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와인 한 병에 문화의 향기를 담는다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1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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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포도주산업은 철저한 장인정신과 국가보증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 ‘와인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프랑스 포도주의 대명사 또는 레드와인의 고향으로 불리는 보르도를 방문, 세계 최상품의 와인을 만드는 비결을 알아봤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VIP담당 책임자인 마틴 꾸르티아드는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눈가와 입가에 가득한 주름으로 미뤄 족히 예순은 넘어 보이는 이 인상 좋은 금발의 여인은 활력이 넘쳤다. 샤토의 곳곳을 안내하는 동안 내내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뿐만 아니라 눈으로 손짓으로 포도주 제조과정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나뭇잎 모양의 큰 귀고리가 인상적이었다.

    무통 로쉴드는 제조과정이 점차 기계화되는 추세에 아랑곳없이 수확에서부터 발효와 숙성(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처리하고 있다. 포도를 따는 작업부터 그렇다. 요즘은 기계로 포도를 따는 포도원이 늘고 있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만 포도를 딴다. 제조과정의 첫째 관문인 발효 과정에서도 이 샤토는 요즘 점차 늘고 있는 스테인레스 탱트 대신 전통 기구인 오크통(떡깔나무나 참나무 계통) 사용을 고집하고 있다. 숙성과정에서도 마찬가지. 그밖에 포도즙 찌꺼기를 거르는 작업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한다. 이 또한 요즘엔 기계로 처리하는 샤토들이 늘고 있다.

    샤토란 본래 성(城)이나 대저택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와인과 관련해 쓰일 땐 포도원을 가리킨다. 프랑스 와인 관련법에 따르면 일정 면적 이상을 갖춘 포도원으로서 와인 생산 및 저장시설이 갖춰진 곳을 샤토라 일컫는다.

    세계 최대 와인 생산국인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는 크게 6개 지역으로 나뉜다. 보르도 보르고뉴 론 루와르 알자스 상파뉴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일찍이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해온 보르도는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지명이다.



    보르도가 프랑스 포도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최고 품질의 레드 와인(적포도주)을 다량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와인의 3분의1 가량이 바로 보르도산이다. 생산량 또한 압도적이다. 6개 지방 중 가장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화이트 와인(백포도주)의 명산지로 알려진 보르고뉴 지방 생산량의 2배 가까이 되는 수치다. 전세계로 가장 많이 수출되는 와인도, 점차 수입량이 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와인도 보르도 산이다.

    보르도 포도주와 백년전쟁

    파리 몽빠르나스역에서 고속열차인 TGV(떼제베)를 타고 3시간 가량 달리면 보르도시에 도착한다. 승용차로는 5∼6시간 걸리는 거리다. 프랑스 제6의 도시인 보르도시는 보르도 지방에 있는 40여 개 시 가운데 하나로 이 지역에서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 노릇을 하고 있다.

    보르도 지방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게 두 개의 강이다. 각각 가론강과 도르도뉴강으로 불리는 두 강은 보르도 지역 한가운데를 흐르며 토양에 영향을 끼친다. 두 강은 최고급 와인 생산지로 이름 높은 마고 마을 근처에서 하나로 합쳐져 대서양으로 흘러가는데, 두 강과 대서양을 잇는 큰 강이 지롱드강이다.

    보르도는 ‘하늘이 내린 포도주의 성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포도주는 한 해 동안 쏟아진 햇빛, 비와 바람의 양, 토양, 열매 따는 시기, 숙성기간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마법의 술’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 강을 품고 있는 이 지역의 토양과 지층구조, 기후 등은 포도 재배에 안성맞춤이다. 자갈 또는 모래가 많은 토양은 온기를 오랫동안 품고 있을 뿐 아니라 배수가 잘 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는 포도가 자라는 데 좋은 조건이다. 이런 자연환경에선 포도 외 다른 농작물이 발붙이기 힘들다. 2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포도가 집중적으로 재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152년 영국왕 헨리 2세는 보르도 지방의 왕녀 에레나와 결혼했다. 에레나는 결혼 지참금으로 보르도 땅을 가져갔다. 이것이 뒷날 백년전쟁의 불씨가 됐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포도주가 영국으로 넘어가자 프랑스인들의 불만이 고조됐던 것.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은 잔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가 승리, 보르도 포도주는 다시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보르도는 한마디로 포도주로 먹고사는 지방이다. 프랑스는 지방자치제 국가인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이 철저히 구분돼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 바로 보르도다. 보르도가 포도주산업으로 얻는 수익은 얼마나 될까. 수치보다 더 실감나는 것은, 중앙정부가 가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보르도 자치단체로부터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다.

