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올림픽이 한창이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린 뒤부터 올림픽은 전세계 인류의 최대 축제였다. 올림픽의 꽃은 역시 금메달. 조국의 명예와 개인의 영광을 위해 선수들은 투지를 불사른다. 승자에게는 영광이, 패자에게는 눈물이 따른다. 금메달을 놓고 벌이는 대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간드라마일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 분야에서 50억 인구 가운데 최고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마패’다. 이제 그 ‘황금마패’에 얽힌 100년 세월의 비화를 파헤쳐 보자.
60년 로마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 금메달리스트 케시어스 클레이는 오하이오 강에 금메달을 집어던졌다. 표면적으로는 흑인 차별에 대한 항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발에 걸리는 것이 금메달리스트’라고 올림픽 우승을 폄하는 미국 사회를 향한 반발 시위였던 셈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에 던졌던 케시어스 클레이는 프로로 전향해서 복싱 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이 된다. 이제 케시어스 클레이와 나중에 개명한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은 프로복싱사에 ‘신화’로 남게 되었다.
알리는 금메달을 일부러 강물에 버린 경우지만 본의 아니게 금메달을 잃어버린 선수들도 있다.
금메달을 잃어버린 이바노프
소련의 비아체스라프 이바노프 선수는 56년 멜버른올림픽 조정 싱글스컬에서 금메달을 땄다. 기쁨에 넘친 그는 금메달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그러나 그 소중한 금메달이 그만 조정 경기가 열렸던 웬도리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이바노프는 몇 시간 동안 물 속에 들어가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잠수부까지 동원했으나 허사였고 그 메달은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수 바닥에서 잠자고 있다. 올림픽이 세계의 도시를 돌고 돌아 호주의 시드니로 돌아왔건만, 그의 금메달은 아직까지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바노프는 60년 로마, 64년 도쿄올림픽까지 싱글스컬을 3연패해서 2개의 금메달을 더 따냈다. 물론 다음부터는 호수 위에서 금메달을 던지는 장난을 절대 하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 때도 금메달을 잃어버린 선수가 있다. 조정 쿼 드러블 스컬에서 금메달을 딴 이탈리아팀 선수들은 시상식 직후 금메달을 목에 건 채 미사리 조정경기장 물 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그런데 다비드 디자노 선수의 금메달이 물 속에 빠져버렸다.
곧바로 안전담당 스킨스쿠버 요원이 투입돼 호수 바닥을 뒤졌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금메달을 찾을 수 있었다. 금메달은 깊이 15cm의 진흙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비아체스라프가 금메달을 분실한 뒤 더욱 분발한 것과는 달리 다비드 디자노는 이후 벌어진 올림픽에서 한 개의 금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올림픽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금메달의 쾌감을 맛 본 선수는 몇해 전 심장병으로 사망한 고(故) 장은경 씨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라이트급에 출전한 장은경 선수는 결승전에서 쿠바의 헥토르 로드리게즈와 만났다. 처음에는 로드리게즈가 유효 3개를 빼앗으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지구력이 강한 장은경은 맹렬하게 반격해 유효 2개에 버금가는 점수를 땄고 로드리게즈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이제 심판의 판정만 남았다. 주심은 장은경의 승리를 선언했고, 유도장은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딴 코리아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3분이나 지났을까? 주심은 판정을 번복했다. 로드리게즈가 이겼는데 잘못 판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장은경은 3분 동안 올림픽 금메달, 그것도 건국 이후 첫 금메달리스트의 황홀감을 맛보았다.
29년 만에 돌려받은 금메달
미국의 짐 토페 선수는 장은경보다 휠씬 긴 1년간 금메달리스트의 영예를 누렸다.
짐 토페는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10종경기와 5종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짐 토페는 이후 미식축구와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짐 토페가 스톡홀름올림픽에서 2관왕이 된 지 1년 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발행되는 ‘텔리그림’이라는 잡지의 체육담당 기자가 ‘짐 토페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인 1910년에 프로야구 선수였다’고 폭로했다.
