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완기(학술원 회원)
신용하(울산대 석좌교수)
김중순(고려사이버대 총장)
김학준(단국대 이사장)
정영수(인하대 부총장)
주익종(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
이옥순(인도문화연구소장)
진행 이종은(국민대 교수)
서구에서도 유례없는 언론의 권위 지켜낸 근대적 언론경영인
●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우선 정진석 교수의 발표와 관련해서 한두 마디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정 교수가 발표에서 함께 거론하고 있는 구한말의 서재필 박사와 일제강점기의 인촌에 의한 신문 창간은 세계 신문의 역사에서 살펴볼 때 독특한 유형, 어떤 의미에선 ‘한국적인 유형’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유럽이나 미국의 신문 대부분은 1차적으로 개인적, 상업주의적 동기에서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발행됐습니다. 그에 비해서 서재필의 ‘독립신문’이나 인촌의 ‘동아일보’는 “취리하려 하랴는 게 아닌”(‘독립신문’ 창간 논설의 인용) 비상업적인 동기에서, 1차적으로는 나라의 ‘개화’와 ‘독립’이라는 민족적, 계몽주의적 동기에서 창간됐습니다. 이 사실은 비교 언론학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강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이 어디까지나 개인적 상업주의적 동기에서 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일간신문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에서조차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문과 신문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매우 낮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석학 막스 베버(Max Weber)조차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한 공개 강연(‘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문기자의 존재를 인도의 사성(四姓) 맨 밑에 있는 ‘파리아’(천민) 계급으로 취급하던 현상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한 실정에 비춰본다면 일찍부터 이 나라에선 언론인이 ‘무관의 제왕’ ‘사회의 목탁’으로서 높은 사회적 위신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독립신문’이나 ‘동아일보’의 존재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 정 교수의 발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동아일보 창간의, 그러한 이상주의적인 동기에 못지않게 그를 위한 현실주의적 전제가 되는 신문사 운영의 안정을 위해 한국 최초의 신문 기업 CEO, 인촌의 탁월한 경영수완과 인재관리능력을 부각했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사.
전란이 잦았던 유럽 대륙에선 70년 고희(古稀)의 수(壽)를 누린 신문조차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고, 프랑스에도 ‘르 피가로’ 한 개의 예외를 빼고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언론 산업에서 시대를 ‘살아남는다(survival)’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론기업에선 장수했다는 것이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돼야 할 하나의 가치며 성취라 하는 것이 이해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와 관련해 ‘경성방직과 창업자 김성수의 경제사적 의의’를 발표하신 이영훈 교수의 논문은 의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외세의 식민지 시기에 이 땅에서 최초의 근대적 기업을 창업한 전북 고창 김씨가에 관해서 그동안 조기준, 김용섭, 에커트, 주익종 등으로 변천해온 기업가사(史)적 평가의 소개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경성방직을 한국 근현대에 있어 구래(舊來) 양반 지주층이 중심이 된 반봉건적 예속적 자본주의의 길을 대변했다고 본다든지,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의 ‘꼬붕(子分)’에 불과했다든지, 김성수를 ‘제국의 후예’로 본다든지 등 여러 가지 부정적 폄훼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형제가 전통경제에서 근대적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선구적으로 인도한 ‘대군의 척후’로 20세기 한국 문명사에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발표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간디와의 교감 통해 ‘민족문화 되찾기 운동’ 적극 펼쳐
● 백완기 학술원 회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생애를 반일(反日)과 항일(抗日)로 한정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상정한 키워드는 독립과 공존적 상생입니다. 인촌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9년 경성방직을 세운 뒤인 1920년대 초부터는 확고히 자주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항일과 독립은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독립이라고 할 때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민족산업을 일으켜 세우는 노력이나 언론의 생존을 위한 광고 유치 같은 대목을 상당부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일로 보면 인촌의 행적이나 사상 면에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독립으로 인촌의 정신을 조명하겠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인촌의 정신은 반일이나 항일보다는 근대화에 초점을 맞춰보면 많은 것이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촌은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들면 국내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고 미국에서는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지, 반일이나 항일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여행을 할 때 아일랜드의 독립투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인사는 무장투쟁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무력 중심의 항일투쟁은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였고, 또 인촌은 무력투쟁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누구와 싸우고 대립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대부 격인 인도의 간디에게 인촌은 직접 편지를 씁니다. 독립운동을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간디가 보낸 답장은 ‘조선은 조선인다운 행동을 하라(Korea will come to her own)’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다운 혼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라는 간디의 답장을 받고 인촌은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민족유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간디의 답장은 항일운동보다는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 데 큰 자극을 준 것입니다. 결국 교육으로 사람을 키우고 경방으로 산업을 키우고 언론으로 계몽과 문화 창달에 역점을 둔 것이 인촌의 독립사상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인촌은 독립을 위해 힘의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촌이 말하는 힘은 정신적, 도덕적인 힘이 아닌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유형의 힘입니다. 교육과 산업, 그리고 언론 등 형체를 가진 것으로 힘을 키우려 한 것입니다. 손병희, 안창호 선생 등과 같은 입장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는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복잡한 부분입니다. 인촌의 인생역정을 추적해보니 인촌을 인간적으로 괴롭게 했던 사람이 4명 있었습니다. 첫째가 경성방직의 이강현입니다. 인촌은 그로 인해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다음이 편집국장을 하다가 떠난 춘원 이광수입니다. 해방 후에는 해공 신익희와의 관계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과의 관계는 종국에는 해피엔드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와는 생전에 오해를 풀지 못하고 인촌이 눈을 감았습니다.
