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7월에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와서 그 해 8월29일 한일합병 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초대 총독으로 눌러앉아 가혹한 무단통치로 조선 8도를 얼어붙게 했던 사내정의(寺內正毅, 1852∼1919년)는 191 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 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할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었다.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 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 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 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조선문화에 대한 깊은 배려가 깃들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정책의 확실한 증거가 제출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경주 일대의 고적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도 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 두 불·보살입상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자, 총독부는 물산 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새로 지은 특설 (特設)미술관에 불·보살입상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월에 옮겨와 특설미술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좌우에 세워 놓은 후 이 해 8월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여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한 다. 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보살상은 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로써 경복궁 탈취를 기정 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년 7 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 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 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거기에 동원된 첫 희생물 이 이 두 석조 불·보살입상이었다.
이 석조 불·보살입상의 광배 뒤에는 장문(長文)의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삼국유 사(三國遺事)’ 권3 남월산(南月山) 감산사(甘山寺) 조에서도 금당 (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광배) 후기(後記)를 인용하 여 이 양 불·보살입상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상기를 잘못 읽어 몇 군데 오자를 냈을 뿐만 아 니라 전체를 옮겨 적은 것도 아니었다. 이에 일인 학자들이 정밀하 게 그 탁본을 찍어 대조하며 바로잡는 작업을 편 결과 1919년 3월에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2권을 편찬해 내면서 그 전문(全 文)을 수록하여 처음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 양대 석조 불·보살입 상을 조성한 지 1200년이 되는 기미년에 이루어진 일이고, 또 기미 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3월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참으 로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후 1920년에 발행된 ‘박물관진열품도감(博物館陳列品圖鑒)’ 제 2, 제3집에 이 조상기가 실리고, 1932년 12월에는 일본인 사학자 말 송보화(末松保和)가 ‘감산사 미륵존상 및 아미타불의 화광후기(火 光後記)’라는 논문을 써서 일반에 널리 알렸다. 뒤 이어 1935년 8 월에는 일본인 금석학자 갈성말치(葛城末治)가 ‘조선금석고(朝鮮金 石攷)’ 1책을 편찬하면서 ‘18 경주 감산사 미륵보살조상기’, ‘1 9 경주 감산사 아미타조상기’의 2개 항목으로 나눠 조상기 내용을 소개하고 금석학적인 가치를 평가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 중길공(中吉功)과 우리나라의 문명대(文明大) , 김리나(金理那) 교수 등 국내외 미술사학자들이 이에 대한 논고를 다방면으로 전개해오고 있다.
이는 이렇게 분명한 조상기를 가진 완전한 불보살상을 다른 곳에서 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그 조상기 내용이 풍부하여 신라문화의 황 금기인 성덕왕대의 사상 경향과 정치 상황 및 생활 풍습 등을 유추 (類推)할 수 있고, 서예와 문장의 수준을 확인하고, 불보살상 연구 의 양식사적 기준치를 마련할 수 있는 등 다양한 성과를 얻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불보살 입상 광배 뒤에 새겨진 記文
그렇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할 터이니 우선 먼저 지어진 (도판 1)의 광배에 새겨진 기문(記文)인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부터 전문을 옮겨 보겠다.
“개원(開元) 7년(719) 기미 2월15일에 중아찬(17관등 중 제6위) 김 지성(金志誠, 652∼720년)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제7위 관등)과 돌아가신 어머니인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를 받들기 위해 삼가 감산사(甘山寺) 한 곳 에 돌 아미타상 1구와 돌 미륵상 1구를 만든다.
대체 듣자니 지극히 큰 도(道)는 아득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 며 능인(能仁, 석가모니라는 뜻)은 열반에 들어 가고오는 것이 없다 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현법(顯法;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는 법, 즉 대·소승 경전에 의한 가르침)이 이에 응하 여 3신[三身; 비로자나불과 같이 형상 없는 이념체인 법신(法身)과 아미타불과 같이 불멸의 형상을 가지고 영구히 존재하는 보신(報身) , 석가여래와 같이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의 몸으로 잠시 나타내 보 인 응신(應身)을 말한다. 법상종에서는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 用身), 변화신(變化身)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외에 법신, 응신, 화신(化身)으로 말하는 경전도 있다]으로 근기(根機, 타고난 바탕) 에 따라 (중생을) 건져내 (고해를) 건너게 하고 천사(天師, 도교의 지존)의 10호[十號; 천존(天尊)이 가지고 있는 십종 별호, 自然, 無 極, 大道, 至眞, 太上, 道君, 高皇, 天尊, 玉帝, 階下]를 드러내 소 원이 있으면 모두 이루게 한다.
