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이 사시에 맞게 자기 몫을 수행하는데, ‘영향력을 줄여라’ ‘당신 몫을 줄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몫은 누가 줄여주는 겁니까. 독자가 하는 겁니다.”
인터뷰는 다음날 오전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차를 끓여 내오는 모습과 세월의 풍파가 녹아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서 경륜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는 대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논리를 폈는데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선 목에 굵은 힘줄이 설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8월7일 학계·문화계·종교계·시민운동권 인사 154명이 ‘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을 함으로써 이른바 안티조선 논쟁이 지식인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먼저 조선일보의 정체성 문제부터 따져보지요. 안티조선 진영에선 조선일보를 극우로 규정합니다. 수구·보수 이상의 반통일·냉전세력으로 보는 거죠.
“그들은 우리 사회 지식인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5∼6% 될까요. 그런데 다수의 지식인은 이런 첨예한 이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조선일보 정체성에 시비를 거는 지식인들은 목소리가 높으니 두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부 지식인의 행위를 두고 전 지식인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면 잘못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일부 지식인은 기존 세력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오게 돼 있습니다. 조선일보에 대해 시비를 건다면 똑같이 동아일보나 중앙일보 또는 한국일보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어야 합니다. 더 확대하면 경향 문화에 대해서도요. 그런데 왜 유독 조선에 대해서만 그러느냐. 내가 신문들을 다 읽는데 논조가 똑같아요. 조선이 반통일이면 동아는 반통일 아닙니까. 조선이 극우면 동아는 극우 아닙니까. 중앙은 아니고 한국은 아닙니까.”
―차이가 없단 말이죠?
“하나도 없지요. 내가 읽어보니 그래요. 내가 신문기자 출신이고, 그 신문들을 수십 년 읽어왔고 그 신문들에 수십 년 글을 써왔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조선에 쓸 때와 다른 신문들에 쓸 때 논조가 다르냐. 똑같습니다. 다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기자들은 다릅니까. 조선 기자와 다른 신문 기자들, 성향이 다릅니까. 같잖아요? 그런데 왜 안티조선을 하느냐. 공격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 으레 하는 짓이란 말이죠. 전술이든 전략이든 공격할 때는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야 하니까. 그 대상이 조선이 됐을 뿐입니다.”
송교수는 안티조선 진영의 운동방식을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수법’이라고 했다. 이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전개한 뒤 이를 안티조선 논쟁에 적용했다.
“조선 동아 중앙은 무엇을 지지하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지 않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까. 뭔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한 신문에만 초점을 맞춰 너만 극우다, 보수반동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전략이고 전술입니다. 서구사회의 역사에 비춰볼 때 이런 방식은 공산주의 세력이 쓰던 것입니다. 강한 쪽에 포커스를 두고 그걸 공격해 무너뜨리고 나선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식, 100년 전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방식을 우리 지식인들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짓입니까. 얼마나 비 지적이고 비 진보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짓입니까. 왜 신문들을 똑같이 공격하지 않느냐.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똑같이 공격하면 다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쪽이 당하거든요. 그런데 조선 하나만 공격하면 동아나 중앙 한국쪽에서 강한 라이벌 하나 넘어뜨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은근히 공격하는 사람들을 지지도 하면서.”
―전혀 차별성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안티조선 쪽에선 이른바 매카시즘 관점에서 조선일보만이 해왔던 작업이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몇몇 정부 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사상검증 작업만 해도 지식인사회나 학계 시민운동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언론계 내부에서도 논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예컨대 문민정부 시절 한완상 통일부총리나 현 정부의 최장집 교수가 물러난 데는 조선일보의 공격이 주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조선이 뭔가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까.
“동아 중앙은 한완상 최장집을 지지했지요.”
―지지라기보다는, 글쎄요. 일정 거리를 둔 것 아닐까요.
