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하기
- 1958년 경남 울산 출생
- 부산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 1989년 '창작과 비평' 통해 등단
- 소설: '살이있는 무덤' '은행나무 사랑' '날지 않는 청둥오리'
- 임수경통일문학상 수상
“우리 할아버지는 서울에 없잖아.”
말없이 부산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타고 떠난 여행에 여섯 살 짜리 둘째 놈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아홉 살 짜리 딸은 분위기를 살피고 입을 다물고 있다. 우리 가족은 열차 안에서 의자를 돌려 서로 마주 보며 369게임과 끝말잇기를 하고 오징어와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기차여행을 했다. 대구쯤 지나자 놀이도 시들해져 각각 자기 일로 돌아갔다. 아내는 스킬 자수를 하고 딸애는 동화책을 읽고 아들 녀석은 이 차량 저 차량으로 나돌아다니고 나는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산야가 뒤로 빠르게 흘러가고 기차는 북행을 계속했다. 이제 곧 경의선이 이어진다니 이대로 철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 유럽으로 갈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대전쯤 지나니 긴 여행에 무료해진 아들과 딸이 의자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한솔이 너, 요 선을 넘어 오면 안돼.’
‘누나도 요 선을 넘어 오면 절대 안돼.’
난 그제야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최하종씨라는 걸 다시 한 번 뚜렷하게 떠올렸다. 고향이 북쪽인 최씨는 넘지 않아야 될 휴전선을 넘어와 남한에서 단 하룻밤 잔 죄로 만 36년하고 일주일을 감옥에서 살고 내일이면 북으로 넘어가는 비전향 장기수다. 난 그를 1982년 전주교도소 특별사동에서 만났다. 그때 난 운동권 출신의 대학교 3학년 제적생이었고 그는 무기수였다.
80년대 초 모스크바 사동이라던 전주교도소 특별사동 4사는 참 살벌했다. 난 그 당시의 분위기를 소설 ‘살아있는 무덤’에서 다음과 같이 스케치했다.
비전향 정치범 장기수를 수용하는 특별사동은 15척 주벽과 두 길 남짓 되는 간벽으로 에둘러 포위된 채 유일한 바깥 창구인 변소 뒤창마저 나무판자로 봉해져 한 오라기 불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특사 내부는 완전히 밀봉된 고대의 지하왕릉을 연상시켰다. 길고 음산한 복도는 좌우의 수십 개의 폐쇄독방을 현실(玄室)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독방 안에는 30∼40년의 수형 생활에 들피지고 깡마른 수십 명의 비전향 사상범들이 무덤 속의 토용처럼 세월마저 잊은 채 꼿꼿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최씨와 비전향 장기수들을 만난 첫 느낌은 기이하다는 것이었다. 왜 전향을 하지 않고 관짝과 같은 0.75평 독방에서 복역하고 있는 것일까. 소나 말도 한 달만 갇혀 있으면 우황이 들기 시작한다는 그곳이다. 게다가 때때로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전향테러공작이 가해지던 지옥 같은 그곳의 삶을 그들은 왜 미련스레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지옥 같은 감옥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중 최씨는 누구보다도 명민했다. 일제시대 신경제일중학교 하얼빈공대를 나왔고 광복 후에는 평양에서 김책공대를 나와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 무역기획국 수출기획부장으로 근무한 그는 공작원이라기보다 실무형 테크노크라트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오로지 이데올로기와 사상만을 최고로 여기는 이념의 화신이었을까?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영문판 처칠회고록 6권을 영어로 읽고 암기하고 있었는데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역사 등 다방면에 대한 놀랍도록 해박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에서 보여주는 영화 ‘기러기 아빠’나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고는 엉엉 울었다. 아마도 북에 두고온 처자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향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한 시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 용포동이요. 마루에서 보면 푸른 바다가 보였지요. 고향 바다는 춤추는 물이라 해서 이름이 무수탄(舞水灘)이었어요. 무수탄 위로 해와 달이 차르르 자르르 뜨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오. 백사장 모래는 또 얼마나 맑은지, 하루 종일 뒹굴어도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던 곳이라오.”
평양에서의 결혼 생활도 행복했다. 아내는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나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고 둘 사이에 2남 1녀를 두어 남부러울 게 없는 가정이었다.
“나이 서른 여섯 한창 재미있을 때였소. 부부간에 낮에 문 걸어 놓고 뽀뽀한 적도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느닷없이 당으로부터 소환이 있었다.
“괴뢰군 소장인 당신 숙부가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서 주체세력이 되었는데 남으로 내려가서 숙부에게 통일사업에 관해 얘기해볼 수 있겠는가?”
그의 숙부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북한 정권에서 징역을 살고 철저한 반공투사가 되어 월남한 사람이다. 어떻게 설득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냉전시대 국가간에 벌어지는 이런 일에 애당초 개인의 자유의지란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최씨는 남파되었으나 하루만에 숙부의 손에 의해 방첩대로 넘어간다. 거대한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숙질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그리고 숙부는 조카를 방첩대에 넘겨줘 무기수로 만들었다는 일말의 죄의식(?)으로 조카의 전향공작에 전념한다. 숙부는 전역해 당시 주택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최씨를 호텔로 불러내 전향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널 집어넣고 내가 발뻗고 잠을 잔 적이 없다. 널 밖에 내놔야 북에 있는 형님 볼 면목이 있어, 이놈아.”
숙모는 옛날 그의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까지 데려와 새 살림을 차리고 알콩달콩 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최씨는 끝내 전향을 거부한다.
89년도 발표된 나의 소설 ‘살아있는 무덤’에 남아 있는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숙모님, 제가 전향하지 않는 이유는 숙부님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전 신념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일이 되면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야 할 사랑하는 처자식이 이북에 있습니다. 그들을 한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만날 그 날을 위해 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순결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뜻밖에도 최씨에게 귀향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도착하여 그가 살고 있는 낙성대의 집으로 갔다. 인사를 하고 내일이면 평양으로 떠나는 감회를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꿈만 같아요. 내일이면 평양에서 마누라와 자식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난 36년간이나 감금한 남한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계산을 해보니 내 나이 만 일흔 둘인데 감옥 밖에서 36년 살았고 감옥 안에서 36년 살았소. 왜 회한이 없겠소. 하지만 다 분단 때문에 생긴 일 아니오. 난 지금 당장 통일은 바라지 않소.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을 절대 후퇴시켜서는 안되오.”
최씨는 보따리를 싸면서 말했다.
“난 북의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면 뭘 잘했다고 떠드는 것보다 먼저 용서부터 구하려고 해요. 36년 동안 한 아내의 지아비로서, 자식들의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어느덧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그는 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세대에는 나와 같은 이런 비극이 나오지 말고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낙성대 역 계단으로 내려가 통로로 꺾어 들어갈 때까지 그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들 한솔이는 최씨에게 손을 흔들며 말한다.
“할아버지, 다음에 또 만나요.”
과연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대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는지. 그의 특별한 귀향이 분단으로 인해 남북으로 흩어진 모든 이산가족의 귀향과 평화통일로 이어지길 바라며 우리는 남행열차를 탔다.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