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빛으로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 전문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나 그런 추억이 있을라나. 산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때마침 제사라도 든 날, 아버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십리 길 읍내를 다녀온다. 지난 번 장날 어머니가 미처 마련하지 못한, 호롱불에 쓸 석유며 참기름도 사고 해서 강 건너 아득한 들판 길을 가로질러 왔건만 심부름을 잘못했다는 야단만 실컷 맞는다. 억울함에 못 견뎌 닭똥 같은 눈물을 찔끔거려 보지만 거들떠보는 식구 하나 없다.
부엌에서 풍기는 부침냄새의 유혹도 마다한 채 어둑한 뒷산 바위에 오르면, 내려다보이는 것은 때마침 저녁놀을 담고 흐르는 강물, 대밭 사이로 퍼져 오르는 저녁연기. 그리고 창마다 환한 꽃잎 같은 등을 켠 열차가 들판 끝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 무렵의 몹쓸 고단과 허기보다 더 모질게 치밀어 오르던 슬픔을 기억하려는가.
억울해서가 아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깨닫는 인생의 막막함. 사랑과 운명의 서글픔 때문이다. 읍에 갔던 길에 굳이 소방서 옆의 그 계집애 집 앞까지 가고 말았다. 마주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소리를 들으며 그 골목을 오르내렸던 것이다.
세월은 벼락처럼 흘러갔다. 옛 동리는 그대로 남았건만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함께 골목을 뛰어다니던 동무들마저 없다. 텅 빈 옛집을 지나 해 지는 뒷산에 오르면 큰 뱀 같은 강 하나가 온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전신의 비늘로 가을 햇살을 튕기며 들판 사이로 흘러가고 있다. 읍내 살던 여자애는 캐나다에 유학 간 아이들을 따라가 지금은 몬트리올인가 어딘가 살고 있다 했던가?
박재삼(1933~1997)의 시들은 이렇듯 허량한 생애의 본원적 비애를 환기시킨다. 서럽고 막막한 유년의 회억(回憶), 언제나 찰나에 지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한탄, 자연과의 부조화에서 더욱 커지는 일상의 고단. 그는 이 정감들을 ‘순수의 슬픔’으로 드러내는 음유시인이다.
삼천포에 가면 아직도 시인 박재삼을 만날 수 있다. 그 눈물겹도록 어여쁜 바닷가 작은 도시가 시인 박재삼을 키웠으며 그의 시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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