“나는 지지라고 봤어요. 내가 볼 때 조선은 용기가 있었고 동아나 중앙은 시세 영합적인 면이 보였습니다. 최장집 교수 사건을 예로 듭시다. 최교수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 됐습니다. 그거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자문하는 자리니까요. 최장집교수 개인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학자입니다. 그가 어떤 연구를 하든 국가가 간섭하면 안 됩니다. 신문도 공격하면 안 됩니다. 왜? 우리 헌법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왜 조선이 그렇게 나왔냐. 그때 나도 조선일보 지면에 같은 논조의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공인은 검증돼야 한다’였습니다. 최장집 개인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북한을 지지하든 공산주의를 지지하든, 현정부를 비판하든 안 하든 그건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보장돼야 합니다. 단 공인이 됐을 땐 문제가 다르다는 겁니다. 공인이라면 그 사회의 체제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인데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정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자문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조선만 공격하나
―최교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
“최장집 교수 글을 보면 6·25에 대해 수정주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관점, 좋은 겁니다. 학자는 여러 관점을 가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6·25는 민족해방전쟁이다, 6·25를 일으킨 북쪽은 민족통일을 위한 세력이므로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점을 글에 은연중 비추고 있어요. 꼭 끄집어낼 순 없지만 그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대통령에게 어떤 자문을 할지,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바라는 일반 국민은 불안하기 한량없고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의혹을 누가 풀어주느냐. 신문이 나서서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요. 언론이 왜 있는 겁니까. 나도 그런 얘기를 썼는데, 마녀사냥식으로 정치학회부터 나서서 몰아붙이고 다른 신문들은 은근히 그걸 지지하고. 그건 시세 영합적인 행동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난 조선이 굉장히 용기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해요. 투명성 선명성을 갖춘 신문으로 봅니다.”
송교수는 조선일보 외 나머지 신문들의 ‘비겁함’을 서슴없이 ‘단죄’했다. “분명히 이렇게 써주세요”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교수 비판에 적용한 자유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한완상 전부총리에게는 약간 누그러진 형태로 들이댔다.
“한완상씨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데, 글도 그렇고, 이 분은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이 분이 당시 지식인들과 다른 점은 냉전체제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지식인이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런 사람을 통일부장관에 기용하면 사람들이 의심을 가질 만도 하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냉전체제에서 살아왔고,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테러리즘이 강한 공산주의국가입니다. 그런데 저런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 저런 자유주의자를―공산주의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자유주의자지요―장관에 앉히니까 국민이 불안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 건 신문이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 아니라 당시를 생각하면 백번 표현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바로 그런 부분이 기존 체제나 주류 세력과의 충돌이라고 보는데요. 문민정부 출범 초기만 해도 그간의 양극화된 냉전구도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대북정책을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기존 대결구도로는 통일이 요원해 보였으니까요. 자유민주주의체제, 공산주의 체제 딱 둘로 나눠서만 보면 불안해 보이고 위험해보이겠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럼요. 좋은 시각입니다. 한완상씨가 가진 북에 대한 수용적 태도나 진보적 자세를 한 걸음 앞선 통일정책으로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걸 우려하는 사람들의 공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을 게이트 키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문지기 노릇입니다. 문지기가 뭡니까. 누구는 들여보내고 누구는 막는 게 문지기 아닙니까. 조선과 달리 다른 신문들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지요.
그런데 조선처럼 용감하게 나서서 ‘문지기’ 입장에서 당신은 넣어줄 수 없소, 이런 주장하는 신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신문을 가리켜 극우다, 반동적이다, 냉전체제 지지자다, 이렇게 말하는 건 편협한 일이지요. ‘당신은 당신대로 임무를 수행하라’고 말해야지, 그걸 보고 ‘왜 우리는 가만 있는데 당신만 유독 다르게 행동하냐’고 말하는 건 잘못이죠.”
―안티조선 진영의 구호가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입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언론의 자유나 기능 차원에서 충분히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조선의 경우엔 문제가 다르다는 겁니다. 극우 신문이 최대 발행부수를 바탕으로 지나친 영향력, 언론권력을 누리기 때문에 그걸 축소시켜야 한다는 거죠. 극우신문답게 그만큼의 몫만, 그에 걸맞은 영향력만 갖게 하자, 그게 이 운동의 목표라는 거지요.
강준만이 누구냐
“제 몫을 찾아준다는 건 뭘 뜻하는 겁니까.”
―마땅히 누려야 할 몫보다 지나친 몫을 누리고 있으니 줄여주자는 거겠지요.