    농협 축협이 있듯이 보르도에는 CIVB, 우리말로 ‘보르도 와인 전문협회’쯤으로 번역되는 와인협회가 있다. 보르도의 포도주 산업을 총괄 관리·감독하는 기구다. 보르도 시내 한복판 자유시민혁명탑 주변에 보이는 큰 현대식 건물이 바로 와인협회가 들어선 건물이다. 와인협회 로랑 페레즈 사무총장에 따르면 협회는 적정한 가격과 품질 관리를 위해 포도주 생산량을 통제하고, 판매 촉진을 위한 시장조사를 하는 한편 회원들을 대표해 각종 홍보활동을 펼친다.

    한 해 2억8000만병 수출

    협회에 따르면 보르도에 있는 샤토는 약 5000개. 그러나 영세한 소규모 업체까지 합하면 80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도주 산업 인구를 살펴보면 1만2000명의 생산자에 400개 중개상, 그리고 6만명의 노동자가 포도주 생산 및 판매에 종사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포도밭의 총면적은 67만ha(약 3억3048만평)에 이른다. 연간 평균 생산량은 6억5000만ℓ인데 그중 2억1000만ℓ가 수출량이다. 포도주 한 병이 보통 750㎖인 점을 감안하면 한 해 평균 약 8억6700만 병의 포도주가 생산되고 2억8000만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셈이다.

    로랑 페레즈 사무총장은 아시아 시장에 대해 “아시아 경제 위기 영향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수입량이 크게 떨어졌으나 최근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호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일본이며 홍콩 대만 한국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주요 소비국이다.

    아시아, 특히 한국 시장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얘기는 포도주 공장을 운영하며 중개업 및 판매를 겸하고 있는 종합주류회사 앙드레 깡가드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 회사는 보르도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뀌브작시에 자리잡고 있다. 기자는 이 회사가 갖고 있는 포도주 제조공장을 약 2시간에 걸쳐 둘러보았다.

    현 사장 조엘 깡까드는 할아버지 삼촌의 뒤를 이어 1980년부터 회사를 경영해왔는데 지난해 10월 2년 전부터 찾아든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외지인에게 팔았다. 일본인과 미국인이 투자에 참여, 상당량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에 따라 조엘 깡까드는 약간의 지분을 가진 채 월급 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 프랑스엔 요즘 이런 식으로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포도주 제조회사나 중개상이 적지 않다고 한다.

    소유권을 넘길 당시의 심정을 묻자 그는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회사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심정은 뭐랄까, 마치 뱃속에서 아이를 떼는 기분이었다.”

    조엘 깡까드는 그러나 “회사의 성장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 포도주 시장은 2년 전 IMF 위기로 크게 위축됐다가 최근 그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 일본 포도주 시장의 성장 속도와 비슷한 것이다.

    이 회사의 아시아 수출담당 책임자 로랑 베리세르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아시아에서 포도주 수입량이 눈에 띄게 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다. 반면 기존의 큰 고객인 일본 시장은 프랑스 내수와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로랑 베리세르는 “IMF 이후 한국 소비자들의 포도주 취향이 고급에서 저급으로 바뀌고 있다. 단 것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단 술일수록 피로감이 빨리 몰려오므로 건강에 좋지 않다”고 우려했다.

    세계 최상급 그랑 크뤼 와인

    보르도에서는 생산하는 와인의 품질에 따라 샤토의 등급이 매겨지는데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해 한 번 정해진 등급은 여간해 바뀌지 않는다. 가장 품질이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엔 그랑 크뤼(Grand Cru: 위대한 포도원)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랑 크뤼 샤토에서 만든 와인의 라벨엔 그랑 크뤼 클라세 또는 그랑 뱅 따위의 문구가 표기된다.