제자인 지성은 성세(聖世, 좋은 세상)에 나서 영광스런 지위를 역임 하였는데 지략(智略)이 없는데도 시속(時俗)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장 자(莊子)와 노자(老子)의 소요[逍遙; 자연 속을 거님. ‘장자(莊子) ’ 첫 편의 제목이 소요유(逍遙遊)다]를 좋아하고 뜻이 진종(眞宗, 참된 종교 즉 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着; 4세기경 간다라 폐샤왈 에서 태어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편찬한 대승논사] 의 심오한 깨달음을 희망하였다.
나이 67세(718년)에 맑은 조정에서 임금 받드는 일을 버리고 드디어 한가한 시골 밭으로 돌아와 5천언(五千言, 노자 ‘도덕경’의 글자 수가 5000자임)의 ‘도덕경’을 펼쳐 읽으니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도(玄道, 심오한 도)에 들어온 듯하고 17지(地)의 법문[法門; 무 착이 지은 ‘유가사지론’을 일컫는 말이다]을 연구하니 색(色; 현 상)과 공(空; 근본)이 무너져서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어서 다시 정명(旌命,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임금의 명령)이 초가 집으로 떨어져서 왕도의 바쁜 임무를 맡게 되자(717년, 기미) 비록 벼슬에 있어 세속에 물들고 있으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버릴 수 없어 지성의 재산을 모두 기울여 감산(甘山)의 가람(伽藍) 을 건립하였다.
엎드려 원컨대 이 작은 정성으로 위로는 국주대왕(國主大王, 나라의 주인인 대왕 즉 성덕왕)이 1000년의 많은 수명을 누리고 만복(萬福) 의 큰 기쁨을 늘리는 밑천이 되며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 이찬공이 온전치 못해 시끄럽고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 으로 태어나지 않는 묘과(妙果, 신묘한 과보니 열반을 뜻함)를 얻는 밑천이 되게 하소서.
아우인 양성(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현도(玄度) 사(師) 누 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 리(阿好里) 겸해서 서형(庶兄)인 급한(及漢) 일길찬 총경(聰敬) 대 사(大舍, 제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 및 가없는 법계(法界)의 일체 중생이 함께 6진[六塵; 눈, 귀, 코, 혀, 몸과 머 리 등 6종의 인식 기관으로 느끼는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이치 등 여섯 가지 대상물]에서 벗어나 모두 10호[十號; 원래 불타가 열 가지 별호를 가지고 있으니 如來, 應供, 正遍知, 明行足, 善逝, 世 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世尊이 그것이다. 이를 본떠 도 교 천존사에게도 10호를 붙인 것이다]에 이르게 하소서(불타의 경지 에 이르게 하라는 의미).
비록 성산(城山, 성을 쌓은 산)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원은 끝 이 없을 것이고 억겁의 돌이 사라진다 해도 존용(尊容, 존귀한 얼 굴)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구해서 성과 없는 것이 없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성취하리니 만약 이를 따라서 마음으로 원하는 이가 있 다면 모두 함께 그 선인(善因, 착한 인연)을 짓도록 합시다. 돌아가 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가에 이를 뿌렸다.”