“조선일보의 제 몫이란 건 지금까지 이 신문이 지향해온 자유민주주의적인, 시장경제적인, 자본주의적인, 보수주의적인 논조 아니겠습니까. 신문이 사시에 맞게 자기 몫을 수행하는데 ‘영향력이 커졌으니 줄여라’ ‘당신 몫을 줄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몫은 누가 줄여주는 겁니까. 독자가 하는 겁니다. 154명의 지식인도 독자입니다. 주장은 좋아요. 그렇지만 독자가 원하니까 신문이 많이 팔리는 것 아닙니까. 신문 보고 어떻게 많이 발행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그건 부당한 간섭 아닙니까. 그리고 개인에 대한 권리 침해 아닙니까. 조선일보는 사기업입니다. 사기업에 대해 당신 몫을 줄여라 말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경제논리로 보면 사기업이 맞지만 언론이 갖는 공적인 기능을 생각하면 단순히 사기업으로 볼 순 없겠죠.
“그렇죠. 국가가 관여할 수 없는 게 개인 기업이고 언론 아닙니까. 그걸 누가 하냐. 시장이 할 수밖에요. 시장을 향해 ‘조선일보 사보지 마쇼. 우리가 보니 조선일보, 나쁩니다’,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조선일보를 향해 ‘당신 영향력 줄여라’,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겁니다. 독자에게 그 신문 보지 말라고 할 순 있죠. 그러나 그것도 법에 저촉되겠지요. 개인 영역을 침해하는 거니까. 이걸 두고 제 몫 찾아주기 한다, 영향력을 줄인다, 세상에 이런 건방진 말이 어딨어요.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지식인의 말이 아닙니다. 무지입니다, 무지.”
―‘제 몫 찾아주기’라는 말은 강준만 교수가 처음 쓴 표현인데, 그게 안티조선 진영의 구호가 됐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 겁니까. 난 누군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언론학자 아니겠어요. 언론학자가 언론의 ABC도 모른다는 소리 아니요.”
강준만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3월호를 통해 송교수를 ‘극우 코미디’라며 혹독히 비판한 바 있다.
―안티조선 쪽에선 조선일보를 특수한 언론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특수하다는 건 그 신문에 대한 질투고 시기지. 지식인이 질투와 시기를 갖고 특정 신문을 비판한다면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죠. 무지죠.”
―시장에서 독자들에게 맡기고 판단할 문제라고 하셨는데, 안티조선 쪽에서도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를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불량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펴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이 운동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불량품이라 합시다. 그 판단은 누가 합니까. 독자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안티조선운동에 나선 지식인들이 일종의 계몽주의적 시각을 가진 듯합니다.
“계몽주의운동을 하려면 자격을 갖춰야지요. 그 사람들이 계몽주의자입니까. 무지몽매한 자들일 뿐입니다. 불량품 규정은 소비자가 하지요. 신문의 경우엔 독자가 하지요. 독자가 판단해 불량 신문이라면 안 사보면 됩니다. 소비자가 불량품 안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이 불량품으로 안 받아들이면 어떡할 겁니까. 그 신문, 두드려 부술 겁니까. 오히려 부수가 더 늘고 더 영향력이 커지면 어떡할 겁니까. 계몽주의적 시각에서 목탁 노릇을 하겠다는, 그런 오만함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은 목탁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목탁을 따라야 하는 무지몽매한 백성입니까. 그건 그들 자신이 무지몽매하다는 말밖에 안 돼요.”
―안티조선 쪽에선 통일정책이나 국가보안법, 공안사건, 시국사건 등에 대한 조선일보의 논조나 보도태도가 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공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죠. 무지몽매라는 말을 강조하시는데, 가치판단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무지몽매한 자들
“가치판단의 문제죠. 그런데 왜 무지몽매라는 말을 쓰냐 하면, 그 사람들이 내 가치와 다른 가치는 몰가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몰가치란―사회학에서는 이 말을 가치 중립이라는 뜻으로 쓰니 구별해야 합니다―당신 가치는 왜곡된 것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가치가 중요하면 남의 가치도 중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가치란 신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갖고 있어요. 내 신념은 옳고 당신 신념은 잘못됐다고 하는 것만큼 잘못된 게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런 점에서 무지몽매라는 것이죠.”
송교수는 통일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기자가 제시한, 현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모 일간지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문을 나타냈다. 여론조사에서 지지응답이 많이 나온 것과 우리 사회의 사상적 주류가 이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절대 다수 국민은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실현이 통일이나 민족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지요. 통일은 됐는데 자유민주주의가 실현 안 된다, 민족이 하나가 됐는데 자유민주주의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 통일과 민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선일보가 지향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동아나 중앙은 안 그렇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우위에 놓는 것, 이게 왜 반통일입니까. 말도 아닌 소리들을 하면서….”
