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당시 약정토론을 맡은 중국 학자(그는 중국에서 꽤 알아주는 문학평론가다)는 기본적으로 ‘한국 무협소설’에 대해 냉소적인 선입관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조심성 없이 거칠게 드러냈다(물론 그는 한국 무협소설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무협소설이 한국인에 의해 씌어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한국 무협소설이 되는 것인가, 설사 그것을 한국 무협소설이라고 부른다 해도 거기에 무슨 대단한 문화적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선입관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무협소설을 ‘국적 불명’이라고 비난할 때 그 비난의 근거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배경이나 인물에 있지 않고 서사의 성격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한국 무협소설은 중국 무협소설과 구별되는 뚜렷한 독자성을 갖추고 있다는 게 필자의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한국 무협소설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통해 한국 무협소설의 독자성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독자성이 무협소설 장르 일반이라는 지평에서 일종의 전위성을 띠며, 나아가서는 단순한 통속문학 내지 대중문학이라는 틀을 넘어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자세한 검토 없이 막연한 일반론만 되풀이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시한부 생명 12년간 128편 출간
우리가 처음 살펴볼 작가는 서효원(徐孝源)이다. 서효원은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를 말할 때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작가다. 한국인이 창작(번역이나 번안이 아니라)한 최초의 무협소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1970년대 후반에 주로 대만 작가 워룽성(臥龍生)의 이름으로 출판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은 한국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워룽성의 이름으로 출판된 ‘팔만사천검법’(1978?)이다. 이 작품을 쓴 김의민은 1979년 ‘을제상인(乙齊上人·제(齊)가 아니라 재(齋)로 쓰는 것이 적절하겠지만)’이라는 필명으로 ‘속팔만사천검법’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은 것을 계기로 한국 무협소설은 더 이상 대만 작가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제 이름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품 스타일이 여전히 워룽성의 모방에 머물렀기에 이들을 참뜻에서 한국 무협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기 스타일을 갖춘 한국 무협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의 일인 바,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서효원, 야설록(夜雪綠), 금강(金鋼), 사마달(司馬達), 검궁인(劍弓人) 등에 의해서였다.
이들 중에서 우리가 서효원에 먼저 주목하는 것은 그의 비극적 삶과 관련이 있다. 1959년생인 서효원은 성균관대 산업심리학과에 재학중이던 1980년 3월 위암 수술을 받았고,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아주 운이 좋으면 10년’이라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았다.
서효원의 무협소설 쓰기는 바로 이 시한부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됐다. 1980년 9월 첫 작품을 출간한 서효원은 1992년 12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놀랍게도 128편, 1000여권이나 되는 무협소설을 써냈다(기네스북에 올라 마땅할 세계 최고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렇듯 엄청난 다작은 서효원 무협소설의 문체적, 서사적 특징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짧은 문장의 숨가쁜 배열, 묘사는 거의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사건 전개의 속도감뿐인 문체, 기험(崎險)이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만큼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 이런 특징들 때문에 다작이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고, 거꾸로 다작이기 때문에 이런 특징들이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러한 문체적, 서사적 특징은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서효원을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한 전형으로 꼽는 것은 확실히 근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