김지성과 김개원의 ‘특별한‘ 관계
다음 (도판 2) 광배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도 그 내용이 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조성 발원자가 김지성이 아니라 김지 전(金志全, 652∼720년)으로 되어 있어 잠시 혼란스럽게 하지만 내 용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친족관계에서 김지성, 김지전 두 인물이 일치하므로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두 인물의 전처와 후처 이름이 서로 일치하니 두 인물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지성이란 이름을 미륵보살입상의 광배를 새기고 난 직후 에 김지전으로 바꿔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왕명에 의한 개명인데, 김지성을 김지전 으로 왜 바꿔야 했는지는 차차 밝혀보기로 하고 먼저 조상기 끝부분 에 새겨진 내용부터 옮겨 놓아야 하겠다. 이 부분은 의 조상기에는 없고 의 조상 기에만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개원 7년(719) 기미 2월15일에 내마 총(聰)이 짓고 봉교[奉敎; 교 서(敎書)를 받듦, 즉 왕명을 받음] 사문(沙門, 승려) 석경융(釋京 融)과 대사(大舍, 제12관등) 김취원(金驟源)이 교서를 받들어 쓰다.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 해변에 뿌렸다. 후대에 추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 선조(善助, 도움)함이 있었다. 김지전 중아찬(重阿, 제6관등)은 삼 가 살아 생전에 이 선업(善業)을 지었다. 나이 69세인 경신년(720) 4월22일 돌아가서 이를 쓰게 되었다.”
이로 보면 김지성은 67세 나던 해인 성덕왕 17년(718) 무오년에 벼 슬을 버리고 감산장(甘山莊)으로 와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 년(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가면서 감산장을 절로 만들고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불사 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 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 조성했던 아미타불입상 조상기 말미에 그의 공적과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 첨가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 김지성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상기 내용과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공식기록들을 연계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조상기를 제외하고 김지성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책부원귀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外臣部) 15 조공(朝貢) 3에 나오는 다음 기사뿐이다.
“신룡(神龍) 원년(705) 3월에 신라왕 김지성(金志誠)이 사신을 보 내와 조공하다. 9월에 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 지방 특산물)을 바치다.”
당 중종 신룡 원년이면 신라 성덕왕 4년이다. 그러니 신라왕은 김지 성이 아니라 김륭기(金隆基, 690∼762년)였다. 성덕왕 11년(712) 3 월에 당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 685∼762년)가 등극할 준비를 끝내고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요구하여 성덕왕이 김흥광(金興光)으로 개명한 사실까지 있으니, 당 조정에서 성덕왕의 이름을 몰라서 김지성으로 기록해 놓았을 리 없 다.
따라서 일본인 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신 라왕이 김지성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옮겨 쓰는 과정 에 글자가 빠져 신라왕 김지성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책부원귀’는 10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에 왕흠약(王若)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지은 책이니, 이렇게 방대한 편찬 사업을 하다보면 이런 실수는 얼 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덕왕 4년 3월에 김지성이 견당사(遣唐使)의 정사(正使) 가 되어 당나라에 갔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8 성덕왕 본기 성덕왕 4년조에는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 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 9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는 기록이 있으므로 ‘책부원귀’의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준 다. 다만 사신의 이름이 빠져 있을 뿐이니 김지성이 3월에 정사로 갔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 조상기에서 김지성은 자신의 부모형제는 돌아갔거나 살아 있거나 간에 모두 거명하면서 그들의 복을 비는데, 부모 형제 부인 이외에는 오직 국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의 복 을 빌고 있을 뿐이다. 첫머리에 국왕의 복을 비는 것은 왕조 사회에 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다음에 이찬 김개원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 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김개원이란 인물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년)의 막내왕자 로 효조왕(孝照王, 687∼702년) 4년(695)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밖에 안 된 고아였던 그 아우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는 이로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었다.
전 호에서 살펴본 대로 김개원은 그 누님들인 김흠운(金運, 631∼65 5년)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 ?)와 김유신(金庾信, 595∼67 3년)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년∼712년 이후)과 함께 각각 3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었다. 3 가문 결속의 구심점은 태종무열왕의 적장손 혈통이었다. 이런 원칙 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13세밖에 안 된 고아인 성덕왕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김개원은 성덕왕의 종조부이자 상대등으로 거의 섭정 지위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개원은 세 집안의 결속을 위해, 이미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조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으므로 이제는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년(70 4)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다. 그리고 나서 다음 해인 성덕왕 4년(705) 3월에 김지성이 사신으로 갔으니 아마 왕비 책봉을 청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미타산(彌陀山)이 ‘무구정광대다 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번역했으므로 김지성이 이를 구해 돌아와서 김개원과 성덕왕에게 보여 다음 해인 신룡 2년(706), 즉 성덕왕 5년 5월30일에 (15회 도판 6)을 보수하게 하 였던 듯하다.
