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일상적으로 치르는 술값에서 정작 술 만드는 데 들어간 원가는 얼마나 될까. 대중주인 맥주에 무려 115%의 최고세율을 적용하는 이유는 무얼까. 서민의 술 막걸리가 1982년에 노동현장에서 급작스레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네의 독특한 술자리 문화의 하나로 룸살롱 접대문화를 꼽는다. 네댓명이 접대부를 하나씩 옆에 앉혀 놓고 위스키 몇 병 마시고 나오면 술값이 200만 원에 육박한다. 언제부터 이런 문화가 생겼을까. 우리만 이러는 것일까.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와 비슷한 나라가 있다. 대만에도 이런 유의 접대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그로 해서 생겨난 두 나라의 공통점은 고급 위스키의 소비량이 엄청나다는 것.
룸살롱에서 흔히 찾는 양주는 고급 위스키다. 룸살롱에서 코냑이나 진을 찾으면 좀 엉뚱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위스키는 보리를 당화해 발효시켰다가 증류해 참나무통에서 3년 이상 숙성시킨 술이다. 룸살롱에서 마시는 위스키는 대개 국내 양주회사에서 수입한 완제품이거나, 혼합한 원액을 들여다 병입(甁入) 작업만 한 것이다.
세계 위스키 시장의 95%는 12년 미만의 스탠더드급 위스키가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대만은 배포가 크다. 12년 이하는 잘 상대하려 들지 않는다.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12년 이상 숙성된 프리미엄급 위스키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위스키 시장의 80%는 프리미엄급이 차지한다. 이는 위스키 본고장인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양조업자들은 “한국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8년짜리만 해도 상당히 고급술이고 주질에도 별차이가 없는데, 12년짜리가 아니면 수입해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소주 KO시킨 위스키
접대라는 것이 그렇다. 할 바에야 최고급으로 하고, 확실하게 먹여서 아쉬움 없이 떨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동원된 무기가 프리미엄급 위스키다. 97년부터 3년 동안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주세를 문제 삼은 WTO 주세분쟁은 바로 이 위스키를 지원하기 위한 공습이었다. 결국 100%였던 위스키 주세율은 72%로 떨어졌고, 35%였던 희석식 소주 주세율은 72%로 급등했다.
WTO 주세분쟁의 쟁점은 한국의 증류주 주세율에 유럽 증류주(위스키 브랜디 진 리큐르 따위) 주세율을 맞추라는 것이었다. 압축하면 위스키와 희석식 소주의 싸움이었다. 그 수혜자는 일견 위스키 강국인 영국 같아 보이지만, 영국 위스키 회사들에 막대한 자본을 대고 있는 미국도 그 못지 않은 이해당사자였다. 재판관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을 포함한 유럽대표 10명과 한국대표 10명이 번갈아가며 토론을 벌였다.
한국대표는 “희석식 소주와 위스키는 원료 제조법 도수 가격 소비자층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같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주세율을 같게 하라는 거냐. 조세는 주권이다. 그 나라 형편에 맞게 제정하는 것이다. 부당한 내정간섭을 철회하라”고 반박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이미 유사한 분쟁에서 일본이 패소한데다 국제사회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이끌리기 때문이었다는 게 한국대표로 참여한 국세공무원교육원 서현수 교수의 말이다.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미국 대사관과 자기네 나라 대사관 직원들을 풀어서 국내시장 조사를 다 했습니다. 우리가 ‘위스키는 유흥업소에서 주로 소비하는 고급술’이라고 하면 그들은 한정식집에서 위스키 마시는 사진을 제시했습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음식점에서 위스키를 시켜놓고 찍은 기념사진이었죠. ‘희석식 소주와, 3년 이상 숙성시키는 위스키는 제조방법이 다르다’고 하면 저쪽에서는 ‘참나무통 맑은 소주’의 광고가 실린 신문을 내보이더군요. 위스키도 참나무통에서 보관하고 소주도 참나무통에서 보관하니 같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억지 주장을 폈습니다. 재판관들도 서양 사람들이라 그런지 팔이 안으로 굽더군요.”
위스키의 주세율은 최근 10년 사이에 128%나 낮아졌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에 200%였던 세율은 91년 150%, 94년 120%, 96년 100%, 그리고 올해 마침내 72%까지 내려와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이는 마치 우리 사회의 개방화 지수를 보는 듯하다. 그와 함께 위스키 소비량도 늘어났다. 스탠더드급이 주종을 이루던 88년에 6762㎘였던 위스키 출고량은, 프리미엄급이 주종을 이루는 올해엔 1/4분기에만 5300㎘나 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45%가 늘었다.