    보르도 지방의 와인 산지는 크게 메독, 생테밀리옹, 소테른, 그라브, 포메롤 등 5개 지역으로 나눈다. 공식적으로 샤토 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1855년 이후 이제까지 그랑 크뤼 등급을 받은 포도원은 약 160개. 그중 가장 우수한 품질의 그랑 크뤼 샤토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보르도 와인의 간판으로 알려진 메독 지역이다. 메독 지역엔 60개의 그랑 크뤼 샤토가 있다. 그랑 크뤼 샤토는 다시 5등급으로 나눈다. 그랑 크뤼 중에서도 1등급이라면 세계 최상품의 와인임에 틀림없다. 라벨에 프르미에(premier) 그랑 크뤼라는 문구가 붙는다.

    온통 포도밭으로 뒤덮인 메독 지방에서 그랑 크뤼 1등급 샤토는 네 곳뿐이다. 포이약과 마고 두 도시에 있는데, 글머리에 소개한 무통 로쉴드는 포이약에 있는 그랑 크뤼 1등급 샤토 세 곳 가운데 하나다.

    메독 지방은 대서양으로 흐르는 지롱드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길쭉한 지형을 갖고 있다. 가론강이 가로지르는 보르도 시내에서 메독의 포이약 마을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포도밭길이다.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푸르른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길과 농가를 빼놓곤 다 포도밭이다. ‘포도밭 지평선’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포도나무들의 키는 채 1m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탁한 흑청색의 포도들이 촘촘히 달려 있다.

    보르도에서 자동차로 1시간 가량 달리자 길가에 샤토 무통 로쉴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샤토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여 명의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단체로 안내원을 따라 다니며 샤토를 둘러보고 있었다. 기자는 VIP담당 책임자 마틴 꾸르티아드의 별도 안내를 받았다. 보르도 현지에서 구한 한국인 유학생이 통역을 맡았다.

    무통 로쉴드는 80ha(약 24만평)의 포도밭을 갖고 있다. 샤토 오른쪽 끝에서 차를 타고 5분만 가면 지롱드강이 나타나고 왼쪽으로 25분 가량 달리면 바다, 곧 대서양이 눈앞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수확하는 포도의 주품종은 카비네 소비뇽.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이 품종은 보르도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떫은 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풍부한데, 오래 숙성시킬수록 부드럽고 그윽한 맛을 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와인 제조는 포도를 따는 일에서 시작된다. 웬만한 샤토들은 9월말쯤 포도 수확을 끝낸다. 이맘 때면 포도는 익을 대로 익어 까맣게 변한다. 마틴 꾸르티아드에 따르면 올해는 6, 7월에 햇빛량이 적었던 탓에 수확시기가 예년에 비해 조금 늦을 것 같다. 지금쯤 익어야 하는데 아직 덜 익었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대로 무통 로쉴드는 전통적인 포도주 제조기술과 수작업의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다. 포도 수확기엔 인부가 700명 가량 필요하다. 인부들은 1주일 동안 포도밭에서 일하는데, 숙식을 제공 받으며 250프랑(약 4만원)의 일당을 받는다. 과도한 인건비로 경쟁력에서 뒤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마틴 꾸르티아드는 고개를 저었다.

    “기계로 수확하면 익은 것과 안 익은 것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손으로 일일이 확인해 따기 때문에 (양조통에 들어가는) 포도의 질이 훨씬 낫다. 우리 술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 일당 인부들 외 고정 일꾼은 75명이다. 포도밭에 60명, 양조장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15명이다. 이들의 땀방울로 무통 로쉴드가 한 해 생산하는 와인은 약 30만병. 샤토 무통 로쉴드라는 상표가 붙는 이 와인들은 세계 어디서나 최상급 대우에 최고의 값을 받는다.

    여느 샤토와 마찬가지로 무통 로쉴드도 거대한 지하창고를 갖추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자 포도 냄새와 더불어 진한 나무 향이 코를 찌른다. 발효창고다. 나무 냄새는 사람 몇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항아리 모양의 오크통에서 나는 것이다. 세어보니 모두 27개다. 압착 과정을 거친 포도즙은 이 오크통에서 4∼6주간 누워 지내며 발효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오크통은 포도즙을 담기 전 팽창과정을 거친다. 마틴 꾸르티아드에 따르면 무통 로쉴드에서는 오크통에 일정 주기로 물을 채워 나무 부피를 불린다고 한다. 통의 틈새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발효와 정제를 끝낸 포도즙은 마지막으로 숙성 단계에 들어간다. 무통 로쉴드의 경우 정제된 포도주를 2년 동안 오크통에 저장한다. 처음 1년은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창고에, 나머지 1년은 햇빛이 완전히 차단된 음습한 곳에 보관한다.