간디가 보내온 편지.
또 한 가지 인촌이 남긴 족적 중 중요한 것은 정당정치에 남긴 유산입니다. 인촌은 1948년 정부 수립에서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고 야당이 되었습니다. 인촌이 이 박사와 다른 편에 선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박사 밑에서 국무총리를 하여 같은 여당이었다면 인촌의 행보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촌은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 최고위원이 됐습니다. 당시 야당은 인기가 별로 없어 의석이 적었지만 인촌이란 거물이 있어 야당정신이 심어졌습니다. 인촌이 야당의 길을 갔기 때문에 올바른 야당의 체질,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야당의 싹이 그때부터 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죽산 조봉암과의 관계에도 언급할 대목이 있습니다. 인촌이 5년만 더 살았어도 조봉암이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촌이 범야권 세력을 결집하려고 했을 때 조봉암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인촌은 조봉암을 범야권 세력 결집에 포함시키려고 했고 장택상은 죽산 영입에 찬성했습니다. 조봉암을 비토한 세력은 한민당이었습니다. 인촌이 만들어낸 자기 세력이 죽산을 거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촌은 조병옥, 신익희를 설득해 죽산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장면 계열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던 상황에서 1955년 인촌이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인촌이 살아 있었다면 장면을 설득할 수 있었고 조봉암도 범야권 통합에 참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봉암은 1959년 간첩죄로 사형을 당하는데 아마 인촌이 5년만 더 살았어도 조봉암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인촌은 쓴 소리를 해야 할 때 총대를 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 중장이 미군정 사령관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을 때 좌·우익의 여러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얘기가 달라지니까 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인촌이 그걸 보고 그냥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당시는 감히 하지에게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었고, 또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촌은 통역으로 장덕수를 대동해서 하지를 찾아가 “당신은 만날 때마다 말이 달라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하지 역시 큰사람이었습니다. 인촌의 용기 있고 담대한 모습을 보고 존경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는 인촌의 생일에 꽃을 보냈고 행사 때마다 화환을 보냈습니다. 인촌은 이처럼 꼭 필요할 때 싫은 소리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촌은 당시 한국에서 영어를 썩 잘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인촌은 중앙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했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경제를 가르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어교사를 했다는 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인촌은 세계일주를 한 바 있는데 주로 영국에 체류하면서 영어공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유엔총회 결의안과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국무총리를 지낸 백두진의 회고입니다. 어느 날 백두진에게 이군혁이라는 젊은 학생이 영어로 된 문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유엔총회에 보내는 결의안을 영어로 작성한 문서였습니다. 그 문서를 보니 영어실력도 월등하고 내용도 좋았습니다. 놀라서 이걸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인촌이 초안을 만들고 장덕수 선생이 손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그대로 유엔총회에 제출되었고, 유엔총회 결의안으로 채택된 내용도 인촌이 만든 안과 똑같았습니다. 내용은 남한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모든 것을 갖춘 인촌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고뇌하는 삶을 살았고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일제 말기 귀족원 의원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온갖 지혜를 짜내 거절한 사람이 인촌입니다. 자신이 지지한 이승만 박사가 훌륭한 대통령이 될 줄 알았지만 말년에 독재로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화병을 얻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인촌의 인생역정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명철보신(明哲保身)하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생의 길을 갈 수도 있었으나 그의 인생은 고난으로 점철됐는데 그것은 민족의 독립과 부강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깐 거인이었습니다.