짐 토페는 프로야구 선수였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보도는 사실이지만 나는 야구가 좋아서 노스 가디나(North Cardina)팀에서 야구를 한 것이지 돈(연봉 60달러)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는 짐 토페가 돈을 벌 목적으로 야구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프로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상 어쩔 수 없이 금메달을 반환케 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명단에서도 토페의 이름을 삭제했다.
지금도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10종경기 금메달리스트는 당시 2위였던 스웨덴의 비스렌더, 5종경기 금메달리스트는 노르웨이의 페르디난드 선수로 남아 있다.
짐 토페가 금메달을 반환하자 미국 언론에서는 20여년 동안 꾸준히 명예회복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까지 나서 당시 킬러닌 IOC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토페가 죽은 지 29년 후인 1982년, IOC는 짐 토페의 아들 차도르 토페의 진정을 받아들여 올림픽 금메달을 돌려주었다.
캐나다의 벤 존슨 선수는 시간상으로 장은경과 짐 토페 선수의 중간쯤인 67시간 동안 금메달리스트의 영광을 누렸다.
1988년 9월24일 서울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남자 육상 100m 결승전이 열렸다. 캐나다의 벤 존슨은 숙적인 미국의 칼 루이스를 제치고 9초79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벤 존슨은 두 차례에 걸친 도핑테스트에서 근육강화제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는 판정을 받고 사흘(정확하게 67시간) 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금메달은 2위로 들어온 미국의 칼 루이스(9초93) 선수가 차지했다. 칼 루이스는 이 금메달을 포함해서 모두9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역시 미국의 육상 선수인 레이 어리(10개) 선수에 이어 역대 최다 금메달 2위에 올라 있다.
그 후 재기를 노리던 벤 존슨은 93년 또다시 약물복용이 적발돼 세계육상계에서 영구 제명당했다.
‘금메달 사기’의 원조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미국의 프레드 로즈 선수다.
세인트루이스올림픽 마라톤은 미국 선수 31명과 그리스, 쿠바 선수 1명씩 33명만 뛰었기 때문에 미국의 집안잔치나 마찬가지였다.
33명 가운데 가장 먼저 메인 스타디움에 뛰어들어온 선수는 미국의 프레드 로즈였다.
그런데 로즈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땀방울 하나 없이 깨끗했다.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관중석에서 내려와 월계관을 쓴 로즈와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런데 로즈가 들어온 지 15분 뒤에 2위 주자가 들어왔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지쳐 보이는 미국의 토머스 힉스 선수였다.
그런데 힉스에게 2위가 선언되자 자동차로 레이스를 따라 온 심판과 기록원이 로즈에게 달려가 ‘F’자가 들어가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실격을 선언하고 우승자를 힉스로 고쳤다.
로즈는 15km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레이스를 포기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트럭이 로즈를 태워주었던 것이다. 로즈는 차안에서 쥐가 풀리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메인스타디움 바로 앞에서 뛰어내리더니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 전모는 로즈를 태워주었던 트럭 운전사가 나타나 증언하면서 밝혀지게 된다. 로즈는 15분 동안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분을 맛본 셈이다.
그런가 하면 무려 12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사실을 깨달은 선수도 있다.
1900년 2회 파리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프랑스의 빵집 배달원 비셀 데아토 선수였다. 데아토는 파리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59분 45초의 기록을 세우며 1위로 들어왔다. 그런데 질식할 듯 더운 날씨에 코스도 좁은 골목길인데다가 대회운영마저 허술해 여러 차례 길이 막혔다. 그래서 데아토는 공식경기로 인정되지 않은 줄 알았다.
비셀 데아토는 파리올림픽이 막을 내리고 12년이 지난 1912년 우연히 올림픽 역사를 뒤지다가 자기 이름이 2회 파리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올림픽에서는 장애인이나 큰 부상을 당하고도 금메달을 딴 의지의 선수가 많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미국의 월마 루돌프 선수는 여자 육상 100m를 종전 올림픽 기록보다 0.5초나 빠른 11초에 달려 금메달을 땄다. 200m에서도 역시 24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400m 릴레이에서는 44초4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이 되었다.