부모인 신문왕과 신목태후 및 형왕인 효조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 을 보수한다 했지만 국왕 부부의 복리 증진과 수명 장구 및 왕자 생 산이 그 최종 목표였다. 이런 일을 주관한 것은 사실 16세밖에 안되 는 어린 소년 성덕왕이 아니라 환갑 나이에 접어든 상대등 김개원이 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무 총책은 성덕왕의 외숙부였으리라 추정되 는 김순원(金順元)이 맡았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밝혀 놓았다.
이때 김지성(652∼720년)은 55세에 접어들어 노성한 시기였으니 아 마 현재 총무처에 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의 차관 자리인 전대등 (典大等)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사실 김개원은 성덕왕 5년(706) 1 월에 상대등 자리를 김인품(金仁品)에게 넘기는데 이미 성덕왕이 17 세가 되어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을 할 수 있고 왕비 책봉이 이루어져 왕권이 반석 위에 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해에 성덕왕은 원자(元子)인 효상(孝)태자 중경(重慶, 706∼717 년)을 얻고 11년(712) 8월에는 김유신 처인 대고모 지소부인을 왕비 의 칭호에 해당하는 부인(夫人)에 봉하며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간 다. 성덕왕이 이렇게 처가인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가자 성덕왕의 외가인 요석공주 집안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김순원이 김개원을 움직 여 김원태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게 하는 듯하니 이것이 성덕왕 15년(716) 3월의 일이다.
이 일이 벌어질 때 집사부의 중시(中侍, 장관)를 맡고 있던 사람은 이찬 김효정(金孝貞)이었는데, 그는 김순원계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 사실상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전대등은 김지성이었다. 그러니 김지성은 자신이 책봉사로 당나라에 가서 책봉을 받아냈던 왕비를 자신의 손으로 출궁시키는 악역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실상 섭정의 지위에 있던 김개원의 허락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성덕왕은 이미 27세의 장년이 되었는데도 종조부 김개원과 외숙부 김순원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성정왕후를 궁 밖으로 내보내면서 비단 500 필, 밭 200 결, 벼 1만 석, 대저택 한 채를 하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6년(717) 6월에는 12세밖에 안 된 태자 중경 (重慶)을 시해하는 듯하다.
이런 대사건에 성덕왕은 격노하였을 것이고 그 책임을 물어 집사부 수뇌들을 파면했을 터이니 성덕왕 17년(718) 정월에 중시 김효정(金 孝貞)이 사퇴했다는 ‘삼국사기’ 권8 성덕왕 본기 17년 정월의 기 사가 이를 말해준다. 이때 전대등 김지성도 함께 문책, 파면당하는 듯하니 “시속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 다”는 내용이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 은 성정왕후의 친정 집안이 성덕왕의 총애를 믿고 지나치게 발호하 여 여러 가지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이런 표현을 했을 것 같다.
어떻든 이래서 김지성은 67세에 벼슬을 내놓고 그의 별장인 감산장 에 내려와 ‘노자’와 ‘장자’ ‘유가사지론’을 읽으며 유유자적 (悠悠自適)하려 한다. 이때 이미 김지성은 권세의 허망함과 인생무 상을 절감하고 장차 이 감산장으로 절을 삼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를 진행했던 듯한데, 이 일을 미처 마무리짓기 전인 성덕왕 18년(719) 에 왕명으로 다시 전대등으로 입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감산장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감산사로 하고 이 미 조성이 끝나가던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각기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에 봉안하면서 개원 7년(719) 기미, 즉 성 덕왕 18년 2월15일 석가여래 열반재일을 기해 봉불식(奉佛式)을 겸 한 개산재(開山齋; 절을 창건하고 처음 올리는 재)를 크게 베풀었던 듯하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왕은 당대 최고학자인 설총(薛聰)을 시켜 조상 기(造像記)를 짓게 하고 승려인 석경융(釋京融)과 대사인 김취원에 게 각각 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와 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를 써 새기 게 하였다. 김지성이 이렇게 자신의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는 것을 본 성덕왕은 어느 자리에서 김지성의 이름을 김지전(金志全)으로 하 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던 것 같다.