민족교육, 민족산업, 민족언론으로 국권 회복 모색
● 신용하 울산대 석좌교수
인촌은 청소년 시절에 애국계몽운동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평생을 애국계몽운동의 노선을 잘 지켰습니다. 구한말 애국자들의 애국계몽운동 노선은, 국내에서는 교육과 산업에 힘쓰면서 인재를 양성하여 민족의 실력을 쌓고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국외에서는 독립군을 비롯해 격렬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가 세계 정세가 변하는 적절한 시기가 오면 기회를 포착해 내외가 힘을 합쳐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 독립운동의 전략이었습니다.
인촌은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에 교육과 산업에 치중해 활동했는데 중앙학교나 보성전문학교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이나 경성방직을 세운 때의 활동은 전부가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회복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컨대 안중근 의사처럼 격렬한 독립운동을 한 분도 1910년 순국하실 때 마지막 유언으로 동포들에게 “나는 우리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외국에서 가지만 국내에 남아있는 동포들은 교육과 산업에 힘써서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하는 날이 오면 아무런 여한이 없이 나는 기꺼이 눈감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교육과 산업은 독립운동, 국권회복운동의 일부로서 아주 중시됐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3·1운동 이후에 이 두 가지 일 외에 또 하나 성공한 것이 동아일보를 창간한 언론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독립군 관련 글을 쓰면서 자료를 많이 찾아보았습니만 거의 동아일보만이 만주나 노령(露嶺)에서의 독립군 활동을 상세히 조사해 보도했습니다. 또 애국자,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했을 때도 동아일보의 지면이 이런 일을 가장 크고 귀중하게 실었습니다. 아마 동아일보가 없었다면 일제강점기는 캄캄한 칠흑이었을 것입니다. 그 칠흑 속에서 동아일보라고 하는 등대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민족적 기여를 크게 했다고 봅니다.
인촌이 이런 활동을 통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증거는 1940년 동아일보의 폐간, 이전의 여러 번의 정간, 그리고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탄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 가운데서 국내 활동은 반드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잘 인식돼 있었습니다. 국외의 독립운동 활동을 기준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 민족운동 등을 같은 척도로 측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입니다. 인촌은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성전문과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 봅니다. 국내에서는 민족운동을 할 때 티끌도 묻고 먼지도 묻고 하는 일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것으로는 인촌이 남긴 큰 업적, 교육에서 남긴 업적, 즉 민족 언론에서 남긴 업적, 그리고 민족기업의 업적 등을 놓고 볼 때 그 먼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방 직후 해외에서 활동하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해서 인촌을 두고 누구도 친일 어쩌고 논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건 좌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면 건준(建準)이 처음에는 민주공화국을 만들려고 하다가 박헌영 등에 의해서 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그때 친일의 요소만 있어도 접근하지 못하던 시절에, 좌파는 인촌을 교육부 장관으로 모시려고 했고, 우파는 부통령이나 국무총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덕규 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대통령 혼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촌을 비롯한 거대한 세력의 기초 위에서 수립된 것이기 때문에 진덕규 교수가 인촌을 대한민국 건국의 ‘최대 주주’라고 표현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야당의 뿌리 만든 인촌의 유산 부각돼야
● 김중순 고려사이버대 총장
경성방직.
이 학술대회의 발표논문은 인촌이 한국 사회를 위해 여러 분야, 특히 정치, 교육, 언론, 그리고 기업경영 등에서 이룩한 공헌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주제 발표는 ‘재조명(reillumination)’이라기보다는 ‘재확인(reaffirmation)’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인촌은 온건한 민족주의자 즉 문화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다이내믹한 투사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의 고위관리를 저격하고 폭탄을 투척하는 것 같은 운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체포 구금됨으로써 지속성을 잃는 반면, 인촌의 투쟁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임팩트를 주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촌이 설립한 교육기관과 언론기관은 오늘 논문을 발표한 정진석 교수의 말과 같이 ‘민족진영의 집결처’였고, 인촌은 ‘민족적 인재의 최대 보존자’(진덕규 교수)라고 할 수 있으며, ‘최고의 지성을 모신 분’(한용진 교수)이라는 표현도 맞습니다.
