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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자금성에서 엿본 중국 황제의 사생활

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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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이 700여 개, 방이 9000여 개에 이르는 자금성은 ‘도시 속의 도시’나 다름없다. 도성의 거대한 규모는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일컫던 옛 황제들의 위엄을 드러내지만, 구석구석 발품을 팔며 살펴보면 곳곳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다.
  •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건륭제를 중심으로 중국 황제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본다.
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명·청 왕조가 정궁으로 사용한 자금성(紫禁城).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밤새 눈이 내렸다. 밖은 온통 백설의 세계다. 황제를 상징한다는 황색의 유리기와 지붕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금성(紫禁城)의 수많은 전각들 모두가 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눈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든 것 같다. 여느 날보다 일찍 눈을 뜬 건륭제(乾隆帝)는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침소를 나왔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자 바삭바삭 눈 밟히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가 발길을 멈춘 곳은 채광이 아주 좋은 전전(前殿)의 삼희당(三希堂). 오늘처럼 흰눈이 대지를 온통 덮어버리는 날이면 화급을 다투는 일이 없는 한 어김없이 이 삼희당을 찾는 것이 그의 습관이자 낙이다.

재위 11년째 되던 해(1746년) 봄 2월 어느 날, 건륭제는 뜻하지 않게 동진(東晋)시대의 서예가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손에 넣게 됐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일우로 내가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선대에 황실로 들어온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을 백원첩과 합쳐 ‘세 가지 보물(三希)’이라 부르고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두기 위해 자신이 정무를 보는 양심전(養心殿)의 전전에 작은 서재를 꾸몄다. 한 평이 조금 넘는(4㎡) 작은 방에 ‘세 가지 희귀한 보물’을 모셔놓았다 하여 그 이름을 삼희당이라 지었다.



이들은 모두 왕희지 일가의 글씨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둥(山東)에서 태어났으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변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정착, 수많은 서첩을 남긴 왕희지(303∼361)는 글씨의 나라 중국에서도 ‘서성(書聖)’으로 추앙 받는 인물. 한마디로 글씨의 대가다.

왕희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서법은 전서와 예서 일색이었는데, 강남에 문화다운 문화를 진작시킨 동진시대 왕희지 일족에 의해 행서, 초서, 해서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 서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중국 문인들의 모델이 됐다. 그러므로 그에게 서성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서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희지의 서법에 매료된 건륭제는 만주족이라는 혈통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색 유리기와가 흰눈에 덮여버린 날, 그는 근엄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소박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예술사랑에 빠진 ‘문화황제’

삼희당, 나아가 양심전에선 첫눈에 봐서 이렇다할 만한 장식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안(書案), 탁자, 의자, 장롱 등이 하나같이 자단목 같은 진귀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마루에 깔린 요는 담황색 공단인데, 그 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꿨다. 여름에는 갈포나 하포, 겨울에는 수달피와 담비 가죽, 해룡피를 깔았다. 동난각(東暖閣)의 남쪽 창문과 항탁(온돌 위에 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당대(唐代) 도자기가 놓여 있다. 옥기와 도자기, 서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단연 쾌설시청첩이다. 이것은 왕희지가 대설이 내린 다음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산음장후(山陰張侯)의 안부가 궁금해 그 심정을 전하고자 쓴 한 장의 서한문이다.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이고, 가로 14.8cm, 세로 23cm의 작은 지면에 4행의 행서로 고작 28자만을 적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를 보고는 ‘신기(神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서화를 평할 때는 ‘능(能)’ ‘묘(妙)’ ‘신(神)’이란 말로 표현했다. ‘신’은 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찬사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서첩 옆에다 ‘神’이란 글자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천하무쌍 고금선대(天下無雙 古今鮮對)’라는 댓구를 덧붙였으며, 삼희당이란 인(印)을 세 개씩이나 찍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서첩에 매료됐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단지 낭만적인 기분에서 이 서첩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춘전(春前)의 서설(瑞雪)’ ‘입춘, 감설(甘雪)이 내리다’라는 글귀까지 남겨놓은 것을 보면 그는 눈을 어지간히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북 지방에선 겨울 적설량의 다소가 다음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을 결정지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백성을 아끼는 어진 군주였다. 건륭제는 그렇게 서설이 펑펑 내리는 날엔 긴요한 공무가 없으면 상서방, 군기처, 육부의 관리들에게 임시 휴가를 줘 가족끼리 모처럼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설경을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건륭제가 심취한 것은 서첩뿐만이 아니었다. 그림과 도자기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당시 왕실 도자기는 장시성(江西省)의 경덕진(景德鎭)에서 구워냈다. 인근 고령산의 흙이 화강암이 풍화한 것이라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백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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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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