    2차 숙성이 진행되고 있는 지하 저장창고에 들어가자 나무 탄내가 코를 찌른다. 술 냄새가 진동한다. 계속 냄새를 맡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천장엔 덕지덕지 곰팡이가 쓸어 있고 벽엔 습기가 배어 있다. 오크통 크기는 발효용보다 작다. 창고의 온도와 습기는 연중 변화가 없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잠자고 있는 포도주는 1999년 산이다.

    무통 로쉴드의 철저한 장인정신은 통속의 침전물을 거르는 작업, 곧 여과작업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웬만한 샤토에서는 필터기를 이용해 찌꺼기를 거르는데, 이곳에선 통에 수도꼭지를 달아 거기서 나오는 찌꺼기를 손으로 거른다는 것. 3개월에 한 번씩 이런 작업을 하는데 숙성 기간 내내 계속한다고 한다.

    무통 로쉴드의 성공사는 와인산업이 문화산업의 모습을 갖추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무통 로쉴드의 역사는 1853년 바롱 나다니엘 드 로쉴드가 포이악의 샤토 브랜 무통을 사들인 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꾼 데서 출발한다. 전통은 깊지만 최고급 와인의 대열에 들지는 못했던 샤토 무통 로쉴드가 와인 명가로 발돋음한 것은 4대째인 바롱 필립이 경영을 맡으면서다.

    1922년 스무 살의 나이로 무통 로쉴드의 운명을 걸머쥔 바롱 필립은 혁신적인 경영기법과 공격경영으로 샤토 무통 로쉴드의 사세를 키워나갔다. 그의 독특한 판촉 전략은 늘 화제가 됐다. 1945년 그는 무통 로쉴드에서 생산하는 모든 포도주의 라벨에 당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넣기 시작했다. 1962년엔 샤토안에 와인 박물관을 만들었다. 포도주 관련 고대 유물과 희귀품이 진열된 이 박물관은 해마다 수천명의 ‘와인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의 손길

    이런 대중적 인기와 빠른 성장을 바탕으로 1970년엔 샤토 하나를 더 사들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3년. 그때까지 그랑 크뤼 2등급이었던 무통 로쉴드는 마침내 그랑 크뤼 1등급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한번 샤토 등급이 정해지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관행에 비춰 이는 퍽 드문 일이었다. 보르도 지방에서 샤토 등급제가 시행된 것은 1855년. 세계 최상품 와인으로 인정받는 데 자그마치 118년이 걸린 것이다.

    그후 무통 로쉴드의 공격적인 경영은 더욱 빛을 냈다. 1981년부터는 매해 선정된 라벨 그림을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행사를 갖기 시작했다. 이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과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아울러 무통 로쉴드라는 이름을 대중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키는 구실을 했다. 1996년엔 서울 힐튼호텔에서 이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무통 로쉴드의 이런 독특한 경영방식에 대해 와인 업계 일부에선 너무 상업성을 앞세우는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포도주 자체로 승부를 걸기보다는 포장술 또는 판촉 전략에 지나치게 기댄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부 와인 전문가는 무통 로쉴드에서 만든 와인을 그 명성만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비판으로 무통 로쉴드를 깎아내리기에는 이 샤토가 풍기는 매력이 너무 강하다. 무통 로쉴드는 특유의 ‘와인 철학’을 가진 샤토다. 바롱 필립은 ‘와인은 예술’이라는 신념을 갖고 와인의 문화상품화를 꿈꿨다. 그의 꿈은 이뤄졌다. 그가 65년 동안 일궈놓은 샤토 무통 로쉴드는 오늘날 ‘와인 문화’가 대중 속에 파고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시음장에 들어섰다. 안내인 마틴 꾸르티아드는 무통 로쉴드가 고급 와인을 만드는 비결을 묻자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을 많이, 열심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비결이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장인 정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수작업에 의한 전통적인 제조기법이다. 그러나 세계 최상급 포도주로 이름난 메독 지방에서도 오크통 대신 스테인레스 탱크를 비롯한 현대식 장비를 갖춘 샤토가 점점 늘고 있다.

    메독 지방에 있는 샤토 피숑 롱그빌은 1990년대 초반 전통적 수작업에서 기계화 방식으로 탈바꿈했다. 피숑 롱그빌은 무통 로쉴드보다 한 단계 낮은, 그랑 크뤼 2등급에 속하는 샤토다. 2등급이긴 해도 라벨에 특급 와인의 상징인 그랑 크뤼라는 문구가 붙으므로 어디 내놓아도 손색 없는 와인 명가라 할 만하다.