이제까지는 뜻이 정성스러웠는데 이제부터는 뜻이 온전하게 되었다 고 칭찬한 말로부터 비롯되었을 듯하다. 그래서 아직 각자(刻字, 글 자를 새김)에 들어가지 않았던 아미타불조상기에서는 김지전으로 이 름자를 바꿔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름자의 뜻대로 이렇게 자신 의 일생을 온전하게 마무리짓고 나서 김지전은 바로 다음 해인 성덕 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돌아가게 되었고 이 사실은 아미타불 입상조상기 말미에 추가로 새겨지게 되었다.
관능적 비만성 드러낸 초당 불교조각 양식
서진(西晉)의 멸망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뉜 다음부터 수(隋)나라 가 진(陳)을 멸망시켜(589년) 남북조를 통일하기까지 273년의 세월 은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려 한 시대의 주도이념으로 군림하면서 그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워 내던 시기였다. 불교의 모든 경전을 한 문으로 번역하고 이를 토대로 불교를 중국화시켜 나아가게 되니 불 상 양식도 중국화하여 석조(石趙) (제3회 도판 8)에서는 용모가 중국화하고, 북위(北魏) 헌문 제(獻文帝) 황흥(皇興) 4년(470) 경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제5회 도판 10)에서는 의복까 지 중국 황제의 곤룡포 형식으로 바뀌어 중국화가 완성된다.
이후 불교가 전 중국대륙을 휩쓸면서 한량없는 불보살상을 만들게 되는데, 불교가 황제권의 보호와 견제 속에서 건실하게 발전하던 5 세기 후반을 지나면 극성기의 난만한 발전을 거치면서 맹목적인 계 승과 무분별한 확산에 따른 문화말기적 타락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불보살상이라는 조형예술 쪽에서만 드러나는 일이 아니었다. 불교 사상과 교단에 먼저 나타난 현상이었다. 중국식 종파 불교의 출현과 교단의 분열 현상이 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주(北周) 무제(武帝)는 건덕(建德) 3년(574) 5월17일 불교 와 도교를 함께 폐지하는데, 이때 경전과 불상을 모두 불태우고 깨 뜨렸으며 도사와 승려 200만 명을 환속시켰다 한다. 그리고 건덕 6 년(577) 봄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6월에 북제 지역에 폐 불령을 내리고 역시 승니(僧尼, 비구승과 비구니) 300만 명을 환속 시키고 경전과 불상을 불지르고 파괴했다고 한다. 말폐 현상이 극에 다다랐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제는 이런 악업 으로 다음 해(578년) 6월에 악창(惡瘡, 피부암)에 걸려 모진 고생을 하다 죽었다 한다. 어떻든 환속시킨 승려가 북중국에서 줄잡아 400 만 명이었다 하니, 그 타락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 결과 당제국이 천하통일을 계승하여 새로운 기틀을 잡아가게 되 자 불교교단에서도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그 지위 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현장법사(玄, 602∼ 664년)는 당태종 정관(貞觀) 3년(629)에 서역(西域)으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다. 이때 나이 28세였는데 17년 동안 인도대륙 내의 130 여 국을 여행하며 대소승 경(經), 율(律), 논(論) 3장(三藏) 520질 657부를 구해 가지고 정관 19년(645) 장안으로 돌아온다. 이때 불상 8구(軀)와 불사리 150알도 함께 모셔왔다 한다.
그런데 이때 인도 사정은 더욱 심각하여 다만 난해한 논소(論疏)가 학승(學僧)들의 연구과제로 제시될 뿐 쉽고 친근한 경전으로 일반 민중을 건전하게 이끄는 교단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 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주술적 민간신앙과 결합된 밀교에 기울게 되니 이는 힌두교의 강한 영향 탓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불상도 힌두신상의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조각 양식을 닮아 퇴폐의 극치를 보이게 되었는데(도판 3) 현장법사는 이런 불상을 8 구나 모시고 왔던 모양이다. 현장법사가 새로 구해온 삼장의 내용도 불교의 근간을 전해주는 중심 경전보다는 지엽 말단을 다투는 논장 (論藏) 중심이었다.
그래서 현장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것도 김지성이 읽었다는 ‘유 가사지론’ 100권 같은 논장이 위주가 되었으니, 그가 번역해낸 75 부 1335권을 세상에서는 신역(新譯)경전이라 하였다. 구마라습(鳩摩 羅什, 344∼413년) 등이 남북조 불교 극성기에 번역한 경전과 구별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당연히 구마라습 등이 번역한 경전은 구 역(舊譯)이라 하였다.
