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수월관음의 미소

  • 박정욱·성신여대 교육학대학원 교수

    입력2006-08-11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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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브르의 권위에 눌리고 모나리자의 위명에 눌린 한국인들은 그림 앞에서 압도돼 버린다. 그러나 모나리자의 성스럽고 신비한 미소는 고려 불화에서도 발견된다. 수월관음의 자태는 암굴의 성처녀보다도 훨씬 더 신성하고 생기에 넘쳐 있다. 이제는 서양 그림을 우리식으로 감상하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안내서의 설명을 읽어대기 바쁘다. 마치 서양화에 관한 서적은 읽으면서 진작 그림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설명문은 나중에 찾아봐도 될 일이다. 우선 그림을 보고 자기 감정과 그림 속의 감정, 자기 삶의 의미와 그림 속의 삶의 의미, 나란 인간과 그림 속 인간이 서로 만나게끔 시간을 보내야 한다. 화가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야 한다.

    서양 그림 우리 식으로 보기

    우리는 한국인이다. 통상 우리는 과장된 자부심으로 한국 문화의 문화적 결핍을 보상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한국 명화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에 못지 않다. 한국 명화들도 미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가면 서양화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고 혁신적인 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보며 거꾸로 전통적인 한국화들을 연상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국화들도 이 곳에 걸린 그림들 못지 않은 명작들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식으로, 우리의 진실한 모습으로 그림을 볼 때 서양화니 한국화니 하는 장르는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서양화든 한국화든 모두 하나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동해 낙산사에 세워진 거대한 관음상을 보며 성모 마리아나 중세의 수호 여신을 떠올리는 서양 관광객이 있다면, 루브르 박물관의 명작 앞에서 고려 불화를 연상하는 한국 관광객이 있어야 한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는 미묘한 그림이다. 는 여러 면에서 고려 불화 를 떠올리게 한다. 두 그림 모두 고전미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비슷한 주제를 그리고 있다. 고려 불화에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한번 읽어보자.



    모나리자의 미소

    고려 불화는 아시아 불화들 가운데에서도 예술적으로 가장 세련된 선(線)의 묘사를 보여준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회화적 표현의 경지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거장들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들을 보는 듯하다.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와 고려 불화의 관음도는 미소의 그윽함에 있어 보기 드문 수작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수집된 명화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하는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관객이 너무 많아 이 그림만 별도의 유리로 가려 놓았을 정도다. 나는 때때로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해 이 그림 앞에서 한 시간씩 머물며 그림의 세계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했다.

    모나리자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으므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인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게 살짝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보는 듯했다.

    모나리자를 자세히 보면 미소를 그린 분명한 흔적이 없다. 그런데도 얼굴 전체에 감도는 그 미소를 누구나 알아 볼 수가 있다. 미소는 입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길 속에도 있는데 눈 속의 미소야말로 가장 그리기 힘든 것이다. 그 눈길에는 마음을 꿰뚫는 온유한 힘이 있다. 그보다 더 부드러운 표정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내면 속에 영원히 숨쉬고 있는 본성적인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그 그림을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근심과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삶에 대한 찬미가 저절로 생겨났다. 초인(超人)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천재를 통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고려 불화를 보아도 같은 느낌이 든다.

    수월관음도와 암굴의 성처녀

    종교화는 순수한 열정으로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초인적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좀처럼 걸작을 그리기 힘들다. 고려 불화와 르네상스 회화의 유사성은 무엇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종교적 태도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 불화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신의 얼굴과 신비한 손 동작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신의 얼굴과 손 동작을 연상시킨다. 고려 불화 인물 전체에 흐르는 천의 조화로운 주름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천의 조화로운 감김을 떠올린다. 한치의 결함도 없는 고려 불화의 세필묘사(細筆描寫)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적 데생 실력을 환기시킨다.