이런 인재의 확보나 유지 그리고 유치는 사단병력의 군대를 확보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베트남의 호치민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과 극단적인 전쟁을 하는 와중에서도 호치민은 뛰어난 인재를 징집하여 전투에 투입하는 대신 외국 유학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그 프로그램의 수혜자인 하노이 국립대학교 총장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베트남 학자들은 교수 연봉이 박봉이더라도 불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동료, 친척, 친구들이 사지에서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은 안전한 외국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촌이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을 보호하려 한 의지는 애국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인촌의 유산과 영향력이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연구와 고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첫째가 교육에서의 유산입니다. 보성전문 출신인 김성곤씨가 국민대를 설립한 것은 인촌을 흠모하여 그를 모방한 것이고, 인촌의 장손이 고려사이버대학을 설립한 것도 인촌의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인쇄매체 중심에서 전자매체로 전환한 것입니다. 1963년 동아방송이 탄생했고, 2011년에는 동아일보에서 종합방송 채널 A가 출현합니다. 셋째는 정치면에서 야당의 등장과, 진보나 보수에 관계없는 노선입니다.
넷째는 경제면에서의 영향력입니다. 한국 근대 기업의 역사는 인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기초시설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의 산업 부흥이 인촌에서 시작되었다는 부분을 젊은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성방직은 확고한 사업의지, 탄탄한 재무구조, 자질 면에서 최고의 경영진, 선진기술을 제대로 학습한 인력, 정부에 대한 교섭능력, 선전능력 등이 바탕이 되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인촌과 수당 김연수의 초기 기업 성공 유산이 현재의 한국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전수되고 있는지 등의 연구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고립된 역사적인 사실을 현대의 잣대로 재어본들 무엇을 하자는 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촌이 있었던 한국은 분명 인촌이 없는 한국보다 한국의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옛 소련 문서와 김일성 문서로 입증된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 지지의 타당성
●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또는 해방공간 3년에 대해 아직도 논란과 시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인촌과 동아일보에 대해 가해지는 공격들이 있습니다. 그 공격의 핵심은 인촌과 동아일보가 분단체제 성립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사실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의 문서는 지금까지도 전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이 공개돼 있고, 특히 1990년대 이후 소련이 북한에 대해, 그리고 남한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꽤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면 해방공간에서 김일성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아주 적은 양만 공개돼 있었는데 지금은 해방 3년 동안 김일성의 발언 및 저술 등이 꽤 많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해방 3년을 얘기할 때, 특히 당시 인촌이 걸었던 노선과 동아일보가 걸었던 노선에 대해서는 소련의 문서와 김일성의 문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객관적이고 공평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세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몽양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인촌 쪽에도 제휴를 요청했는데 이를 거절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 좌우가 손을 잡고 새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인촌이 이를 거절함으로써 분단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좌파의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전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문서들이 소련 문서, 김일성 문서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중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김일성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몽양이 세웠다는 조선인민공화국에는 절대 참여할 수 없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골방에서 몇 사람이 만들어낸 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 조선인민공화국을 좌우가 힘을 합쳐 세웠고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 남북대화를 했더라면 한반도의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는 가설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또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이 있었으므로 저는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작은 조직에서도 이사회를 소집할 때는 이사들에게 미리 통보합니다. 일주일 또는 열흘 전에 통보하는 식으로 정해진 법정시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울 때는 한 나라를 세운다고 하면서도 사전에 아무런 통보가 없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울 회의를 언제 열 것인지, 의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통보나 발표가 전혀 없이 갑자기 수립되었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공화국은 처음부터 가공의 조직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당시 우리가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랬다면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제1항에 나와 있는 대로 이른바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이것이 수립되었다면 남북분단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한민당과 동아일보가 주축이 돼 반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소련의 문서나 다른 문서들을 볼 때 성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에 미국을 대표해 참석했던 외무부 장관이 제임스 번스였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을 상당히 우습게 알았습니다. 트루먼을 경시해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회담에 미국 대표단 실무진으로 참석했던 조지 케난이라는 유명한 국제정치학자가 쓴 회고록을 보면 제임스 번스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시 회담에서 성과를 내려는 일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소련의 전략에 말려들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은 말 그대로 소련 의도가 반영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모든 것을 미국과 소련이 결정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 아닙니까. 즉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통해 비토권을 확보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결정하게 돼 있었으므로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나 열리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탁통치라고 얘기하지만 러시아어로는 오뾰까(후견)라고 돼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 문제에도 합의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에 영어로는 Trusteeship(신탁통치), 러시아어로는 오뾰까(후견)로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핵심적인 용어에도 합의하지 못한 문서가 어떻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 제임스 번스가 귀국했을 때 트루먼이 제임스 번스를 불러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이게 말이 되느냐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이런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비판한 동아일보는 정당했고 그 결정문을 따를 수 없다며 반탁(反託)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촌도 정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를 따랐다면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는, 오늘날까지 일부에서 내려오는 주장은 철저히 반박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북한은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을 실시합니다. 이것이 당시 남한 사회에 미친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에서는 북한은 토지개혁을 앞장서서 했는데 남한에서는 지주세력이 중심이 되어 토지개혁을 지연시켰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백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당시 “이제 땅은 영원히 농민의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연설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부터 북한은 농민의 집단화 정책을 써서 농민들로부터 모든 땅을 빼앗아 집단농장을 세우고 농민을 전부 그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북한에서 농업이 망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에서 먼저 토지개혁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1951년 5월29일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에서 신임 부통령으로 인사하고 있는 인촌.