월마는 1940년 태어날 때 몸무게가 겨우 2kg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4살 때는 성홍열에 걸려 폐렴을 앓았다. 한쪽 폐렴이라면 괜찮았겠지만 월마는 양쪽 폐렴이었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지만 이번에는 양쪽 다리에 마비가 왔다. 8살 때 겨우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었다. 월마는 약한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달렸다. 산이건 들판이건 무조건 달렸다. 그로부터 11년 후 월마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여자가 됐던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시각장애인으로 남자 수영 200m 개인혼영과 400m 개인혼영에서 2관왕에 오른 헝가리의 타마스 다르니 선수도 양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자였다.
헝가리 선수들의 ‘인간승리’
다르니 선수처럼 헝가리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딴 영웅이 유난히 많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남자수구에서 금메달을 딴 헝가리에는 도저히 수영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선수가 끼여 있었다. 올리버 하라가 그 주인공이다.
올리버 하라는 2살 때 부다페스트 시내를 달리는 전차에 치여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당연히 정상적인 스트로크는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유럽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1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라는 결국 수영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수구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 ‘인간승리’를 이룩했다.
역시 헝가리의 카로리 타카스 선수는 1929년부터 1938년까지 국가대표 사격선수였다. 그런데 1938년 군 작전에 참가했다가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오른손을 잃었다. 그는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왼손으로 총 쏘는 법을 다시 익혔다. 그리고 38살의 늦은 나이에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해 자동권총에서 금메달을 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딴 헝가리의 미크로스 질 바시 선수는 총상을 입은 몸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1946년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동료의 오발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때의 총상으로 신경이 마비돼 얼마 동안 걷지도 못했다. 그러나 매일 다리에 큰돌을 매달고 운동을 계속했다. 질 바시는 결국 1948년 런던올림픽 그레코로만형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다이빙은 혼자서 물 속에 뛰어드는 스포츠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쉬운 운동 같다. 그러나 최소한 3m, 최대 10m에서 묘기를 보여가며 물 속에 뛰어들 때처럼 위험한 순간이 없다.
미국의 패트 맥코믹 선수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여자 다이빙 2종목을 2연패했다. 그런데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에 의사의 신체검사 결과가 매스컴에 보도돼 화제를 모았다.
“머리 가죽이 15cm나 찢어졌다가 아물었고, 척추에 금이 가 있다. 갈비뼈 한 개가 부러졌다가 아물었고, 손가락 한마디가 골절됐다. 턱뼈가 느슨해졌고 윗니가 몇 개 쪼개졌다.”
이런 상처를 극복하고 2번의 올림픽에서 모두 4개의 금메달을 딴 맥코믹은 멜버른올림픽이 끝난 후 “이제 시합은 끝났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가정에서 훌륭한 주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라며 올림픽 무대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올림픽 역사에서 최고의 투혼을 보인 선수는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비킬라 아베베 선수다.
아베베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시종일관 맨발로 달려 2시간 15분 16초의 세계 최고기록으로 첫 번째 금메달을 땄다. 당시 그는 28살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근위병이었다. 아베베는 로마올림픽 이후 일등병에서 단번에 하사로 진급했다. 아베베는 4년 후에 열린 1964년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운동화를 신고 나왔고 계급은 상사로 진급해 있었다.
맹장수술 받고 10일만에 금메달
아베베는 9월16일 맹장수술을 받고 10일 만인 9월27일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채 한 달이 안 된 10월21일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12초라는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사상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했다. 그의 계급은 곧바로 상사에서 중위로 올라갔다.
아베베는 1969년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충돌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아베베는 하반신 감각을 잃어 마라톤을 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상체를 이용해서 활쏘기 훈련을 했다. 손과 팔의 힘을 강화하는 체조를 해가며 장애인올림픽 양궁 종목에 출전했다. 이번에도 아베베는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장애인올림픽까지 제패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다이빙에 출전했던 미국의 그랙 루가니스 선수는 부상투혼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양심적이지 못했다.