위스키 원가, 술값의 40분의 1
우리나라 사람들은 맥주 다음으로 소주를 많이 마신다. 98년 통계자료를 보면 맥주 출고량이 153만㎘, 소주 출고량이 86만㎘였다. 그런데 출고량으로 치면 맥주가 으뜸이고, 알코올 소비량으로 치면 소주가 으뜸인데, 술값으로 치면 위스키가 으뜸이다. 현재 수입 위스키를 포함한 위스키 시장 규모가 1조원 가량 된다고 추정하는데, 실제 유흥업소에서 지불하는 위스키 값은 그 10배인 10조원을 넘는다.
위스키값을 따져보자. 룸살롱에서 가장 많이 찾는 위스키는 500㎖ 국산 프리미엄급 위스키다. 350㎖는 술이 모자랄 것 같고, 700㎖짜리는 남을 것 같아서 500㎖를 잘 시킨다고 한다. 술집 마담들도 500㎖짜리를 선호한다. 500㎖를 주문했다가 약간 부족한 듯해 한 병 더 시켰다 남기는 것이 700㎖를 시켰다가 남기는 것보다 매출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내 위스키 시장은 진로 임페리얼 클래식과 임페리얼 인터내셔널, 두산 씨그램의 윈저 프리미어, 하이트맥주 계열사인 하이스코트의 딤플이 3각 편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12년 이상 된 프리미엄급이다.
서울 강남의 물좋은 룸살롱에서는 이런 술 한 병에 30만 원까지 받고, 그보다 못한 집에서도 대개 20만원 정도는 받는다. 특별소비세를 물지 않는 단란주점으로 내려오면 15만원선이 된다. 카페나 맥주 집에서는 10만원 이하지만 이런 곳은 위스키의 주요 소비처가 아니다. 국산 위스키 출고분의 80%는 주로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에서 소비되는 업소용이다(여기에서 국산이란 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국내 마스터 블렌더가 현지에서 우리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위스키를 블렌딩할 때 입회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위스키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고로 ‘국산 위스키’는 없다. 다만 국내 기업이 병째 수입해 파는 딤플 같은 술이 있는가 하면, 스테인리스 통에 블렌딩된 원액을 수입해 국내에서 병에 담아 파는 임페리얼 같은 술이 있다. 두산 씨그램의 윈저는 두 방식을 겸한다).
그러므로 가정용으로 소비되는 위스키는 전체 출고량의 20% 정도 된다. 500㎖ 프리미엄 위스키의 공장 출고가격은 3개 회사의 제품이 2만1885원 안팎으로 별차이가 없다. 유흥업소용이나 가정용이나 출고가격은 같다. 도매점을 거쳐 술집으로 가느냐 소매점으로 가느냐만 다를 뿐이다. 소매점에서는 평균 2만8500원에 팔린다. 도매마진 10∼15%와 소매마진 10∼15%가 붙었기 때문이다.
출고가격 2만1885원도 모두 순수한 술값은 아니다. 여기엔 주세가 붙어 있다. 원액 가격과 운송비, 광고·판촉비, 인건비를 합한 원가는 1만276원쯤 된다(술의 원가를 계산할 때는 ‘300원53전’ 하는 식으로 전(錢) 단위까지 헤아리지만 이 글에선 생략한다). 거기에 주세(72%) 7399원, 주세의 30%인 교육세 2219원, 부가가치세(10%) 1989원 등 1만1608원의 세금이 붙는다. 그런데 병값과 인건비, 운송비를 빼고 나면 원가 1만276원 중 순수하게 남는 원액값은 5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룸살롱에서 최고급으로 접대했다고 여기는 20만∼30만 원짜리 고급 양주의 원액값은 겨우 5000원에 불과한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주세수입 예상액은 2조3415억 원이다. 국세징수 예상액 86조 4740억 원의 2.7%를 차지한다. 예년엔 3.5%쯤 됐으니 좀 줄어드는 셈이다.