그렇다면 1948년 4~5월의 남북연석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느냐 하면, 당시 소련 문서를 보면 소련이 김일성에게 지시한 겁니다. 소련이 남북회담을 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해 김일성이 제의한 겁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이른바 남북회담이 열릴 때 북한이 소련에 매일 물어봅니다. 당시 북한의 최고 실권자가 스티코프였고 스티코프 바로 밑에 있는 사람이 레베데프였습니다. 이 스티코프의 일기장과 레베데프의 회고록도 공개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보면 소련이 참 지독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모스크바에 보고하고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대처하라는 회답이 오면 그대로 진행한 것이 당시 북한에서 열린 남북회담의 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반대한 것은 당연했고, 그랬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3년 동안 회담을 통해 남북에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김일성은 늘 “이제 북풍이 내려간다. 북풍이 내려가면 이제 남조선은 다 무너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말한 ‘우리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남북대화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반부에서의 성취를 남반부까지 확장하자는 것이 당시 김일성의 구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것을 반대하지 않고 방치했다면 대한민국의 성립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따라서 그 어려운 국내외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을 위해 힘썼던 인촌과 인촌이 이끌던 한민당, 그리고 동아일보의 역할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한글 맞춤법 연구지원 등 사회교육 통한 민족계몽
● 정영수 인하대 부총장
보성전문학교.
당시 애국계몽 사상가들의 교육적 주장 속에 평등의 이념에 의거하여 국민 각자의 자각을 꾀함으로써 조속히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 대내적 측면의 민족교육이라고 한다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우리의 것을 가꾸고 지키고자 하였던 것은 대외적 측면의 민족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촌은 민족주의 정신에 기초하여 교육을 통해 민중의 의식을 계몽하고 자주독립의 계기를 만들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인촌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이 학교 숙직실에서 3·1독립운동의 준비를 도모한 것, 중앙학교의 입학생을 한국인에 국한한 것, 보성전문학교의 본관과 도서관 건물을 신축하면서 굳이 한국인 설계자에게 일을 맡긴 것, 민족자본의 형성을 위하여 경성방직을 창설하고 직원을 한국인으로 제한하였으며 주식공모를 통해 민족자본의 형성을 도모한 점, 민족의 의식을 대변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하여 동아일보와 월간지 ‘신동아’ 및 ‘신가정’을 창간한 것,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을 통한 문맹타파운동 전개 등은 모두 인촌의 문화민족주의 사상이 실천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국계몽사상과 문화민족주의사상에 기반을 둔 실천가였던 인촌의 활동과, 인촌의 직접적인 활동은 아니지만 그가 설립하거나 지원했던 사업들이 간접적으로 한국교육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브나로드 운동의 전개입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전개되었던 문맹타파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서 기존의 제도권 교육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교육 프로그램이요, 성인교육이었다고 평가됩니다. 학교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언론사가 주도한 문맹타파운동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사회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성인교육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맞춤법 통일안의 채택입니다. 인촌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속적으로 이 연구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하고, 통일안이 공표되기 전에 동아일보의 활자를 모두 새 맞춤법 통일안에 맞게 바꿈으로써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문맹을 타파하고 민중의 독립의식을 고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 월간지 ‘신동아’와 ‘신가정’의 창간입니다. 동아일보사는 자매지로 1931년 11월 신동아를 창간하고, 1933년 1월에는 여성 월간지 신가정을 창간했습니다. 이 월간지들은 문화와 시사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하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생활의식과 교양을 높이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신가정의 창간은 당시 교육의 기회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 및 국제사회에서 상호 간의 효과적 의사소통과 결속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는 데 기여했습니다.