루가니스는 3m 스프링보드 다이빙 경기에서 9번째 연기를 하는 도중 스프링보드에 뒷머리를 부딪혀 다섯 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미국 팀의 팀 닥터 제임스 페퍼 씨는 급한 나머지 보조장갑도 끼지 않고 루가니스의 머리를 꿰맸다. 투혼을 발휘한 루가니스는 하이다이빙에 이어 스프링보드 다이빙까지 석권해 2관왕에 올랐다.
그런데 6년 뒤인 1994년 루가니스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이며 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에도 에이즈를 앓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그러면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는 어떻게 되고 자신의 피가 섞여 있는 풀 속으로 다이빙을 했던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올림픽은 그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다. 그런데 하나도 어려운 금메달을 부부가 혹은 연인이 한꺼번에 따낸 경우가 있다. 이른바 ‘금메달 커플’이다.
1956년 멜버른에서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로맨스가 꽃피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투원반 금메달리스트인 올가 피코토바 선수와 미국의 투헤머 금메달리스트 헤럴드 코널리 선수의 염문이 나돌았다. 결국 이들은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 모니카에서 두 아이를 낳고 잘 살았다.
올가 여사는 ‘운명의 링’이라는 책을 펴내 또 한번 화제를 뿌렸다. 책이름을 ‘운명의 링’이라고 붙인 것은 오륜기의 무늬와 결혼 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32년 LA 올림픽 때는 미국의 다이빙 선수인 마이클 갈리젠과 조지아 쿨맨이 약혼한 상태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한 달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때 부부가 교환한 메달이 모두 8개였다.
우선 남편 갈리젠은 스프링보드 다이빙 금메달, 하이다이빙 은메달, 갈리젠은 4년 전 1928년 암스텔담 대회에서도 두 종목에서 은메달을 땄었다.
부인 조지아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금메달, 하이 다이빙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조지아 역시 4년 전 암스텔담대회에서 하이 다이빙 은메달,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동메달을 차지했었다.
뭐니뭐니 해도 올림픽 금메달 부부의 대명사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출전했던 에밀 자토펙 부부다.
자토펙은 남자 육상 1만m에서 금메달을 딴 뒤 50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2관왕에 올랐다. 그런데 자토펙이 2관왕이 된 지 몇분 지나지 않아 부인 다나 자토펙이 여자 투창에서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에서 부부가 동시에 금메달을 딴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자토펙은 부인이 금메달을 따내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신문기자들에게 “지금까지 나와 아내의 성적은 2대1이다. 남편의 권위를 위해서 성적을 더욱 벌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마지막 남은 마라톤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자토펙은 라이벌인 영국의 피터스를 꺾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 사상 처음 장거리 3개 부문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고, 부인에게도 권위 있는 남편이 됐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미국의 여자 육상 스프린터 매리언 존스와 남자 투포환의 헌터 부부가 사상 최다 금메달을 노린다. 이번엔 여자의 권위가 관심을 끈다. 부인 매리언 존스가 최대 5개의 금메달을 노리는 반면, 헌터는 겨우 1개의 금메달에 도전한다.
한국도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부부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할 뻔했다. 남자 탁구의 김택수 선수와 양궁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탈락한 김조순 선수가 오는 12월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김조순이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여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은 ‘떼 논 당상’이기 때문에 김택수의 성적에 따라 ‘올림픽 금메달 부부’도 가능했었다.
그러면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딴 선수는 누구일까?
이봉주 선수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 2시간 12분 39초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땄다. 그런데 금메달을 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그 웨인 선수의 기록이 이봉주 보다 겨우 3초 앞선 2시간 12분 36초다.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금메달과 은메달의 시간 차이가 가장 적게 난 것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했던 남자 체조의 여홍철 선수도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놓쳤다. 뜀틀에 출전한 여홍철은 난이도가 높은 ‘쿠에르보 더블턴’에 성공했으나 착지에서 흔들리는 바람에 9.765에 그쳤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네모프 선수는 9.787을 땄다. 두 선수의 점수 차이는 겨우 0.031.