주세의 65%는 맥주가 차지한다. 맥주는, 도수는 가장 낮은 4.5도지만 주세율은 가장 높은 115%다. 지난해까지는 주세율이 130%였고, 96년까지는 150%였다. 외국에서는 대체로 ‘고도주(高度酒) 고세율(高稅率)’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맥주의 주세는 우리보다 낮을 것이다. 맥주의 소비자 가격에서 차지하는 세금의 비율을 비교하면 한국은 51%, 미국은 19%, 독일은 20% 가량 된다. 우리의 맥주 세율이 터무니없이 높아 보인다. 서민들이 애용하는 술이라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내년부터는 100%로 다시 낮춘다고 하지만, 40도 고급 위스키의 주세율이 72%로 하향 조정된 것에 견주면 더욱 그렇다.
현재 맥주시장에서 점유율 50%를 웃도는 하이트맥주(500㎖)의 원가구성을 살펴보자. 출고가격이 998원이다. 그중 제조원가는 363원이다. 여기에 주세 418원, 교육세 125원이 붙어 공장 공급가가 907원이고 여기에 다시 부가세 90원이 붙어 출고가격이 형성된다.
맥주의 제조원가는 출고가격의 36%에 지나지 않는다. 1400원 하는 소매점 가격을 기준으로 삼으면 제조원가는 26%다. 도수가 높지도 않고 고급술도 아닌데 왜 이다지 세금이 높을까. 맥주의 주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내 맥주 역사를 훑어봐야 한다.
일제 식민지 초기에는 맥주가 수입됐다. 그러다 1933년에 조선맥주와 기린맥주 공장이 서울 영등포에 세워지면서 그 이듬해 처음으로 국산 맥주가 출시됐다. 그 시절에 맥주는 고급술에 속했다. 그런 분위기는 70년대까지도 이어졌는데,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려고 ‘비어홀’에 갔다. 당시 맥주는 사교장의 총아로 지금의 위스키와 비슷한 지위를 누렸다. 주세도 수입원료로 만드는 고급술로 간주해 150%의 고세율을 적용했다. 그래서 당연히 소비량도 적었다.
맥주 소비량은 76년까지만도 막걸리의 1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맥주시장이 불붙은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87년에 막걸리를 아슬아슬하게 추격하더니, 88올림픽 때는 완전히 역전했다. 세계로 눈을 돌린 그 시점에, 농경사회와 노동현장의 벗이던 막걸리는 술판에서 밀려나고 대신 맥주잔이 높이 치켜올려졌다.
맥주는 88년에 주류 출고량 1위로 올라섰지만, 주세 총액은 훨씬 전부터 단연 1위였다. 맥주 주세는 69년에 주세 총액의 40%대로 올라섰고 74년에 50%대, 78년에 60%대로 신장됐다. 90년대에는 70%대를 오르내렸다.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맥주 주세를 국세청에서 왜 내리려고 들겠는가. 그렇다고 맥주회사들이 주세를 내려달라고 시위를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93년까지 OB맥주와 크라운맥주의 독과점적 지위가 보장된 데다, 세금은 높을지라도 매출이 꾸준히 늘어왔고, 게다가 국세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에 주세를 내려달라는 주장을 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맥주가 대중주로 자리하면서 서민들이 부담하는 세금만 많아진 것이다.
격랑의 맥주시장
매출이 거듭 신장되면서 맥주회사들의 형편은 어떻게 변했을까. 맥주시장은 94년에 진로의 카스맥주가 뛰어들면서 격랑에 휩싸였다. 소주업계를 주름잡던 진로가 소주 유통망을 통해 카스맥주를 공급하자 당시 맥주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던 두산의 OB맥주에서도 경월소주를 인수하면서 맥주와 소주업계의 무차별 경쟁이 벌어졌다. 업소에 냉장고를 무료로 넣어주고, 간판 달아주고, 광고 물량을 크게 늘리면서 맥주 3사 간에 출혈경쟁이 본격화됐다.
그 와중에 조선맥주가 지하 암반수를 부각시킨 하이트맥주를 내놓으면서 맥주시장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도저히 OB맥주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조선맥주가 신병기로 무장해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선 것이 96년이었다. 그후 두산은 모기업인 OB맥주 지분 50%를 벨기에 인터브루사에 매각하면서 경영권까지 넘기고 말았다. 카스맥주에 과잉 투자한 진로는 그 후유증으로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지분 전체를 인터브루사가 경영하는 OB맥주에 넘기게 됐다. 그래서 다시금 한국의 맥주시장은 94년도 이전처럼, 카스맥주를 인수한 OB맥주와 하이트맥주 양사 체제로 재편됐다.