그런데 구역은 불교의 근간을 전하기 위해 그 중심 경전들을 서역 출신 승려들이 한문을 배워 번역한 것이므로 표현이 정확하고 내용 이 간결하다. 그에 반해 신역은 쭉정이를 주워온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에다가 현장이 서역어를 배워 번역한 것이어서 표현이 부정확하 고 내용이 지루하고 산만하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이후 극도의 논리적 혼란에 빠져들어 결국 불립 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종(禪宗)의 출현을 재촉하게 된다. 이 런 상황이었으므로 불상 양식에도 현장이 봉안해 온 8구의 불상 양 식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그 8구의 불상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 당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관능적 퇴폐성으로 미루어 보면 이런 요소들이 현장이 모셔 온 8구의 불상이 가졌던 양식적 특성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조 시대 말기부터 둔중(鈍重)과 비만(肥滿)이라 는 문화 말기적 퇴영현상이 나타나서 초창기의 경쾌(輕快)하고 수려 (秀麗)하던 조각기법이 소멸해 가고 있었는데, 이런 퇴폐적인 관능 성이 영향을 끼치자 관능적 비만성이 이 시대 불교 조각양식에 주류 를 이루게 되었다.
고혹미 보여주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도 근본적으로 이런 초당(初唐, 618∼ 712년) 양식에 영향받은 보살 입상이다. 한 눈으로 보아 관능성과 비만성이 모두 나타나 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살집에서 육감적인 관능미를 느낄 수 있는데, 가슴을 가로지르는 천의(天衣)도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비사실적인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자못 고혹(蠱惑)적이다.
두 팔뚝을 휘감은 천의도 그렇고,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도 퇴폐성이 농후하며, 두 다리를 따라 층급 을 이루며 반타원 형태로 중첩되어 내려간 옷주름도 관능을 자극한 다. 사타구니를 타고 내린 치마끈이 톱니바퀴 모양으로 허벅지 안쪽 을 따라 내려온다든지 천의 자락이 양쪽 바깥 허벅지를 따라 내려오 며 톱니 모양 굴곡을 보이는 것도 매우 자극적인 요소다.
구슬꿰미로 이루어진 두 벌의 목걸이가 화려하게 목둘레와 가슴을 장식한 것이나 손목과 위팔뚝의 관절 부근을 탄탄하게 휘감고 있는 팔찌들에서도 짜릿한 관능미를 느낄 수 있고, 왼쪽 가슴에서 나와 늘어져 있다가 오른쪽 무릎 근처를 휘돌아 허벅지를 타고 오른쪽 엉 덩이 뒤로 사라진 긴 구슬걸이도 매혹적이다.
오른손을 늘어뜨려 천의 자락을 살짝 쥐고 있으며 왼손은 젖가슴 근 처까지 들어올려 손짓해 부르는 형상을 짓고 있다. 정녕 뇌쇄(惱殺, 여자가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애타게 하여 괴롭힘)성 짙은 표현기법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귀는 귓밥이 길게 늘어지고 살집 좋은 얼 굴에는 만면에 엷은 미소가 은은히 퍼져 있다. 그러니 눈은 가늘게 뜨고 눈썹은 활짝 펴져서 눈두덩이 넓어져 있다. 눈웃음을 유도해내 는 표현 기법이다.
꽃장식이 화려한 보관 위로는 크고 높은 상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상투 정면에는 화불(化佛) 좌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미륵보살상이라는 조상기가 없었으면 틀림없이 관세음보살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8회에서 언급하고 나왔듯이 ‘미륵상생경’에서 상생한 미륵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있다고 하였고, 이 경설의 내용대로 북 위시대 운강석굴에는 많은 교각좌(交脚坐)의 상생미륵보살 보관에 화불을 표현해 놓고 있다(제 5회 도판 8). 뿐만 아니라 운강 17동 남벽 2층 동측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는 (도판 4)도 있어 이 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과 짝을 이루고 있는 을 비교해 보면 자세도 같고 좌우 손의 위치도 각 각 바깥쪽을 들고 있어서 두 불·보살입상이 본래는 한 전각 안에 동서로 짝을 이루면서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은 오른손을 젖가슴 근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올려 설법인 비슷한 수인(手印, 손짓)을 지어 좌우 대칭 적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 뒤로 흘러내린 곱슬머리 형태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타고 뒤로 넘 어가 있다. 광배는 보통 주형광배(舟形光背, 배 모양의 광배)라고 부르는 연꽃잎 모양(혹은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형태인데 눈 높이 근처에서 약간 굴곡을 보여 2단 처 리를 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굵은 돋을무늬 테로 3겹을 돌려 이를 상 징했는데, 두광은 동심원이고 신광은 연꽃잎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 하다. 두광 신광 할 것 없이 가운데 테에만 각각 셋 씩 비운문(飛雲 文, 나르는 구름무늬)을 휘감아 놓았다. 테 밖의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를 어지럽게 장식하여 불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하 였다.
