전도할 수 없었으므로, 묵호자는 집 안에 굴실을 파고 들어앉아 인연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은밀히 전도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모례는 눌지왕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이와 같이 외래이념을 수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눌지왕 자신이 실성왕 16년(417) 5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가던 도중 실성왕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밀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고구려 사람에게 들은 뒤 신라로 돌아와 실성왕을 시해하고 자립해 왕이 된 인물이다. 그러니 그를 차마 죽이지 못할 만큼 친교를 맺었던 고구려 사람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의 국제 지식인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눌지왕은 복호의 불교 지식에 쉽사리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눌지왕은 실성왕을 시해했다는 도덕적 결함 때문에 배타적 성향이 강한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외래 이념인 불교를 드러내놓고 수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비밀 전도를 시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생각된다.
불교 배척한 보수세력의 음모
이후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점차 확대해갔던 듯하다. 눌지왕을 뒤이은 자비왕(慈悲王, 458∼478년)의 왕호가 불교식이고, 그 다음 소지왕(炤知王 혹은 照知王, 479∼499년) 역시 그런데, 비칠 소(炤)자의 의미대로 소지왕을 우리말인 ‘비처’왕(毗處王)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데서 비처를 부처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름답게 이 왕대(王代)에는 왕궁 안에다 불전(佛殿)을 두고 불교의식을 맡아 집전하는 분수승(焚修僧)도 기거하게 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권1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집을 쏘다) 조에서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이 즉위 10년(488) 무진에 천천정(天泉亭)에 갔는데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우는 일이 있었다. 쥐가 사람 말을 지어 하되,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한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따라가라 하니 남쪽으로 가서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讓避寺村)이니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다.
마침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므로 잠시 머물러 보다가 홀연 까마귀가 있는 곳을 놓치고 말았다. 길거리를 헤매는데 그때에 늙은 할아비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치는 일이 있게 된다. 겉면에 쓰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만 죽을 뿐이라’ 하였다.
심부름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바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아서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한다. 그러나 일관(日官; 길흉을 가리는 직책을 맡은 관리)이 이렇게 아뢴다. ‘두 사람이라는 것은 백성이고 한 사람이라는 것은 왕입니다.’ 왕이 그럴듯하게 여겨 열어보니 ‘거문고 집을 쏘라’고 씌어 있다.
왕이 궁으로 들어와 거문고 집을 보고 그것을 쏘니 이에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이 궁주(宮主; 왕비)와 몰래 사통하여 간음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처형되었고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양 정월 첫 돼지날(上亥日)과 첫 쥐날(上子日) 및 첫 말날[上午日; 말 오(午)가 까마귀 오(烏)와 동음(同音)이므로] 등의 날은 온갖 일을 꺼리고 삼가 감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15일로는 까마귀 제삿날을 삼아 찹쌀밥으로 제사지냈는데 지금까지 행해지며 우리말로 달도()라고 부른다. 슬프고 근심되어 온갖 일을 꺼리어 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 글이 나온 못)라 이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어딘지 보수세력들의 계획된 음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불교가 왕실 포교에 성공하자 보수세력이 왕비와 전도승에게 파렴치한 누명을 씌워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불교의 공식 전파를 저지하려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동고승전’ 권1 아도전에 따르면 이후 고구려승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 )가 연이어 들어왔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하였으니, 이를 통해 보아도 비처왕비와 분수승의 간통은 조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래서 비처왕도 곧 이 사실을 깨닫고 수습에 나섰던 듯하다. 이 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여 왕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다음 2월에는 왕이 일선군으로 가서 홀아비와 과부 및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이들을 위로하고 곡식을 내려주었으며, 3월에는 돌아오면서 오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주군(州郡)의 죄수들을 석방했다고 했다.
왕이 1월 중순에 왕비와 분수승을 처형하고 2월에 곧바로 일선군을 위로 방문했다면 분수승 처형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선군은 이미 불교 포교의 거점이 되어 상당한 불교세력이 형성돼 있었고, 분수승도 이곳으로부터 초빙돼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 조의 다음 내용과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처왕 시에 아도(阿道 혹은 我道)화상이 시자 세 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 집으로 왔는데 겉차림이 묵호자와 비슷했고 몇 년 살다가 병 없이 죽었다.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전과 율문을 강독하니 가끔 믿고 받드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도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 그 어머니는 고구려 여자 고도령(高道寧)이고 아버지는 위(魏)나라 사신 아굴마(我堀摩)”라 하고 있다. 선산 일대의 불교세력이 고구려와 중국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대목이다. 비처왕이 분수승을 처형하고 곧장 일선군으로 달려가서 백성들을 달래야 했던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음모였든 아니었든 간에 승려와 왕비의 간통이라는 불미스러운 사건은 배타적 보수세력들에게 불교수용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지왕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듯, 눌지왕의 외손자이자 눌지왕 아우의 손자인 지증왕(智證王, 500∼513년)이 소지왕, 즉 비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지증왕의 왕호 역시 지혜(智慧)로 증득(證得)한다는 의미의 불교식 왕호다. 본래 왕호는 지철로(智哲老) 혹은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라는 신라 고유어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알 수 없으되 ‘삼국유사’ 권1 지철로왕 조에서 그의 음경(陰莖) 길이가 1척 5촌[이 당시 사용하던 건초척(建初尺)에 의하면 1자가 25.1415cm였다], 약 37.5cm나 돼 짝을 구하기 어려웠다 하니 혹시 이것과 연관된 이름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이름을 불교식 한자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여 지증이라 하였을 것이다.