새로운 면허업자가 등장하면서 자율경쟁체제로 들어간 한국의 맥주시장은 이렇듯 한정된 시장에서 지나친 출혈경쟁을 벌인 나머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허망한 결과였다. 결국 국내 맥주시장의 절반이 ‘외자유치 성공’이라는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외국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맥주 주세를 낮추자고 주장하는 것은 서민들을 위한 일이 될까, 외국기업의 잇속을 차려주는 일이 될까. 혼란스럽다.
맥주에 주도권을 빼앗긴 막걸리가 다시 과거의 기력을 회복하기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로 회귀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인다. 비록 세율 5%라는 특혜를 받고 있긴 하지만. 막걸리는 70년대에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69년에 96만㎘를 출고하다가 70년 들어 100만㎘를 훌쩍 넘어 121만㎘에 이르렀다. 막걸리를 가장 많이 생산한 시기는 74년으로 출고량 168만㎘를 기록했다. 당시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를 꾀하던 시기였다. 농촌을 떠나온 막노동자들을 달래주던 술이 막걸리였던 것이다. 비록 쌀막걸리가 아닌 밀막걸리였지만, 대중들은 막걸리로 칼칼한 목젖을 적셨다.
그런데 70년대 후반부터 매출량이 완만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걸리업계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밑에서는 4도 맥주가 용암처럼 꿈틀거렸고, 위에서는 25도 소주가 천하를 호령했다. 사무직 직장인과 여성 음주자가 늘면서 맥주 소비량이 늘고, 도수 높은 소주가 맺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세태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막걸리업자들은 그런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도수를 6도에서 8도로 올리는 비책을 내놨다. 독한 소주와 싱거운 맥주 사이에서 좀더 분명한 차별화 전략을 펴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82년 국세청은 6도로 제한돼 있던 도수를 8도로 조정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웬걸? 그것이 되레 막걸리업계에 치명상을 입히게 될 줄이야.
막걸리의 슬픈 운명
82년 130만㎘에 이르렀던 막걸리 출고량이 83년에는 85만㎘로 급감했다. 1년 만에 3분의 1이 줄어든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서울에선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새참으로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막걸리 도수가 2도 높아지자 인부들이 막걸리에 취해 업무에 곧장 복귀할 수가 없었다. 현장 감독관으로선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안전사고 위험이 더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걸리를 마시지 말라는 조처를 내렸다. 이런 사정은 다른 사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도 차이로 막걸리가 노동현장에서 격리되고 만 것이다. 소주와 맥주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자 했던 막걸리가 오히려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3년 뒤인 85년에 막걸리가 다시 6도로 돌아섰지만, 이미 꺾인 하향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87년에는 85만3000㎘로 맥주 출고량 85만1000㎘에 쫓기더니, 그 이듬해부터는 4년 연거푸 25만㎘씩 간격이 벌어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져내렸다. 위스키시장이 개방된 91년에는 막걸리 출고량이 44만㎘, 맥주는 158만㎘가 됐다. 10년 사이에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고 만 것.
91년에 막걸리 주세율은 10%에서 5%로 하향 조정됐지만, 출고량은 더욱 줄어 98년에는 18만㎘를 기록했다. 우리 역사와 함께 한 전통의 술, 우리나라에만 있는 막걸리가 이방인의 술에 밀려 자리를 내주고 만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술의 몰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풍속도까지도 바꿔버렸다. 논두렁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대신 커피나 맥주를 시켜먹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막걸리가 주도권을 상실한 것은 산업사회로 옮겨 가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가령 82년에 6도에서 8도로 도수를 올릴 때 일률적이 아니라 탄력적으로 도수를 조정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개편됐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는 ‘6도 아니면 8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좀더 융통성있는 제안을 할 수 없던 경직된 시기였다. 결국 국세청이 독점한 술 정책이 우리술의 탄력있는 변신을 가로막았던 셈이다.
술의 재료나 맛이나 도수는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술이 발전할 수 있고, 새로운 고객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술은 신고한 대로만 제조해야 한다. 물론 막걸리는 3도 이상으로 빚도록 관련법이 개정돼 얼마간 숨통을 틔웠지만, 시장이 너무 위축된 뒤였기 때문에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내년부터는 막걸리업계도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지금까지 면 단위로 판매구역을 정해 놓고 독점적으로 팔았던 지역제한이 철폐되고, 생수처럼 전국 어디에서든 생주(生酒) 막걸리를 팔 수 있게 된 것. 따라서 조만간 소주나 맥주회사처럼 대형 막걸리회사가 생겨날 것이다.