대좌는 8각으로 하대에는 각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대 에는 연화가 새겨져 있다.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위에 씨방을 두고 그 위에 보살상이 맨발로 서 있는데 씨방 둘레에도 연꽃잎이 둘려 있다. 연꽃잎 위에는 활짝 핀 모란 꽃 같은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 있다.
은 우리나라에 처음 나타난 불상 양식이 다. 옷주름이 두 다리를 따라 갈라져서 각기 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 나가는 형식의 불상은 아직까지 만들어 진 예가 없기 때문이 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서진(西秦) 건홍(建弘) 5년(424)에 병령사(炳靈 寺) 석굴을 만들면서 169동 제7감실 주불로 이런 형식의 입불상들을 조성해 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화평 (和平) 원년(460)부터 조영(造營)을 시작한 대동(大同) 운강(雲岡) 석굴에서는 가장 거대한 석불입상인 (제 5회 도판 7)에서부터 이런 옷주름 형식을 취하기 시작하여 18동의 좌우협시불입상(도판 5)과 2 0동 본존 좌우협시불입상에서 모두 이와 같은 형식을 계승하여 불의 (佛衣) 표현의 중국적 양식으로 기틀을 잡아간다.
특히 18동 좌우협시불입상이나 19동 좌우협시불입상은 18동 본존노 사나화불인중상의 편단우견(偏袒右肩)과 다르게 통견(通肩) 형식으 로 불의를 입고 있어 (제4회 도판 8) 양식을 그대로 잇고 있는데, 이런 양식은 제19동 남벽 서측 상부의 (도판 6)으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이런 양식은 작은 금동불입상으로까지 확산되니 북위 연흥(延興) 5년(475)에 조성했다 는 명문이 새겨진 (도판 7)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의 표현 양식은 북위 문성제의 초상조각으로 만들어 진 (제 5회 도판 10)이 출현하 여 중국 황제의 곤룡포와 같은 형식의 중국식 불의가 나타나면서 서 서히 밀려나기 시작하고 정면 앞자락에서 단일의 큰 포물선 호가 발 목까지 중첩되는 형식으로 단순해진다.
우리도 이를 선호하여 (제 8회 도판 8)이나 (제 8회 도판 14)에서부터 (제 15회 도판 14)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양식을 보이 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에서 이와 같이 옷주름이 두 다리를 타고 두 가닥으로 갈라져 내리는 표현을 하였으니 이를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새로운 불상 양식의 출현은 현장의 신역경전을 따라 들어온 초 당 불상 양식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이 불상 양식의 선구를 중국에 남아 있는 초당시대 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서안(西安) 비림(碑 林)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판 8)이 그것 이다.
서안 불상과 비교
이 불입상은 (도판 3) 계열의 굽타 말기 불상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니 현장이 인도에서 모시 고 온 8구의 불상 중에 이런 불상의 범본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불입상도 본래는 뒤에 광배가 붙어 있었던 흔적이 머리 뒷부분에 있 다 하니 이나 처럼 거신광을 짊어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이 은 서안 교외에서 출토된 것으로 7세기 전 반 초당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온 정관 19년(645) 이후 제작일 터이므로 7세기 중반 내지 후반에 걸치는 시기에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 비교해 보면 우선 크기가 비슷하다. 감산사상이 총높이 174cm이고, 서안상은 현재 높이 169cm라서 거의 사람 키와 같은 등신대(等身大, 실제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깨가 두툼하게 벌어지고 살집이 넉넉한 것이 같다. 더욱 같은 것은 통견으로 입은 불의의 옷주름이 가슴에서 배까지 타원형 호를 중첩시키며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서안상은 일어난 옷주름이 반드시 두 줄로 겹쳐 있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한 줄씩 일어나 있고, 서안상은 옷주름 숫자가 적고 길게 늘어져 있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옷주름 숫자가 많고 팽팽하여 더욱 육감적이다.