넷째, 전문경영인 체제의 도입입니다. 인촌은 인재기용에 탁월한 경영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창설한 사업은 항상 이를 경영할 수 있는 적격자에게 맡겼습니다. 오늘날 기업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라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인촌의 행동은 무척 선구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중앙학교의 경우 그는 학교를 인수한 후 유근에게 교장을, 안재홍에게 학감을 각각 맡겼고, 경성방직의 경우는 이강현·박용희 등 뛰어난 인재들에게 맡겼으며, 동아일보는 송진우·장덕수 등에게 맡겼습니다. 물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은 박영효였으나, 이는 설립 인가 과정에서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과 친분이 많은 개화파 지식인 박영효를 명목상의 사장으로 잠시 내세웠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학교의 교장직과 동아일보의 사장직을 인촌 자신이 잠시 맡은 적은 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맡은 것일 뿐입니다. 다만 보성전문학교만은 1932년 인수 이후 잠깐의 공백을 빼고 1946년까지 자신이 직접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학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일으킨 사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인촌의 결정에서 우리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정치인으로서의 민주시민교육입니다. 해방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 변신한 인촌은 1951년 이시영의 후임으로 제2대 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정계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대중연설을 통하여 민주사회의 국민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사회교육으로서의 민주시민교육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1952년 5월에 부통령직을 사임한 이후 1952년 6월20일에 열린 ‘호헌구국대회’의 선언서에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독재정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를 인용함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가 지난 4년 동안 민의를 무시하고 민권을 유린한 것이 그 얼마였으며, 국리민복을 위하여 건설적인 사업을 한 것이 그 무엇입니까. 그는 오직 그 전제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애국적인 민주세력을 분열 약화시키려는 간악한 분열통치 책략에만 몰두하여왔고, 국민의 기본적 자유 인권을 박탈하고 언론을 탄압하며 국군을 사병화하여 그의 이기적인 목적에 구사하려고 하고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부문에 걸쳐 졸렬하고 무능한 시책으로써 파괴일로를 걸어왔으며, 근로대중의 정당한 요구를 흉학(凶虐)한 통갈과 위협으로써 압살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여기에 있어서 자유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들 한국 국민은 분연히 궐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도괴(倒壞)와 민족의 멸망을 이 이상 더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한국 국민은 일치 결속해서 이 독재와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반역적이고 망국적인 독재자를 타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국운을 만회하여 순국의 영령을 위로하고 우리들 자신과 평화와 번영을 영원히 향유하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촌의 ‘실력양성주의적 민족주의’ 제자리 찾아주자
●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
경성방직 연구사를 되돌아본 이영훈 교수의 발표 논문은, 한국근현대사학계에서 인촌 김성수와 그 동생 수당 김연수의 실력양성활동(경성방직, 동아일보, 보성전문 운영 등)이 근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함을 잘 보여줍니다. 이 교수가 정리한 바에 의하면, 인촌과 수당을 근대적 기업가로 적극 평가한 오래전 조기준의 민족기업론은 역사학계에서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반면, 민족주의 역사학에 입각한 김용섭의 예속자본론이 실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는데도 국내 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예속자본론과 동일한 결론에 이른 에커트의 ‘제국의 후예’론이 미국 학계의 대표적 연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에 이 교수는 경성방직을 한국 최초의 근대기업으로서 적극 평가한 저의 ‘후발학습자’론에 주목하면서, 20세기 한국의 근대화에서 인촌이 아널드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의 선도 역할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저는 이 교수의 발표논문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기준의 선구적 견해가 학계에서 제대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는 것, 에커트가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한다고 했지만 실상 그의 본래 의도가 민족주의 역사학과 같았고 그래서 같은 결론이 나왔다는 것, 인촌과 수당을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의 ‘창조적 소수’로 보자는 것 등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중 에커트의 본래 의도가 민족주의 역사학과 같았다는 이 교수의 논문은 에커트가 식민지근대화론자로서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자와 대립한다고 보는 통상의 평과는 다릅니다. 이에 저는 에커트가 왜 민족주의 역사학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그의 본래 의도가 민족주의 역사학과 같았는지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잘 알다시피 식민지근대화론은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화 이전의 한국은 내부 동력으로 발전해왔는데,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가 이 내재적 발전을 압살했으며, 식민지하의 억압과 수탈로 인해 한국 사회는 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는 견해로서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적 견해입니다. 이를 비판하고 나선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 근대화의 기동력이 외부인 제국주의에서 왔고,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한국이 자본주의 근대화를 겪었으며, 이것이 현대 한국 자본주의로 계승되었다고 봅니다. 즉 발전한 현대 한국 경제의 직접적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기에서 찾는 것입니다.
