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청계천 7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학생들이지만 개중에는 꽤 나이 든 사람도 보인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손에 제법 큰 가방이 들려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아서 계속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이 근처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영화 비디오테이프(이하 비디오) 도매상가에 원정 나온 비디오 수집가들이다.
요즘은 비디오대여 시장의 경기침체로 다소 썰렁하지만 지난해만 해도 이 부근은 일요일이면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렸다. 비디오대여점 업주 입장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난 비디오라 해도 여러 고객이 원하면 서비스 차원에서 구해다 놓을 수밖에 없다. 청계천 7가는 이런 비디오대여점 업주 외에도 취미 삼아 비디오를 수집하는 마니아들에게는 아쉬운 대로 중고 비디오를 구입할 수 있는 쇼핑타운인 셈이다.
쓰레기 속에서 보물 찾기
영화마니아인 비디오수집가들은 가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비디오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끈질기게 고른다. 하지만 이미 청계천 도매상가의 업주도 ‘희귀·명작 비디오’에 대해 정통해 있는 터라 소위 값나가는 비디오는 따로 보관해놓고 바닥에 쌓아놓은 것은 형편없는 ‘똥프로’(소장 가치가 없는 영화를 가리키는 속어)인 경우가 태반이다.
몇 달 전 청계천에서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구자인 장 릭 고다르 감독의 대표작 ‘미녀갱 카르멘’과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 존 카사베츠 감독의 ‘사랑의 행로’(원제는 Love Streams)를 구했다는 영화광 L씨는 “월척을 낚는 기쁨이 이보다 더하랴”라는 말로 감격을 대신했다. 이 두 작품은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끼리 거래가 이루어지면 최소한 5만~10만원까지 거래될 수 있는 명작비디오. 이 보물을 단돈 1000원씩에 구입했으니 L씨로서는 횡재한 셈이었다.
이들이 주로 구하는 희귀 비디오란 아트, 명작, 고전, 컬트 등의 영화로, 출시된 지 오래돼서 구하기 힘들거나 처음 출시 때부터 소량으로 나온 비디오들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분노의 주먹’ ‘비열한 거리’를 비롯, 데보라 카 주연의 ‘흑수선’,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카트린느 드뇌브 주연의 ‘셀부르의 우산’, 샘 페킨파 감독의 ‘철십자 훈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호금전 감독의 ‘협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해탄적일천’,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위대한 휘츠카랄도’ 등 잘 알려진 걸작에서부터 조니 뎁이 주연하고 존 워터스가 감독한 컬트영화 ‘사랑의 눈물’, 누벨바그의 여성기수 아네스 바르다 감독의 유일한 출시작 ‘아무도 모르게’,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광선’ 등 수준 높은 영화 마니아여야 알 만한 숨겨진 걸작 등 다양하다.
아주 오래된,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영화 한 편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실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마니아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아예 국내에 개봉하지 않았거나 개봉했더라도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면 포기해버리면 되지만 분명히 비디오로 출시됐다는데 구하기가 어렵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때부터 마치 상사병을 앓는 사람마냥 그 영화만 생각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비디오 대여점에 내가 찾던 비디오가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비디오 재킷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비디오를 손에 쥐고 날마다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게다가 오래 보관해둘수록 가치도 높아지니 재산증식의 이점도 있고, 소장자료로도 가치가 빛나게 된다.
자신의 사무실에 800장 정도 소장하고 있는 영화감독 김동빈씨는 “좋은 영화 한 편을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관이 집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가의 명작은 수십 번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은 법이고 또 공부를 위해서도 봐야 하는데, 항상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다”고 말한다.
‘으뜸과 버금’과 ‘영화마을’의 건전비디오 보급운동 아트영화나 명작, 고전 영화 비디오에 일반인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 YMCA 건전비디오연합회에서 주관하던 ‘으뜸과 버금’이란 모임이 ‘1차 선정작 478선’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실 그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비디오문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디오 하면 으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를 연상했을 정도로 통속적인 비디오가 판을 쳤고, 청소년에게 꿈과 사랑을 주는 건전한 비디오 보급은 뒷전이었다.
YMCA는 비디오 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 90년 초 건전비디오연합회를 만들어 좋은 비디오 보급에 나섰다. 그 결과 각계 전문가들이 선정한 우수비디오를 발표했으나 정작 비디오보급의 최일선에 있는 비디오대여점이 이런 우수비디오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주로서는 장사에 도움이 안 되는 비디오를 비치할 수는 없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건전한 시민들의 ‘비디오 일기’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우수비디오 보급은 먼저 우수비디오상점을 발굴 소개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 건전비디오연합회는 91년 ‘으뜸과 버금’이란 친목단체를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우수 비디오상점들을 찾아 나섰다. ‘으뜸과 버금’에 가입할 수 있는 비디오대여점의 자격은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하고, 건전비디오연합회가 선정한 우수비디오를 다수 소장해야만 했다. ‘으뜸과 버금’의 취지에 동참한 회원들이 늘어가면서 우수비디오상점이 도처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명작이나 고전 영화비디오 구입의 관심도 이때부터 높아졌다.
94년 ‘으뜸과 버금’ 멤버 중 일부가 영화체인점 ‘영화마을’을 만들면서 건전비디오 보급은 일반인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영화마을은 ‘특선 1000선’을 선정해 각 체인점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보유하게 했는데, 가맹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명작 희귀비디오의 유통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으뜸과 버금’이 95년 ‘으뜸과 버금 2000선 목록집’에 이어 97년 ‘3000선’을 발간하면서 아트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으뜸과 버금’이나 ‘영화마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97년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4대 통신사의 영화동아리들도 명작 영화 보급에 일조했다. 취미 삼아 보던 영화에서 탈피해 좋은 영화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졌고, 회원끼리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명작영화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회원끼리 좋은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교환해서 보거나 함께 구입하러 다니는 것도 일상사가 됐다.
수많은 영화동아리가 있지만 유니텔 시네시타 내의 ‘배드 테이스트’는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컬트영화나 그들 스스로 평가한 영화들을 소개한다는 데서 관심을 모은다. 정기적으로 비디오영화제도 개최하는 ‘배드 테이스트’의 초대방장 최명국씨는 “설립된 지 2년여 동안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렸던 영화 중 주옥 같은 작품들을 재조명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비디오 수집은 단순한 컬렉션이 아니다. 영화란 종합예술이며 시대를 조명하는 역사적인 자료라는 가치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돼 있는 시네마테크 운동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시발점이라는 데서도 열악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시네마테크, 이것이 비디오 수집이다. 즐거움을 얻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취미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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