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가 좋아했던 도자기는 법랑채였다. 법랑은 색채가 너무 선명해 문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제는 순백의 소지(素地)에 세세한 필체가 가해지면 전통적인 중국화의 세계까지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깊고 맑은 채색을 주문했다.
그리하여 비취색이 도는 푸른 바탕 위에 붉은색, 노란색, 녹색의 모란, 봉황, 나비 등이 영롱한 자태를 취하고 있는 최고의 걸작들이 태어났다. 지금도 자금성, 아니 고궁박물원(자금성은 1925년 ‘고궁박물원’이란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됐다)에는 이런 법랑채가 다수 남아 있다.
요즘 ‘문화대통령’이라는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문화와 예술을 배려해 달라는 심정에서 하는 말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스스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문화대통령이 될 수 없다. 수준 높은 감상자가 없으면 결코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건륭제의 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건륭제의 이같은 깊은 관심이 후일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전무후무한 백과전서를 편찬케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고전서는 중국의 역대 문헌들을 유교 고전을 일컫는 경(經), 역사서인 사(史), 유교 이외의 고대 사상과 기술에 관한 저작인 자(子), 시집 또는 문집을 지칭하는 집(集)의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10년간에 걸쳐 집대성한 것으로, 총 7만9582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상자 속의 황태자
건륭제(1711∼99)는 1735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무려 60년(말년에 태상황제로 재위한 것까지 포함하면 64년) 동안 재위한 청나라 제6대 황제다. 중국의 그 많은 황제들 가운데서도 사실상 가장 오래 제위에 머문 인물이다. 그는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제(康熙帝)를 조부로 하여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름은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그는 넷째 아들이면서도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또는 비밀입도법)에 따라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즉위했다. 밀건법이란 황제가 왕위 계승자의 이름을 적은 유조(遺詔)를 건도갑(建匣)이라는 상자에 넣어뒀다가 세상을 떠나면 즉시 뚜껑을 열게 해서 왕위를 잇게 한 제도다.
만주족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적출과 서출을 가리지 않고 황자의 나이 순서대로 ‘제1 아고(황자)’‘제2 아고’ 하는 식으로 불렀으며, 그들 모두를 아고방에 수용해 키웠다. 그러므로 교육 내용에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는 자격이 있는 자가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 황태자를 세워서 계승자를 정해놓을 수 없었다.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 순치제 등 초기 3대까지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상에 불탔던 강희제는 만주식의 이러한 왕위 계승방식에 반발, 처음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황태자를 세웠다.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말썽의 연속이었다. 황실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 어쩔 수 없이 후계자 지정을 무효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황실 측근들의 옹립으로 황제가 된 옹정제는 강희제의 실수를 거울삼아 밀건법이라는 독특한 왕위 계승방식을 고안해냈다. 황제가 생전에 황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 가장 제왕다운 자질을 가진 이를 고른 다음 그의 이름을 적은 유조를 작은 상자 속에 넣고, 그것을 다시 건도갑에 넣어뒀다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대신들이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발표하게 한 것이다. 건도갑을 둔 장소는 건청궁(乾淸宮)의 옥좌 뒤. 그 위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밀건법은 제9대 함풍제 때 폐지됐다.
經書로 머리 적시고 茶로 목 축이고
명·청 왕조가 정궁으로 사용한 베이징의 자금성은 가로 750m, 세로 1000m의 장방형 공간으로 700여 개의 건축물과 9000여 개의 방이 있다. 한마디로 도시 속의 도시인 것이다. 통자하(筒子河)라는 사각의 해자로 둘러싸인 자금성은 천안문 광장을 바라보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외부 인사들이 출입하기에 좋은 남쪽 부분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탄신 축하연, 혼례식, 중요한 칙령의 공표, 외국 사신의 조공, 출정하는 장군의 임명식 등이 벌어졌는데, 이를 외조(外朝)라 불렀다. 이곳에는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 들어서 있다.
외조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황제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몸을 정히 한 다음 태화전으로 향했다. 해뜨기 전까지는 조정회의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궁궐 남쪽에서 시장이 열렸다. 그때부터는 백성들의 시간으로, 그들의 생업이 시작됐다. 천안문 광장 남쪽의 숭문구(崇文區) 지역은 왕조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베이징의 재래시장 노릇을 하고 있다. 궁궐 앞에 이처럼 시장을 배치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시구조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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