인촌 선생의 장례식.
에커트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논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가 없었으면 한국에서 일어났을, 그러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 곧 한국 전통사회의 자본주의적 변혁, 그것이 해방 후까지 이어지는 장기지속의 역사를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제국의 후예’는 이 자본주의적 변혁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커트는 민족주의사학의 예속자본론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저는 그가 일제하 한국인의 근대 학습과 적응을 제국주의와의 결탁, 유착, 의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책 ‘제국의 후예’ 곳곳에서 그는 경성방직과 그 경영진이 일제 총독부 당국 및 일본 자본의 큰 도움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인촌과 수당이 결국은 민족주의를 버렸으며 경성방직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일원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인촌과 수당의 활동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 경멸감까지 표출합니다. 경성방직이 사사(社史)에서 민족기업을 자처하는 데 대해서 ‘위선의 가면’ ‘자기기만’이라고 비꼬거나, 인촌을 필두로 한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해방공간에서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혁명으로 청산될 터였지만 미국의 개입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는 기술 등이 그것입니다.
에커트가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그와 동일한 결론에 이른 것은 에커트의 자기모순이요 논리파탄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가 역사 서술이라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의 영역에 과도한 감정적 판단을 개입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봅니다. 사회과학이나 역사 연구자가 연구 대상에 대해 지나친 애착이나 증오의 감정을 품고 연구를 진행한다면, 연구 대상을 제대로 구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에커트가 이 감정 때문에 논리적 일관성을 잃고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점은 에커트만이 아니라 한국사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재적 발전론이 아직도 학계를 지배하는 것 역시 역사 연구자들의 감정, 정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실상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적 사실의 구명에서나 그 시사점, 다시 말해 현실 설명력과 전망에서나 존립 근거를 잃었습니다. 전통시대 자본주의 맹아는 실증되지 않으며 일본제국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한국인 중소상공업을 궤멸한 것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반면 대외개방체제 아래서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학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까. 저는 이 역시 감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 시대의 젊은 한국사 연구자들은 온 민족이 수난을 겪은 식민지 시대에 김씨가(家)가 기업가, 교육·언론가로서 ‘승승장구’한 것을 감정적으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현 한국사학계의 중심 연구자들은 1970,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의 학생들이 ‘매판세력’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에 대해 부채의식, 미안한 감정을 품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한국 현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그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인촌과 같은 실력양성주의 입장의 민족주의자들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줄 것인가’가 현재 역사 연구자에게 던져진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논리 면에서는 후발자본주의 발전과정에 대해 좀더 정치(精緻)하고 확고한 이론화가 필요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내재적 발전론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선진국 캐치업 과정도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현 역사인식의 근저에 정서와 감정의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 정서면에서의 접근도 필요합니다. 민족 수난기에 인촌이나 수당과 같은 민족주의자, 지주와 기업가들도 역시 큰 헌신, 희생, 봉사를 했다는 것을 적극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인이 김구의 삶에 감동하는 것처럼, 이승만과 김성수의 삶에도 감동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독립운동 기사 최다 보도해 독립의 희망과 항일 피력
● 이옥순 인도문화연구소장
오늘날 동아일보에서 인도 뉴스가 1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거나 사설의 주제가 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정치지도자의 유고가 있기 전에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겠지요. 서양에 동화하고 서양을 추종하는 20세기 후반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반영한 이러한 입장에는 인도와 같은 동양의 후진국과 동일시되거나 발전한 서양과 차별화될 것에 대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저는 일제강점기의 언론들이 인도에 관해 상당히 많은 기사를 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 인도에 관한 기사를 가장 많이 게재한 언론은 동아일보였습니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해에 인도에서는 간디가 주도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민족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이틀에 한 번, 인도에서 운동이 절정을 이룬 때에는 거의 매일 인도 관련 기사를 다뤘습니다. 1921년에만 이미 150건을 상회하는 인도 관련 보도기사를 실었고, 이후에도 변화무쌍한 인도의 정치상황을 빈번하게 소개했습니다. 인도에 대한 동아일보의 주된 관심은 인도의 반영(反英)투쟁과 그 운동을 이끄는 정치지도자 간디에게 향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제하의 암울한 현실과 엄격한 언론통제하에서 인도 독립운동과 간디의 움직임에 대한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직접 언급할 수 없고 당장 이룰 수 없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꿈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높은 관심은 인도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대규모 불복종운동이 이어진 1930, 31년에도 비슷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간디의 ‘소금행진(Salt March)’과 이어진 간디-어윈 총독회담, 인도-영국의 원탁회의를 거의 매일 보도했습니다. 특히 1932년 1월5일자 동아일보는 ‘재연되는 인도의 반영운동’이라는 사설과 ‘최후통첩을 한 간디씨 3일 밤 체포’라는 가장 큰 제호의 기사를 포함하여 ‘반영투쟁은 금후 수년간 계속’ 등 1면 기사의 절반 이상을 영국의 식민통치에 불복종하는 인도의 정치운동으로 채웠습니다.