햇볕정책도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햇볕정책 성공은 김일성 사후 체제수호가 어려워지고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진 북한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북한에 대해 노(No)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예요. 김정일 비위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분단 1세대는 현 정부의 이런 태도에 얼마든지 반대하고 강경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런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문도 있어야지요. 모든 신문이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햇볕정책으로 나갈 때 강한 상호주의를 부르짖는 언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흡수통일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현 정부의 통일정책은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는 것으로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용기있는 신문이라는 건 일관성을 가졌다는 뜻도 됩니까.
“그 철학, 그 논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 굉장한 용기지요. 154명의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또 욕 먹겠지만.”
―안보상업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하자면 안보를 상품화한다는 것인데, 객관적 자료에 비춰봐도 그동안 조선일보가 공안사건이나 시국사건과 관련해 과장보도를 하거나 오보로 정정보도를 한 적도 몇 차례 있습니다.
“의사는 오진을 하지 말아야 하고 언론은 오보를 내서는 안 됩니다. 의사는 과잉진료를 하지 말아야 하고 언론은 과잉보도를 하면 안 됩니다. 외국 신문들은 부수가 적게 나가도 좋다, 선정주의를 피하고 정확한 보도만 하겠다는 자세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그렇지 못합니다.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닙니다. 돈 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안보를 상품화한다는 건 분명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경우 오로지 상업주의만으로 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조선 나름의 이념적 지향을 너무 고집하다 보니 안보 문제와 관련해 왜곡보도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걸 갖고 조선일보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고 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니까.”
―안티조선 쪽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게 넘어가기엔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것이죠.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조선일보엔 그런 비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조선의 용기지요. 비전향장기수들이 이북으로 가는데 대학생 2000명이 연세대에 모여 환송대회를 열었습니다. 비전향장기수는 간첩입니다. 얼마 전 국군 포로 출신의 탈북자 몇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김영삼 정권 때만 해도 수천 명이 모여 엄청나게 환영했는데, 지금 정부는 다릅니다. 보도가 관제된다는 얘기도 있어요. 이런 문제에 대해 신문이 나서서 강력히 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선만 적극적입니다. 바로 조선의 이런 용기가 안보 상품화를 상쇄하는 것입니다. 굳이 공과를 따지자면 공이 과에 비해 훨씬 크지요.”
난 자유민주주의자
화제를 지역주의 문제로 돌렸다.
―안티조선 쪽에선 조선일보가 지역분열주의를 조장하는 데 앞장선다고 비판합니다.
“그 얘기는 조선이 다른 신문에 비해 현 정부의 잘못된 인사정책을 많이 공격했다는 뜻 아닙니까.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문제지요. 조선이 더 많이 보도했다고 해서 그걸 지역분열주의로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시민운동권이나 언론계 안팎에서 줄기차게 제기된 비판입니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김대중 대통령이 누구 못지 않게 조선일보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을 법한데요.
“조선일보가 반DJ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죠. 지역주의와도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조선이 지향하는 사상과 DJ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점이 안티조선 논쟁의 한 축인 듯싶습니다. 안티조선 쪽이 절대 가치를 강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은 조선일보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가치는 상대적인 겁니다.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무적야(無適也) 무막야(無莫也)라고. 어느 한쪽이 절대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고, 절대 나쁘다고 반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죠. 자신의 가치만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건 공산주의지요. “
그에게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안티조선 진영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아울러 이념 논쟁의 유일한 잣대다. 그는 끊임없이 확인한다. 자유민주주의자냐, 아니냐. 그러면 공산주의냐.
―교수님은 우파입니까.
“난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안티조선 쪽도 자유민주주의자임을 내세우는데요.
“자유민주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자를 보고 우파다, 좌파다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늘 자유민주주의가 통일이나 민족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만일 이것을 우파라 한다면 우파고 극우라면 극우겠지요. 보수라면 보수고.”
―안티조선 쪽을 좌파로 보십니까.
“그건 모릅니다. 다만 특정 신문(조선일보)을, 우파니 보수파니 극우반동이니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님은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안티조선 쪽에선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을 비판하는데요.
“그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판단입니다. 글 쓰는 거야 자유죠. 바로 그런 걸 문제삼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