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도곡2동 EBS 본사. ‘두다다쿵’ ‘방귀대장 뿡뿡이’ 등 EBS가 투자한 애니메이션이 전시돼 있다.
‘뽀롱뽀롱 뽀로로’ ‘로보카 폴리’ 등 국내 애니메이션 투자 및 방영을 통해 ‘애니메이션 르네상스’를 이끌던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지난해부터 애니메이션 투자 조건으로 ‘지상파 독점방송권’뿐 아니라 모든 IPTV에 해당 애니메이션을 방영할 수 있도록 하는 ‘국내 영상 콘텐츠 배급권(이하 VOD 배급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EBS는 2013년 한 해 동안 특정 IPTV의 VOD 독점 방영을 인정하는 제작사와는 후속 시즌에 대한 투자 결정을 무기한 보류하는 한편, 모든 IPTV 내 ‘EBS관’에서 VOD를 방영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업체 4곳과만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지난 12월 EBS가 ‘최초로 공동기획제작했다’고 발표한 애니메이션 ‘두다다쿵’의 캐릭터를 활용한 완구, 책, 의류 등 ‘사업권’을 이례적으로 제작사가 아닌 라이선싱 대행사에 하청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향후 EBS가 VOD 배급권과 사업권을 확보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만 투자해 제작사는 EBS의 하청업체가 되는 것 아닌가”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애니’ 투자 양대 산맥
아이들에게 대통령급 인기를 끌어 ‘뽀통령’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서울산업통상진흥원(SBA)은 2010년 뽀로로의 브랜드 가치를 3893억 원으로 평가했다. 높은 몸값 때문인지 뽀로로의 공동 제작사 오콘과 아이코닉스는 뽀로로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법적 분쟁까지 벌였다. 재판부는 “뽀로로는 아이코닉스와 오콘이 각 27%, SK브로드밴드가 20%, EBS가 26% 지분을 보유한 공동 저작물”이라고 판결했다.
‘뽀로로’에서 보듯 EBS와 SK브로드밴드는 국내 애니메이션 투자의 두 축이다. 뽀로로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영화, 드라마 등 다른 콘텐츠에 비해 수익률이 낮아 민간 투자를 받기 쉽지 않다. 국내 지상파 중 EBS가 거의 유일하게 신규 애니메이션에 투자 및 방영을 한다. EBS는 ‘방송프로그램 등의 편성에 관한 고시’에 따라 연간 전체 방영시간 1000분의 3 이상에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을 신규로 편성해야 할 뿐 아니라 ‘교육방송’으로서 어린이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 투자 규모는 후시 녹음 등 현물 투자를 포함해 전체 제작비의 20% 남짓. EBS는 애니메이션 투자를 통해 수익을 분배받고 지상파 독점 방영권을 얻는다.
한편 SK브로드밴드 등 IPTV 사업자는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면서 VOD 독점 방영권을 확보한다. 최근 SK브로드밴드는 “로보카 폴리와 뽀로로는 ‘BTV’에서만 볼 수 있다”며 VOD 독점 방영권을 앞세워 광고했다. 물론 ‘꼬마버스 타요’와 같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고 제작사(아이코닉스)와 EBS의 공동투자만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뽀로로, 로보카 폴리, 부릉!부릉!브루미즈, 놀이터 구조대 뽀잉, 발루뽀, 미앤마이로봇 등 요즘 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애니메이션 대다수가 EBS와 SK브로드밴드의 공동 투자를 받은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EBS, SK브로드밴드의 삼각편대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 신용섭 EBS 사장은 애니메이션 담당자들에게 “향후 EBS가 투자하는 애니메이션의 국내 VOD 배급권을 확보하라”는 내용의 정책을 전달했다. 즉 EBS가 투자한 모든 애니메이션을 SK브로드밴드와 KT올레 TV, LG유플러스 TV 등 모든 IPTV 내 EBS관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
담당자들은 “제작사에서 SK브로드밴드의 투자를 받은 경우 VOD 독점 방영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이를 EBS가 막을 수 없다”며 “EBS가 VOD 배급권을 확보하는 정책을 정하면 제작사들이 향후 IPTV 사업자의 투자를 받지 못해 애니메이션 산업이 위축될 것”이라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전달했으나 EBS의 정책은 수정되지 않았다.
1년째 투자 유보
EBS의 정책을 전해들은 제작사들은 반발했고 지난해 8월 30일 신용섭 EBS 사장과 제작사 간 간담회가 열렸다. 이 간담회에서 신 사장은 “EBS 애니메이션 시청률이 작년대비 2~3% 떨어져 어려움이 많다. EBS는 지상파 방영권 외 권한이 없기 때문에 IPTV와 유튜브 등에 설치된 EBS 콘텐츠 전용관에 EBS가 투자한 작품을 공급할 수 없다”며 “앞으로 EBS가 투자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비독점 VOD 방영권’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비독점 VOD 방영권이란 모든 IPTV에 VOD를 제공할 수 있는 권리로, 4월 ‘VOD 배급권’ 자체를 갖겠다는 전략에서는 일보 후퇴한 것이지만 여전히 IPTV 사업자의 투자를 막는 정책이다.
신 사장은 “EBS에서 방영한 콘텐츠는 IPTV의 EBS관에서 봐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며 “시즌1에 투자했다고 시즌2 투자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시즌1의 시청률과 작품성에 따라 투자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제작된 애니메이션 시즌1이 특정 IPTV의 VOD 독점 방영을 인정했더라도, 시즌 2는 시즌1과 달리 IPTV의 VOD 독점 방영권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새롭게 계약을 맺겠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제작사들이 반발하자 신 사장은 “EBS가 무조건 VOD 배급권을 갖겠다는 것은 아니고 업계와 상의해서 상생 방향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