    각종 관음도(觀音圖)에서 보이는 비스듬히 기울인 관음의 얼굴은 레오나르도의 암굴의 성처녀나 라파엘 성모의 기울인 얼굴을 연상시킨다. 특히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동해의 암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장면을 그린 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와 비교해볼 만한 수작이다. 관음도나 여래도(如來圖)의 몸 자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여인들처럼 고고한 기품과 함께 신(神)을 접할 때 느끼는 차가운 전율과 두려움도 전해준다.

    먼저 를 구성하는 아름다움을 자세히 살펴보고 의 아름다움과 비교해 보자. 는 근본적으로 암굴 속에서 신의 현현(顯現)을 그렸다는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와 상통한다. 현실의 고통을 초월한 듯한 관음의 아름다운 미소는 마음의 평화를 전해주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통하는 점이기도 하다. 여러 수월관음도 중에서 특히 일본의 다이도쿠지(大德寺)에 소장된 고려 불화 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와 유사점이 많다.

    투명한 베일과 가슴을 가린 진주 장식의 타원형 보석, 허리 주위로 휘감긴 천, 둥근 어깨와 가슴 위로 둥글게 파여 노출된 목과 양팔을 앞으로 벌리고 있는 자세 등도 비슷하다. 더구나 아래를 향해 반쯤 뜬 두 눈은 성처녀와 마찬가지로 자비심으로 충만하다.

    오른 팔을 길게 뻗은 관음보살의 자태는 마찬가지로 오른 팔을 길게 뻗은 성처녀의 자태와 일치한다. 관음의 발치에 꽃이 피어 있는 것도 성처녀의 발치에 몇 송이 꽃이 피어 있는 것과 동일하다. 관음의 머리 위로 천장처럼 덮여 있는 암석의 형상도 거의 일치하며, 관음보살의 오른 팔 옆에 화병이 놓인 절벽의 형상도 성처녀의 오른 팔 옆으로 펼쳐지는 경치와 비슷하다. 관음의 아래 좌우측에 인물을 배치하여 삼각구도를 형성한 것도 동일하다.

    서양 미술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성모의 형상을 다빈치의 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아시아 미술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관음의 형상은 고려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관음의 얼굴은 에서 보는 성처녀의 얼굴과 달리 여성과 남성이 혼합돼 있다. 이것은 네팔과 티베트의 밀교 회화에서 남성인 부처에 여성의 성력(性力)을 결합시켜 우주의 창조력을 강조하는 탕카(Thangka) 회화 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 있는, 13세기경 티베트에서 제작된 보살상은 고려 수월관음도의 보살과 거의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를 올린 것이나 관(冠) 형태, 귀의 위에 단 꽃이나 귀 옆에 부착된 원반형 장식도 같은 양식이지만 특히 눈과 입, 입술 위의 콧수염, 둥근 얼굴선 등은 동일한 얼굴임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불화에 나타나는 보살의 얼굴은 입체감이 나게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이고 있어 티베트의 탕카보다 훨씬 더 발전된 회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도식적이며 편평한 얼굴을 그리는 유럽 중세의 회화와 실감이 나는 입체적 얼굴을 그리는 르네상스 회화의 차이점과 흡사하다.

    유사점과 함께 차이점을 보자면 관음보살의 얼굴과 성처녀의 얼굴은 그 얼굴에 담긴 감정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처녀의 얼굴에는 인간의 감정과 겸손함이 있지만 관음의 얼굴에는 감정을 초월한 신의 위엄이 있다. 하지만 그 위엄은 성처녀에게서 볼 수 있는 부드러움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있다.

    수월관음은 ‘착한’ 얼굴이 아니라 선함도 악함도 초월한 얼굴이다.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나 열망 같은 욕망 자체를 버린 저 세상의 얼굴이다. 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처녀의 얼굴에 고통의 그늘이 있는 것은, 아마 서양 문화 자체가 해탈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예술가들은 해탈의 모습보다는 고통 속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성스러움을 천국에 오를 희망의 표정에서 찾는데 그쳤다.

