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듯한 건물을 앞세워 거침없이 비대해진 서울의 코앞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마을길을 따라 산쪽으로 오르다보면 언제나 대문 한 쪽이 활짝 열려 있는 집이 나타난다. 대문만 보면 오래됐지만 정결한 한옥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뜻밖의 건물과 분위기에 잠시 당황스럽다.
분명 기와집은 아니고, 단층 현대식 건물인데 겉모양이 범상치 않다. 흙벽에 오래돼 금세 썩어 떨어질 듯한 나무판자들로 둘러친 지붕하며, 비틀린 장미덩굴에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정원을 보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느낌이다.
이 집의 주인은 서양화가이자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장을 맡고 있는 이두식(李斗植·56) 교수.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튀지 않게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튀게 하는 것은 오히려 쉬워요. 정원도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자연 그대로 뒀습니다. 편안한 시골집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한 것이죠. 지은 지는 3년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집 분위기에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교수의 미술세계와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교수는 미술계에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국내 화가들이 기피하던 강하고 현란한 한국의 전통 오방(五方)색(적·청·황·흑·백)을 과감히 사용하면서 화폭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의 주테마는 단청이나 불화, 무속의상, 민화, 그리고 축제의 화려함이다.
1994년 작품인 ‘축제’가 그 대표작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재에도 수록된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이렇게 평했다. “색채의 열기 속에 녹아 흐르는 이미지. 서서히 녹아 흐르다 멈춘 어느 상태, 이미지의 파편들, 모든 세계가 녹아 흘러 일체가 되는 경지다.”
이교수의 미술세계는 자연에서 출발한다. “자연과 삶은 매우 밀접하다. 의식도 자연에서 나온다. 자연의 섭리를 엄숙히 받아들이고 동감하면서 순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색채와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자신의 미술세계와 삶에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식가인 이교수의 입맛도 비슷하다. 조미료를 싫어하고 자연 그대로의 맛을 즐긴다. 그가 즐기는 음식 중 하나가 쇠고기 무국이다. 서울에서 하숙하던 대학시절, 시골에서 아들을 보러 가끔 올라와 해주시던 어머니의 무국 맛을 이교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이교수의 무국 솜씨도 꽤 수준급이다.
6∼7년 전 미국 뉴욕의 유명화랑과 전속계약을 하고 작품을 전시하던 시기, 이교수는 역시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아들의 교수들을 초청해 무국으로 대접한 적이 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 아들 하린씨는 “체격이나 인상을 볼 때 상당히 무섭게 생긴 사람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미국 사람들 입맛에 무국이 맞았는지 매우 좋아하면서 놀라워했다”고 기억했다.
무국의 주요 재료는 무와 파, 마늘, 그리고 쇠고기. 쇠고기는 약간의 기름기에 구수한 맛이 있는 양지머리 고기가 적합하다. 여기에 재래식 조선간장과 참기름이 필요하다. “간장 맛이 사실상 무국의 맛을 좌우한다”는 게 이교수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