사건보도를 넘어서 인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진한 신문사설과 논평기사도 많았습니다. 이 시기 동아일보에 실린 인도에 관한 사설은 27건으로 적지 않은 분량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인도에 가졌던 각별한 관심을 잘 말해줍니다. 사설 제목을 살펴보면, 인도에 대한 당시 동아일보의 관심이 자치운동과 반영운동, 그 지도자인 간디 등 정치상황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도에서 간디의 활동과 전국적인 규모의 반영운동이 없었던 1923년부터 29년까지 동아일보는 지속적으로 인도에 관한 사설을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는 인도에 관한 기획기사도 많이 실었습니다. 주로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인도의 상황과 민족주의운동을 다루었는데, 그 정치적 의도는 제목만 봐도 잘 드러납니다. 1920년 14회 연재된 ‘대영과 인도’, 1921년부터 6회에 걸쳐 연재된 ‘문제의 인도’, 1925년 10회로 게재된 ‘이민족 치하에 신음하는 인도’, 1929년 8회에 걸쳐 실린 ‘인도의 민족운동, 영국 통치책과 인도의 현상’, 1930년 6회 연재된 ‘대영제국의 암(癌) 인도, 어디로’, 1931년 9회 연재된 ‘인도 독립운동’이 그렇습니다.
이 시대 동아일보가 인도의 정치변화에 주목한 것은 식민지 조선의 입장과 연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6년 동아일보의 사설 ‘인도 3억 민중을 생각하면서’는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기탄잘리의 시구와 함께 인생과 우주의 혼연융합하는 태도를 보인 범(梵)의 행자 타고르의 발흥이 인도인의 자랑이오, 세계의 경이”라면서도 부처님의 인도나 타고르의 인도보다는 “현대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의미가 있고 세계적 주목의 초점이 되는 것은 3억 민중의 사치아그라하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 간디”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의도했던 바를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도에 대한 영국통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조선에서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아일보의 인도 관련 기사들은 인도를 ‘우리’로 인식하고 그들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동일시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2월4일자는 남부지방 어느 공립보통학교의 한 학생이 지리 시간에 “인도는 조선과 같습니까?”라고 식민지로서의 동질적 상황을 염두에 둔 질문을 던졌다가 수업하던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무수한 구타를 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어린 보통학교 학생이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동질성을 인식했다면, 그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인도를 조선과 동일시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둘째는 식민통치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도의 불복종운동, 비협력운동을 거의 매일 보도함으로써 식민통치를 받는 인도인의 독립운동을 당연시하면서 당시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특히 인도 반영운동의 지도자 간디를 ‘우리의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제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동아일보 기사를 거의 모두 읽어봤는데 동아일보는 폭탄을 던지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도 관련 기사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항일과 독립운동을 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가 이 시대 인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제시한 것은 식민지의 절망을 견딜 수 있는, 독립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촌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선생은 유럽으로 가는 도중에 인도에 들러 간디와 회견하고 다른 지도자들과 교유하고 싶다는 글을 남겼고, 그가 인도에 다녀왔다고 적은 다른 필자의 글이 몇 편 남아있으나 선생이 인도에 관해 직접 쓴 글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최근 인촌이 간디에게 보낸 편지가 인도에서 발견됐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자료를 좀 더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인촌이 인도와의 협력과 인도 지도자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꿈꾸고 기대했던 바가 잘 드러날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