WTO의 볼모가 되어 손해를 본 건 소주업계와 소주 소비자들이다. 소주 주세율이 35%에서 72%로 두 배나 올라 출고가격이 25% 가량 뛰어올랐고, 올 7월까지 집계된 판매량은 작년에 비해 15% 가량 줄었다.
고려시대에 몽고족이 침략할 때 소주가 도입된 이래 우리 조상들은 소주를 즐겨 마셔왔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 고리에 내려 먹는 증류주였다. 소주는 주로 상류층에서 즐긴 고급술이었고, 특히 북쪽지방에서 많이 마셨다. 현재의 희석식 소주는 1920년대에 처음 선을 보였는데,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소주시장에 무혈 입성했다. 양곡관리법은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조처였다. 즉 쌀이나 보리, 조, 수수로 빚는 증류식 소주를 만들지 말라는 얘기였다. 증류식 소주를 빚던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희석식 소주업체로 전환해야 했다.
희석식 소주는 처음엔 30도를 유지하다가 74년부터 25도로 도수를 낮췄다. 도수를 낮추니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74년에 28만㎘였던 출고량은 이듬해 37만㎘로 크게 늘었다. 이후 소주 판매량은 꾸준히 늘어나 98년에는 출고량 86만㎘를 기록했다.
최근 소주업계에서 눈에 띌 만한 변화는 23도짜리 저도수 소주의 등장이다. 23도 소주는 95년 마산의 무학소주에서 ‘깨끗한 하이트소주’를 내면서 선을 보였다. 그러자 이듬해 부산의 대선주조도 23도짜리 시원소주를 내놓았다. 마산과 부산을 기반으로 한 남부지방의 소주회사들이 판매지역 제한폐지 조치에 대응,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내놓은 술이 소비자들에게 먹혀들기 시작했다.
‘마셔도 부담없다’는 23도 소주의 홍보전략이 통하자 다른 소주회사들도 속속 23도짜리를 내놓았다. 진로의 참이슬, 금복주의 참스페셜, 대선의 시원소주, 무학의 깨끗한 하이트, 두산의 뉴그린 등이 22∼23도의 저도수 소주들이다. 지난해부터는 23도 소주들이 저도수라는 딱지를 떼고 소주의 주종으로 자리잡게 됐다. 이들 가운데서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게 진로 참이슬이다.
참이슬 360㎖짜리 한 병의 출고가격은 640원이다. 원가가 300원이고, 주세(72%)가 216원, 주세의 30%인 교육세가 64원, 부가세가 58원이다. 출고가격에 도매마진과 소매마진이 각각 10∼15% 붙어 소매점 가격은 900원 안팎이 된다.
주세율 35%, 교육세율 10%였던 지난해에 참이슬 출고가격이 510원이었으니 가격이 25%나 인상된 셈이다. 때문에 음식점에서도 지난해까진 한 병에 2000원을 받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올해 들어서는 3000원을 받는 곳이 많아졌다.
3000년 전부터 존재한 주세법
세계사적으로 볼 때 주세법의 연원은 길다. 3000년 전인 이집트 파라오 왕조 때부터 주세법이 존재했다. 당시 이집트에선 질좋은 포도주가 생산됐는데, 국가에서는 포도주를 엄격하게 관리해 세금을 징수했다.
우리나라 수입 위스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카치 위스키는 영국 주세법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지는 위스키를 뜻하는데, 그 술맛이 좋아지게 된 것은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공적이다. 잉글랜드 왕을 겸하면서 대영제국의 틀을 마련한 그가 주세를 만든 주인공이었다. 위스키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서 많은 세금이 부과됐다. 그러자 스코틀랜드인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증류기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몰래 술을 빚었다. 증류과정에 연기가 나기 때문에 주로 밤에 술을 빚었다. 이렇게 몰래 담근 술은 위장하기 위해 참나무통에 담아 동굴 안에 숨겼다.
