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다른 예술이나 고도의 지적 성취와 마찬가지로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구애적응들로 가득한 마음의 부산물이다. 예술이 그러하듯 시 쓰기도 자연계에서 생물이 행위선택의 지표로 삼는 생존이익이나 번식이익과 무관한, 즉 생물학적으로는 쓸모없는 헛짓이다. 시는 생존이익에 부합하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나오는 잉여행위로서의 문화적 헛짓! 그러나, 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멘트 가죽을 뚫고 일어나 세상을 들었다 놓는 풀”(김수영), “날 잡아라, 내가 너를 당겨서 일어나리라”(천양희)는 그 풀이 바로 시다. 풀은 대지의 이마 위에 돋는 의지의 푸른 뿔이다. 영원히 죽고 다시 사는 대지의 타자다. 죽음을 뚫고 살아나오는 저 윤회의 세계 위에 펼쳐진 푸른 넋이다.
시는 “감각의 섬모를 세상에 내밀”고(우대식 ‘밤에 쓰는 시’ 천년의시작, 2003) 지각적인 반응을 한다. 시인은 자주 풀을 은유의 우주 속으로 힘껏 끌어당긴다. 시와 풀은 한 몸을 이룬다. 시인의 풀에 대한 편애는 마침내 풀 속으로 들어가 풀을 낳는다.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풀이 되어 엎드렸다/풀이 되니까/하늘은 하늘대로/바람은 바람대로/햇살은 햇살대로/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김종해 ‘풀’ 문학세계사, 2001). 그러니 시여, 이제 죽은 줄은 알았으니 풀처럼 일어나라!
눈여겨보면 여전히 좋은 시집들이 나오고 있다. 근래에 내가 읽은 좋은 시집은 이진명의 ‘단 한 사람’(열림원, 2004), 최창균의 ‘백년 자작나무 숲에서 살자’(창비, 2004), 이덕규의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 2003) 등이다.
이진명은 시도 때도 없이 난무하는 폭력과 “각자의 산업을 위해 쌩쌩거리는 것들”이 내는 소음으로 뒤범벅된, 그리하여 “환중(患中)의 헐은 내벽”을 안은 채 신음하는 시대의 중심을 투시한다. 이 난장의 시대에 연하고 조용한 것들이 깃들일 수 있는 “죽집”을 하나 냈으면 한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최창균은 “누군가에 기대어 한 생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본다. 고요의 순간을 끌어당기는 힘은 바로 “세상을 꼿꼿하게 살아”내게 만드는 시뻘건 “삶의 밑불”일 것이다. 이덕규는 생명됨의 온전한 도리를 꿈틀거리는 것, 생명의 도발성, “온몸이 저리도록 울어도 보는 일”에서 찾는다. 최승호는 우리 시대의 문명을 “고물상, 폐품들의 무덤, 고물왕(古物王)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혀도 없고 입술도 없고 목구멍도 없”는 돌의 사람인 우리는 그 문명의 중심을 횡단해가는 중인 것이다.
옛 지혜인은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 쉬며, 천지 사이에서 소요하며 한적한데 제가 천하를 위해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한사코 세상의 명리를 쫓지 않고 마음의 은둔을 따랐다.
시인은 현대의 은둔하는 지혜인이어야 한다. 이 은둔은 인적 드문 거주지를 찾는 장소의 선택이 아니라 세상의 들뜸 따위에 상관하지 않고 고요에 그윽하게 드는 것을 말한다. 인생의 고락, 화복, 성패를 달관하면 문득 인생은 고요해지며, 인생이 고요해지면 마음의 은둔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고요한 물 위에만 바깥 풍경이 일그러지지 않고 온전하게 맺힌다. 우리에겐 세상의 명리를 구하느라 들뜬 마음으로 춤추는 백 명의 시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은둔에 든 단 한 명의 시인이 필요하다. 시를 아는 건 세상의 모든 걸 아는 것! 그러므로 시의 무덤 위에 파랗게 돋아나 물결치는 시집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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