감산사상에서 불두덩 근처에 따로 잔주름 몇 개를 더 보태 배로 흘 러내린 옷주름을 마감하였는데 이는 충동적인 궁금증을 자극한 것이 다. 그 곁의 두 허벅지 위에 날개 깃을 양쪽으로 한껏 펼친 듯 세로 곡선을 중첩시켜 옷주름을 나타낸 것은 팽만감을 있는 대로 고조시 키려는 기법이다. 이처럼 차원 높은 관능미의 표출은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에 비하면 서안상의 무의미한 옷주름 표현이 얼마나 싱 거운지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서안상의 두 손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본적인 손 자세 는 서로 비슷한 듯하다. 다만 감산사상이 왼손을 더 내려 옷자락을 잡았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는 자세로 겨드랑이 근처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펼치고 식지와 무명지를 꼬부려 자연스럽게 설법인을 지었다. 그런데 팔꿈치를 밖으로 더 빼내 상체가 더욱 장 대해 보이는데 왼쪽 어깨를 이에 상응할 만큼 넉넉하게 표현하여 서 안상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느낌이 든다.
얼굴과 목의 살집은 서안상이 더 좋은데 어깨가 빈약하니 허약한 비 만체질인 듯 보이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얼굴이 모지고 단단하며 목 도 짧고 굳세니 건강미 넘치는 씩씩한 기상이 전신에서 배어난다. 얼굴 표정도 서안상은 맺힌 데 없이 너그럽기만 한 태평한 모습인데 감산사상은 총명이 넘치는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육계도 서안상은 머리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밋밋하게 솟아 있는데 감산사상은 크지 만 머리와 분명하게 구별될 만큼 뚜렷하다.
서안상은 연화대좌의 씨방 아래가 없어져서 8각대좌의 각면에 안상 (眼象)을 장식하고 그위에 엎어놓은 연꽃잎을 장식한 연화대좌를 가 지고 있는 감산사상과 비교할 수 없지만, 본래는 서안상도 이런 연 화대좌를 갖추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아 있는 씨방을 서로 비교 하면 씨방 둘레에 연꽃잎을 두른 것은 서로 같은데, 서안상은 겹잎 이고 감산사상은 홑잎이다. 감산사상이 훨씬 더 격조 높아 보인다.
재질이 보여주는 질감의 차이도 이 두 상의 느낌을 크게 다르게 하 는데 감산사상은 돌 중에서 가장 굳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서안 상은 훨씬 부드러운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감산사상의 광배는 거신광으로 주형광배인데, 의 광배 모양처럼 굴곡도 없어 연꽃잎 한 잎을 떼어 세워 놓은 듯도 하고, 촛불꽃이 길게 타오르는 모양 같기도 하며, 거룻배 한 척을 세워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주형(舟形)광배니 촉염(燭 炎)광배니 연판(蓮瓣)광배니 하는 이름을 얻게 된 듯하다.
짝을 이루고 있는 의 광배와 기본적으로 같은 형태인데, 다만 신광의 이중테 안에 꽃무늬와 구름무늬가 더 첨가되고 두광의 동심원 중 바깥테 부분에 비운문(飛雲文)이 있는 것이 다르다. 이 두광의 구름무늬는 미륵보살 두광에서 가운데 테선 을 감고 있던 것이 밖으로 풀려나온 것이다.
에서 보인 이런 새로운 불상 양식은 곧 이후 불상 조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곧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한 유파로 정착된다. (도판 9)과 같은 것이 이 양식 계열의 대표적인 유례다.
감산사는 그 터 대부분이 논으로 변해 1915년 과 을 옮겨올 때도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 그대로 수습해 왔다 한다. 그런데 그 터에 3층석탑 하나 가 무너져 있었다. 이를 1965년 신라오악조사단이 복원해 놓았다. (도판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