이 지증왕은 등극할 때 이미 나이가 64세였으므로 재위 15년만에 79세로 돌아가고, 장자인 법흥왕(法興王, 514∼539년)이 뒤를 잇는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법흥왕이 즉위하던 때(514년)는 중국 문화권 전체가 불국토화(佛國土化)하여 불교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북위에서는 세종 선무제(宣武帝, 500∼515년)가 이미 당금(當今; 현재)의 여래로서 낙양 용문산에 부모인 고종(高宗)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부부를 기리는 추선굴(追善窟)인 빈양중동(賓陽中洞)을 거대한 규모로 조성해 낸다(제7회 도판 8).
선무제 서거 후에는 그의 황후로 섭정을 맡았던 영(靈)태후 호(胡)씨가 섭정 초기인 숙종 효명제 희평(熙平) 원년(516)에 낙양성 안 영녕사(永寧寺)에 1000척(약 250m) 높이의 9층 목탑을 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502∼549년)는 스스로 보살제(菩薩帝)를 자처하며 조회(朝會)를 불교의식처럼 치르는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백제도 미구에(527년경) 무령왕의 초상 조각으로 사람 크기의 (제7회 도판 7)을 조성해낼 정도였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백제가 무령왕 21년(521) 고구려로부터 제해권을 되찾고 11월에 양나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법흥왕도 이 편에 딸려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놓게 된다.
이때 사신들이 백제와 양나라를 둘러보면서 불교문화의 극성현상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의 충격적인 보고에 놀란 법흥왕은 반드시 자기 대에 불교를 공식 수용하여 국제사회에 손색 없는 일원으로 성장하려는 욕망을 품는다. 이는 사실 외증조부이자 종증조부인 눌지왕 이래 김씨 왕들의 숙원사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보수성이 강한 신라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여 시끄럽게 떠들자 가까이 모시던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뭇 사람의 의논을 진정시키라고 한다. 이에 법흥왕은 본래 불도를 일으키려는 일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잘못이라고 하며 이를 듣지 않자 이차돈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불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습니다.”
이에 법흥왕이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니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승도(僧徒)를 보니 어린애처럼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의논하는 것이 기괴하여 일상(日常)의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것을 좇는다면 아마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신 등은 비록 중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차돈이 혼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입니다. 대저 비상(非常)한 사람이 나와야 그런 후에 비상한 일이 생긴다 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불교는 연원이 분명하고 뜻이 깊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법흥왕이 “뭇 사람의 말은 뭉쳐서 깨뜨릴 수 없는데 너만 홀로 말을 달리하니 양쪽을 쫓을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옥리(獄吏)에게 내려주어 그를 죽이라 했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해서 형벌을 받으러 나가니 부처님이 만약 신통력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남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차돈의 목을 치자 피가 솟구치는데 빛이 희어서 젖과 같았다. 뭇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서 다시는 불사(佛事)를 헐뜯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삼국사기’ 권4 법흥왕본기 법흥왕 15년(528) 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려 고종 때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석법공(釋法空; 법흥왕의 법명)전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키기 위해 크게 가람을 세우고 불상과 설비를 갖추려 하자 대신 공알(恭謁) 등이 이렇게 간했다.
“요사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치 않고 더하여 이웃나라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부역시켜 쓸데없는 집을 짓겠습니까.”
이에 왕은 좌우 신하들이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16년(529)에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 이차돈 혹은 居次頓이라고도 한다)이 26세의 의혈(義血)청년으로 왕의 큰 뜻을 돕기 위해 이렇게 은밀하게 아뢴다.
“폐하가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신이 거짓 왕명으로 맡은 관청에 전하기를 왕이 불사를 시작하려 한다고 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뭇 신하들이 반드시 간할 터이니 마땅히 칙령을 내려, 짐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왕명을 바꾸었는가 하십시오. 저들이 마땅히 신의 죄를 탄핵할 터인데 만약 그렇게 아뢰기만 한다면 저들은 꼭 굴복할 것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사납고 거만한데 비록 경을 죽인다 해도 어찌 굴복하겠는가”라고 한다. 이에 박염촉(이차돈)은 이렇게 말한다.
“큰 성인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바이라 만약 소신을 목 베면 마땅히 하늘과 땅에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히 어기고 오만하겠습니까.”
이후 진행 상황도 ‘삼국사기’에서 요약한 내용보다 훨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지루하니 생략하기로 하고, 목이 잘리면서 이변이 일어나는 대목만 옮기면 이렇다.
