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이다. 총면적은 714km2에 이른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특히 남섬은 375.5m의 원견산(遠見山)을 필두로, 328.6m의 홍엽산(紅葉山), 158.2m의 백악산(白嶽山) 등이 있어, 온 섬이 숲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 계곡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사 이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호구지책을 삼아 왔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세는 험준하며, 깊은 숲이 우거져 있다. 길은 매우 좁아 짐승이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사람은 1000여 호가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거둬 자활(自活)하고 있다. 식량은 선박을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에서 구하고 있다.”
‘慶尙道에 속한 對馬島’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의 속령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해행총재(海行摠載)’는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倭人)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정부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고 적었다. ‘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 기서(記書)에도 “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대마도는 영남에 속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니 대마도는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는 15세기의 대마도를 연구하는 기본 문헌 중의 하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마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풍속은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대마도는 해동 여러 섬의 요충지이므로 조선을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본도(대마도)의 거주자에 한하고 도주의 문인[渡航證]을 받아야 조선에 올 수 있게 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재위 1419~1450년)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있다.
대마도 왜구들의 해적행위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해유록’은 여러 통신사의 일본 기행문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대마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당시 왜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이때 대마주인들은 지금의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소주(蘇州) 사람이나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인, 복건성(福建省) 사람, 그리고 당시에는 ‘류큐(琉球)’로 불렀던 지금의 오키나와(沖繩)인, 또 아란타(阿蘭陀) 사람들과 해상교역을 벌였다. 그로 인해 대마도에는 주기(珠璣·보석)와 서각(犀角·무소 뿔), 짐승의 이빨가루, 후추, 사탕, 소목(蘇木·한약재), 비단 등이 폭주하였다. 대마주인들은 이러한 물품을 전매하여 번 돈으로 의복과 식량을 마련하고 생활필수품도 구입했다. 그러나 도주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대마도인들은 필사적인 해적행위를 하는 왜구(倭寇)로 표변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마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본거지였다. 대마도 왜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처음 나온다. 신라본기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7년(408) 춘 2월조(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인이 대마도에 영(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꾀하고 있다.” 신라본기에서 처음 나온 왜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서도 빈번히 나온다. 그만큼 한반도와 대마도는 밀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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