    관음보살의 좌측 아래에는 바다에서 연좌(蓮座) 여의주와 함께 온갖 보화를 들고 올라오는 용왕과 그 일행이 그려져 있다. 이 부분과 관음보살 옆에 놓인 수양버들가지가 꽂힌 물병, 그림 좌측 위쪽에 그려진 파랑새, 우측의 청죽(靑竹) 등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동해 낙산의 동굴에서 친견하는 일화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린 것이다.

    성처녀에서 보이는 어린 아기로 표현된 세례 요한과 예수 사이에 주고받는 신과 인간 사이의 간절한 시선의 교환이 주는 감동은 없지만, 동해 용왕 일행과 우측에 그려진 불법을 구하려고 관음보살을 찾아 온 선재동자는 불법과 자비를 구하려는 인간의 간절한 욕망이 아름답게 표현돼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와 요한을 따로 그림으로써 신과 인간의 영역을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월관음도 또한 좌측에는 동해 용왕 일행 즉 신을 그렸고, 우측에는 불법(佛法)을 구하는 선재 동자, 즉 고독한 수도자(인간)를 그렸다.

    선재동자와 세례 요한은 신을 바라보며 깊은 경외심과 자비를 구하는 아주 비슷한 자세로 그려져 있다. 연잎을 타고 있는 동자(童子)는 연꽃을 받드는 넓은 연잎을 통해 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아기 세례 요한은 수선화 꽃 위에 무릎을 꿇은 이미지로 신앙심을 표현한다.

    이런 상상력은 용왕 일행에서도 마찬가지로 전개된다. 여의주를 든 청년은 괴물의 등에 업혀 파도 위를 걷고 있다. 여의주에서는 불길이 새어나오고 있고 괴물의 발에는 버선 같은 이상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 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집어넣은 것일까? 의상대사 일화에서는 용왕이 직접 여의주를 바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괴물의 등에 업힌 청년이 여의주를 바치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독창적 상승 구도

    용왕 일행을 유심히 살펴 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여의주를 든 청년과 용왕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크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원근법 대로라면 그 반대로 그려지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구도는 용왕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므로 신분의 차이에 따라 크기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보물을 바치는 인물들의 행렬을 횡으로 배치하지 않고 종으로 배치하여 역동적인 느낌을 준 것도 화가 나름의 독창성이 뛰어난 부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처녀의 구도와 비교해보면 용왕 일행을 그린 이 작은 부분이 또한 얼마나 뛰어난 상승구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삼각구도를 반복하여 상승의 느낌을 주고 있지만 수월관음도의 용왕 일행은 지(之)자 구도와 위로 타오르는 불길을 이용하여 상승 구도를 만들었다. 훨씬 더 비범하고 역동적인 상승이미지를 창조해낸 것이다.

    상승구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음의 오른 손까지 절벽이 지(之)자 구도를 연장해 올라가고 마지막 절정을 이룬 곳에 다시 물병과 수양버들로 마무리하여 상승하려는 시선을 끌어내리고 있다. 반면 우측에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한 쌍의 청죽(靑竹)은 관음의 머리 위까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수직으로 깎인 다빈치의 암석에 비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상승구도인 것이다.

    생기와 신선함, 名作의 천재성

    수월관음도는 불법에 이르려 하는 영혼의 상승 욕구와 이 세상에 불법을 전해주고 있는 관음의 자비를 은은한 색과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선(線)은 불법을 구하는 영혼들이 그려진 그림의 아래 부분을 향하여 강처럼 유연하고 우아하게 흘러 내려간다. 그 흐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처럼 무겁지 않고, 암흑에 묻혀 있지 않으며, 오히려 발랄한 생기(生氣)로 가득 차 있다.

    이 생기는 화려한 색상의 연속적인 만개(滿開)와 함께 신선한 이슬처럼 선을 따라 빛나고 있어 그림을 보는 이의 시선을 매혹시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기와 신선함이다. 답답한 암굴의 풍경에 이렇게 생기와 신선함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을 능가하는 천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월 관음도를 통해 서양 명화에 뒤지지 않는 우리 그림을 알아보았다. 암굴의 성처녀와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관음도일 수도 있다. 서양 명화를 우리식으로 즐기려면 우리의 그림부터 편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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