그런데 제때 팔지 못한 술이 있어 몇 년 뒤에 따라보니 뜻밖에 맑은 호박색이 돌고 맛이 부드럽고 향이 좋은 매력적인 술로 변해 있었다. 참나무통에 3년 이상 숙성시켜 독특한 맛을 내는 비법은 이렇게 얻어졌다. 그 뒤로 스카치 위스키는 위스키의 대명사가 됐다. 만약 제임스 1세가 주세를 부과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스카치 위스키를 맛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세법은 1909년에 처음 생겼다. 담배세와 함께 생긴 최초의 간접세였다. 조선시대에는 술을 빚는 곳도 있었고, 주막도 있었지만 주세는 따로 걷지 않았다. 인두세니 토지세 같은 직접세만 있었다.
1899년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인이 조선의 재정고문에 취임하면서 술에 대한 조사가 실시됐고, 1909년 2월에 처음 주세법이 시행됐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술을 빚던 시절이라, 정부에서 조사한 주류 제조자의 수는 총 인구의 7분의 1이나 됐다고 한다. 필요에 따라 빚어 마시던 가양주(家釀酒)까지 통제할 것을 염두에 둔 조사였던 듯하다.
1916년에는 제조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주세령을 내렸는데, 당시 상업적인 주조장이 12만1800곳, 자가용 면허를 받은 곳이 36만6700군데였다. 그러던 것이 제도적 억압과 판매용 술의 보급 증가로 자가용 면허자가 1926년에 13만1700곳, 28년에 3만4800곳, 29년에는 265곳으로 줄더니 32년에는 한 곳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에 따라 34년에는 자가용 술 제조 면허제가 폐지됐다. 이제 집에서는 어느 누구도 합법적으로 술을 담글 수 없게 된 것이다.
1935년 일본인들이 펴낸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에는 “1934년 총 조세액의 3할을 점유하여 각종 조세 중 제일에 위치하는 명실공히 조선 산업 중 최대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정부의 통제 조장에 의한 공으로 매우 훌륭한 처사라 하겠다”고 호평하고 있다. 그만큼 밀주 단속도 철저했다. 결국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마셔댄 술로 조선을 통치할 자금을 마련한 셈이다.
세무공무원들의 파워
주세는 국가의 주요 재원이었기에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밀주 단속은 심했다. 탈세를 막기 위해 세무공무원이 아예 주정공장에 살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공무원이 잠시 외출한 사이에 술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잦았다.
그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전국의 주정공장을 통폐합해 12개로 줄이고, 독점판매 회사를 만들어 엄격하게 통제했다. 주류회사의 면허를 엄격히 제한한 것도, 그로 인해 주류회사들이 독과점의 특혜를 누린 것도 다분히 국세청의 효율적인 주세 관리에서 생긴 부산물이다.
주류시장의 개방으로 많은 제도가 변했지만, 세무공무원들이 작은 양조장을 감독할 때도 두 명씩 짝을 지어 다니는 관행은 변치 않았다. 혼자 다니면 자칫 부정의 소지가 있을까봐 서로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렇듯 ‘2인 1조’가 된 배경은 따로 있다.
양조업을 하기 힘들었고 세무공무원이 악랄하던 일제시대에 술을 뒤로 많이 빼돌리는 양조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급습한 세무공무원에게 뒷거래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양조장 주인은 세무공무원을 붙잡고 애원했다. 이 사실이 세무서에 보고되면 면허가 취소될 게 뻔했다. 그러나 세무공무원은 야멸차게 뿌리치며 돌아섰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양조업자는 그 세무공무원을 내리쳤고 쓰러진 공무원의 시신을 토막 내서 유기했다. 그 사건 이후로 세무공무원은 늘 둘이 함께 다닌다는 ‘믿거나 말거나’ 사연이 전해온다.
지금도 세무공무원은 주류업자들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면허에서부터 원료수급, 제조방법 관리, 품질검사, 판매관리, 세금징수 등 술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국세청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굴지의 주류회사 사장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회장이 누구냐”고 물으면 “국세청 소비세과장”이라고 답한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다.
국세청의 기구표를 보면 낯선 조직이 하나 눈에 띈다. 국세청 기술연구소다. 1909년 주세법이 처음 생기던 해에 대한제국 탁지부(현재의 재경부)에 양조시험소를 설치한 것이 그 효시다. 양조시험장은 ‘경성 서대문에서 마포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약 12정(町) 떨어진 곳에 소나무가 울창한 산을 등에 업고 약간 동남쪽으로 향하여 다소 완만하게 경사진 작은 언덕으로, 남쪽으로 한강과 마포가 바라보이고 수질이 맑고 깨끗하며 수량도 풍부하여 1년내내 마를 염려가 없는 아현리의 관유지(官有地)’에 자리잡았다. 당시 아현리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소주를 만들고 있었다. 90년 전에 양조시험소가 자리잡았던 아현리 바로 그 자리(지금의 마포경찰서 뒤쪽)에 국세청 기술연구소가 있다. 정부기관 중 그 임무와 터전이 변하지 않은, 몇 안되는 장소일 듯싶다.