여홍철이 착지에서 조금만 덜 움직였어도 금메달을 딸 뻔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수영 100m는 미국의 수영 영웅 매트 비욘디와 서독의 핵 잠수함 미하엘 그로스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었다.
그러나 금메달은 엉뚱하게도 무명이던 수리남의 네스티 선수에게 돌아갔다. 네스티의 기록 53초00과, 은메달에 그친 비욘디의 53초01을 거리로 환산하면 겨우 1.886cm 차이였다.
비욘디는 나중에 “스톱워치가 설치되어 있는 벽에 손톱 끝이 닿은 것 같아 주춤하는 사이에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다”며 후회했다.
올림픽 사상 가장 ‘가슴이 떨렸던 순간’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육상 100m 결승전이었다. 금메달을 딴 미국의 게일 디버스의 기록은 10초932였고, 은메달에 그친 멀린 오티(자메이카)는 10초937이었다. 두 선수의 시간 차는 0.005초, 즉 오티의 가슴이 조금만 높았어도 메달이 바뀔 뻔했다.
가장 비쌌던 홍콩의 마지막 금메달
끝으로 이색 금메달리스트들을 알아보자.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요트 미스트랄급에서 금메달을 딴 홍콩의 리라 에산 선수는 금메달 1개로 가장 많은 부를 차지한 선수다.
리라 에산은 홍콩 역사상 올림픽에서 첫번째이자 마지막 금메달리스트다. 이듬해인 97년 7월1일 홍콩이 영국령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어 IOC에서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리라 에산은 구 홍콩 정부로부터 180만 홍콩달러(약 18억 원)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 무료로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이용권을 받았고, 케세이퍼시픽 항공을 5년간 무료로 탈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홍콩의 최고 갑부인 헨리 포드 씨가 황금 1kg과 31만 홍콩달러를 주었다.
홍콩정부는 기념우표를 만들었고, 고향인 쳉 자우심에서는 리라 에산의 동상을 세우고 방 8칸짜리 저택도 지어주었다. 이쯤 되면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목숨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1904년 세인트루이스올림픽 남자 육상은 이례적으로 200m가 아닌 201m경기로 치러졌다. 200m 육상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자꾸 스타트 반칙을 범하자 화가 난 심판이 선수를 모두 1m씩 뒤로 물러서서 출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m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아치 한 선수의 기록은 21초6으로 저조하다.
여자육상 금메달 딴 남자
미국의 에디 이건 선수는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에디 이건 선수는 12년 뒤인 1932년 레이크 플레시드 동계올림픽에 미국 4인승 봅슬레이 팀의 일원으로 변신해 금메달을 땄다. 에디 이건은 올림픽 역사상 하계, 동계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낸 유일한 선수로 남아 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사격선수 오스카 스완은 부자(父子) 최다 금메달리스트다. 1900년 파리대회부터 1924년까지 오스카 스완이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 등 7개의 메달을 땄고, 아들 알프레드가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를 획득했다. 1906년에 벌어진 중간올림픽까지 포함하면 이들 부자가 딴 메달은 무려 16개다.
올림픽에서 가장 이색적인 금메달 리스트를 꼽는다면 폴란드의 스텔라 월시 선수일 것이다.
월시는 1932년 LA올림픽 여자 육상 100m에서 사상 처음으로 12초벽을 깨고 11초9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48년 뒤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윌시는 1980년 괴한에게 살해됐는데 검시결과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밝혀진 것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최종주자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무하마드 알리였다. 세계를 맨주먹 하나로 제압했던 알리는 불과 2~3kg의 성화조차 들어올리기 어려운 중환자이면서도 천천히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였다.
1996년 8월4일 농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던 애틀랜타의 조지아돔.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하마드 알리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자 알리는 눈물을 흘렸다.
36년 전 오하이오 강물에 버렸던 금메달이 돌아온 것이다. 알리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고향인 켄터키 루이스빌에 금의환향했다. 마치 36년 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처럼.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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