    석양이 지기 전 피숑 롱그빌의 전경은 무척 아름답다. 샤토 한가운데 자리잡은 주인의 저택은 중세 유럽의 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 앞에 펼쳐진 널따란 연못은 황금빛으로 찰랑거린다. 연못 오른편에 양조 공장이 있고 왼편엔 초록빛으로 물든 포도밭이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까마득히 떨어진 곳에 길다란 원통형의 물 탱크 하나가 솟아 있다. 숨막힐 듯한 적막감이다.

    샤토 피숑 롱그빌이 설립된 것은 1851년. 면적은 무통 로쉴드보다 조금 작은 68ha(약 21만평)이지만 포도주 생산량은 연 30만병으로 별 차이가 없다. 이 샤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원통형의 거대한 스테인레스 탱크들이다. 발효과정에 오크통 대신 이 탱크가 쓰인다는 점이 무통 로쉴드와 크게 다른 점이다. 탱크 안 온도는 컴퓨터로 자동조절되는데 발효를 위해 포도즙을 탱크에 담아두는 기간은 오크통을 쓰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이 샤토의 양조기술 책임자인 장 르네 마티뇽은 오크통의 장점으로 열 보존이 좋다는 점과 전통을 지킨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나 발효시 알맞은 온도를 조절하는 데는 스테인레스 탱크가 더 나으며 오크통은 청소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장 르네 마티뇽에 따르면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1차 요소는 기후 토양 등 자연조건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사람의 손이다. 스테인레스 탱크를 쓰고 기계화 시스템을 갖춘 샤토라고 예외가 아니다. 포도를 딸 때 잘 익은 포도만을 따느냐 그렇지 않으냐부터 시작해 불순물 제거, 찌꺼기 압착, 서로 다른 품종의 배합 및 비율 조정 등 제조과정 전반에 걸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정도에 따라 와인의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고 노력이다. 포도를 따는 시기는 바꿀 수 있지만 (양조) 기술자는 함부로 바꿀 수 없다. 이 직업이 존경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린 질에서 앞선다”

    장 르네 마티뇽은 훌륭한 샤토가 되기 위해선 먼저 땅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하며 양보다는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요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지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한다. 제조과정의 갖가지 규칙을 잘 지키고 품종과 토양을 잘 맞춰야 한다.”

    장 르네 마티뇽은 어릴 적부터 포도주와 친숙했다. 포도밭에서 일하던 아버지 일을 거들며 양조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양조 기술직은 예전엔 전문직으로 외부인이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으나 요즘엔 다른 전통 직업과 마찬가지로 대중화돼가는 추세다. 그런 탓인지 보수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장인정신은 간단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기술자가 되기 위해선 인내가 필요하다.”

    프랑스 포도주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데는 이러한 장인정신 외 정부 차원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앙드레 깡까드의 아시아 수출담당 책임자 로랑 베리세르는 프랑스 포도주의 경쟁력에 대해 “국가가 일정한 면적을 정해 놓고 생산을 규제하기 때문에 좋은 질이 유지되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프랑스 정부는 포도주 산업을 관리하기 위해 이른바 AOC법이라는 걸 시행하고 있다. 직역하면 ‘원산지 통제 명칭’인데, 말하자면 포도주에 붙이는 상표에 관한 규정이다. AOC법에 따르면 각 샤토는 멋대로 포도주를 생산할 수 없다. AOC법에 규정된 포도 품종, 재배 방법, 양조 방법, 최대 수확량 등 원산지별 생산조건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농림부는 포도주 생산자들이 이 규정을 지키도록 생산과 유통 전반에 걸쳐 철저한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철저한 장인정신과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부 정책의 조화는 포도주를 단순한 술이 아닌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정부의 중요한 재원인 이 문화상품은 세계 곳곳을 파고들며 프랑스인들의 장인기질을 과시하고 있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성공은 포도주 문화의 상업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보르도 와인협회 로랑 페레즈 사무총장은 가격 경쟁력과 생산력에서 프랑스산을 앞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산 포도주에 대한 대응책을 묻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우린 질적인 면에서 (캘리포니아산 포도주에) 앞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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