국세청 기술연구소는 술의 원료를 분석하고 감정하는 연구기관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주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데 필요한 술의 분석과 감정을 전담하는 곳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류회사를 지원하기도 하는데, 그 취지는 주류회사가 잘 되야 세금도 잘 걷힐 터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효율적으로 징수하기 위해 국세청 산하에 전문기관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술을 분석, 감정하는 전문기관으로서 국세청 기술연구소를 능가하는 별도의 기관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나 보건환경연구원에서도 술에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지만, 주세법에 정해진 술의 기준과 규격에 맞게 제조되고 있는지를 검사할 뿐이다.
우리술 배려해야
술이란 한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기호품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술의 한쪽 면만 봐온 느낌이다. 술을 단지 세수 확보의 대상물로만 파악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랬기에 전통주의 전승과 보존, 국민건강 관리, 술의 원료로 쓰이는 농산물 재배와 수급문제, 알코올 중독자 치료문제 등은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단적으로 전통술인 민속주의 현실을 보자. 그 운명이 기구하다. 양주 수입이 개방되지 않았다면 민속주는 아직도 단속대상이었을 것이다. 양주시장이 개방되면서 더이상 민속주 제조 불허를 고집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허가를 낸 준 것이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봤다면 진작에 전통술의 복원작업에 애정을 쏟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사와 문화사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술은 다만 주세를 걷기 위한 기름진 세원(稅源)으로 보았을 뿐이다. 굳이 법을 바꿔가면서 감독대상이 될 업체를 여럿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민속주는 크게 약주와 증류식 소주로 구분된다. 약주에는 주세 30%, 부가세 10%를 붙이고, 증류식 소주에는 위스키와 똑같이 주세 72%, 교육세 30%, 부가세 10%를 부가한다. 문배주, 이강주, 안동소주, 진도홍주 등의 증류주는 위스키나 브랜디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처지가 됐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받은 문배주의 이기춘 대표는 “우리술은 공공연하게 봐줘야 한다.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규모도 작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뭐라고 하면 ‘너희도 너희 나라 술을 보호했던 적이 있지 않으냐, 10년이든 20년이든 그 민족의 전통술이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배려해 주는 게 마땅하다’고 당당히 주장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국을 방문한 것도 양주협회 사람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신문 한 귀퉁이에 “지난 4월 방한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축하만찬에서 마셔 위상이 드높아진 윈저 프리미어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의…” 라는 식의 기사가 실리게 마련이다. 우리에겐 그런 전략이 없고, 쓸쓸하게도 그럴 만한 국주(國酒)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규제개혁위원회에 참여한 중앙대 정헌배 교수(경영학)는 지난해 주세법이 바뀔 때 “전통민속주, 탁약주 등 영세업체에 대해서는 영세율을 적용, 세율을 50%까지 경감하는 조항을 두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전통술에 대한 별다른 배려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체 주세규모에서 보자면 소수점 한 자리 비율에도 미치지 못하는 민속주가 너무 하찮아서 신경쓸 여력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법적 보호가 필요하고 당분간은 보호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술이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술을 배려해야 한다.
또한 국세청 기술연구소 외에 술의 품질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독립기구가 필요할 때가 됐다. 국세청으로선 주류행정을 총괄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세금에 관련된 고유 업무를 보되, 품질향상과 주류산업 지원, 국민건강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또 한 가지, 주세 업무와 관련해 지적해둘 사실이 있다. 현재 주세는 국세청에서 거둬 전액을 지방예산으로 분배하고 있다. 이제는 술꾼들에게서 거둔 돈을 술꾼들을 위해서도 써야 한다. 스위스의 경우 거둬들인 주세를 알코올 예방 및 치료에 100% 사용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술에는 한 나라의 문화가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 술을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술을 음식으로 여겨왔다. 남의 나라 술에 우리 입맛을 맞추고만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술을 북돋아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