“목을 치자 그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산꼭대기에 이르러 떨어졌다. [경주에 있으니 뒷사람들이 이곳에 자추사(刺楸寺)를 세웠다. 자추는 법추(法楸)라고도 한다]. 흰 젖이 목이 잘린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었다. 날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하늘은 기묘한 꽃으로 꽃비를 내리며 땅은 크게 흔들려 움직이니 임금과 신하 및 백성들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舍人), 즉 박염촉이 무거운 법으로 죽은 것을 슬퍼하여 서로 보고 슬픔을 표시하며 통곡하였다. 드디어 남긴 몸을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지냈는데 예법에 맞게 하였다. 이때 임금과 신하는 이렇게 맹세하였다. ‘지금 이후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自今而後 奉佛歸僧). 이 맹세를 변경하는 일이 있으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리십시오.”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原宗興法; 원종이 법을 일으키다) 염촉멸신(厭滅身; 염촉이 몸을 버리다) 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다만 이 해가 법흥왕 14년(527) 정미(丁未)이고 염촉의 나이 22세였다는 정도의 차이만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의 염촉멸신 내용은 원화(元和)연간(806∼820년)에 남간사(南澗寺) 사문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 염촉의 향기 나는 무덤에 예불하기 위해 모임을 만드는 글)을 요약해 옮긴 것이라 한다.
이에 따르면 원화 12년(817), 즉 헌덕왕 9년 8월5일에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住) 효원(孝圓), 김상랑(金相郞) 및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찬 김억(金) 등이 이차돈의 제삿날을 기리기 위해 옛 무덤을 개수하고 큰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도판 2)일 것이다. 마멸이 심하여 비문 내용은 대부분 알아보기 어려우나, 다만 제1면에 목이 떨어져 나가며 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광경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이차돈 순교 장면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로 보면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삼국사기’(1145년 편찬)의 법흥왕 15년설과 ‘해동고승전’(1215년 편찬)의 법흥왕 16년설 및 ‘삼국유사’(1281년 편찬)의 법흥왕 14년설 등 세 가지 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에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자못 혼란스러우나, 아무래도 ‘삼국사기’가 유교사관에 입각해 기술한 정사(正史)이니 이를 따를 수밖에 없겠는데, 3설을 절충해도 법흥왕 15년(528)이 된다.
경주 남산 불곡(佛谷) 선정불좌상
이토록 밀고당기는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불교의 공식 승인이 이루어지자 신라사회는 이제까지 어떤 외래 문화의 충격도 받아본 적이 없는 순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지에 물감이 스며들듯 급속도로 불교화가 이루어져 나간다. 법흥왕 16년(529)에는 살생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21년(534)에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의 조영에 들어가며 국왕은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고 이 절에 주석한다.
이는 대체로 양(梁) 무제(武帝)의 사신[捨身; 몸을 버려 삼보의 노예가 됨. 527년 3월 1차로 동태사(同泰寺)에서 사신하고 529년 9월과 547년 3월에 같은 절에서 2차 3차로 사신한다]에 영향받아 한 수 더 뜬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비구니가 되었다.
어떻든 이로부터 신라가 곧 불국토이고, 현재의 김씨왕족이 곧 석가족(釋迦族)과 같은 크샤트리아(Ksatriya, 刹帝利)라는 관념이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이런 이념으로 국민정신을 한데 묶어 장차 통일을 이루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 많은 불상이 조성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초기의 국가사업으로 이룩되었다는 흥륜사나 영흥사·황룡사 등의 불상들이 모두 현존하지 않아 그 양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 신라가 백제와 밀월관계에 있었고 또한 양나라로부터 전해지는 남조불교도 백제를 통해 들어온 듯하니, 백제의 불장(佛匠)들이 들어와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커서 처음에는 백제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실례가 바로 남산 불곡의 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도판 3)이다. 천연암석에 감실(龕室)을 경영하면서 입체조각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높은 돋을새김)로 조각함으로써 중국의 운강·용문 등 석굴조영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이는 전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 태안반도의 (제7회 도판 7)이나 (제7회 도판 9)에서 그 양식적 선구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이 불상이 포복식(抱腹式) 불의(佛衣)와 포수좌(袍垂座-裳懸座)를 갖춘 백제 불좌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이면서 둥글고 온화한 백제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음에야!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인 초기 불상의 유일한 예라고 해야 하겠다.
법흥왕은 불교의 공식 수용에 의해 국제사회로 웅비(雄飛)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 우선 해상진출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법흥왕 19년(532)에 지금의 김해 지방을 근거로 해상왕국을 이루고 있던 금관(金官)가야를 합병한다. 그 왕인 김구해(金仇亥)와 왕비 및 세 왕자인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 삼 형제가 나라의 재산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고 한다. 신라의 국세가 배로 늘어나며 해양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법흥왕 23년(536)에는 독자 연호(年號)를 처음 세워 건원(建元) 원년을 일컫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백제의 성왕은 법흥왕 25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泗, 부여)로 옮겨 신라의 해상도전에 대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