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남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면도기가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코와 턱 밑으로 하얀 비누 거품을 잔뜩 발라놓고 날선 칼로 조심조심 수염을 밀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전기 면도기가 흔해져 남자들의 행장 챙기기도 그만큼 빨라졌다. 이 면도기에는 ‘오감’이 담겨야 하는데, 피부에 닿을 때의 촉감은 물론, 소리 냄새 모양 내구성이 모두 좋아야 한다. 수염을 잘 깎는 기능성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손 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면도기에 이런 요소를 압축해 넣는 일은 초정밀 기술을 요구한다. 전기 면도기를 만드는 데 30년 가까운 외길 인생을 바쳐온 조아스전자 오태준 사장(吳泰準·47)이 ‘기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오사장은 국내 면도기 시장을 해외 유명브랜드가 석권하던 70년대 중반, 불모지에 가까운 면도기 시장에 맨주먹으로 뛰어들어 면도기의 완전 국산화를 이뤄낸,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다.
연구만이 살 길
조아스는 해외의 유수 브랜드들이 포진한 국내 면도기 시장에서 30%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는데, 국내보다는 해외 시장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조아스가 만든 전기 면도기와 이발기는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세계 30여 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이 회사의 올해 총매출목표액은 80억 원, 수출목표액은 500만 달러였는데 불황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오사장은 “최근 미국의 콘에어사로부터 면도기 15만 개(230만 달러 상당)를 주문받았는데, 이만한 양을 생산하려면 최소한 3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납기일을 조정해야 할 판”이라며 일손을 걱정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프랑스의 베이비리스사가 여성용 면도기를 대량 주문해 내년 수출물량은 올해보다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했다.
조아스전자는 30여 종에 달하는 전기 면도기를 비롯해 전기 이발기, 드라이기, 공기청정기, 마사지기, 청소기 등을 만들고 있다. 전기 면도기는 월 7만여 개, 이발기는 2만여 개, 드라이기는 1만여 개를 생산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조아스전자는 한적한 산 속에 자리하고 있어 언뜻 보기엔 공장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특히 공장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세가 빼어났는데 그곳이 바로 광릉수목원 뒷산이라고 했다.
오사장이 공장지대 대신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곳의 여건이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는 “20년 역사의 우리가 50∼100년 동안 기술을 축적해온 해외 브랜드를 능가하려면 끝없는 연구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잠을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기록을 해둔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는 이처럼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와 그림들로 빽빽했다. 항상 면도기 생각을 하다 보니 꿈도 자주 꾸는데, 해결책을 못 찾던 일의 실마리가 꿈에서 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면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과 망. 날은 0.07mm 굵기의 가는 수염까지 놓치지 않고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망도 극히 정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1만5000개의 구멍 중 단 한 구멍이 제대로 뚫리지 않아도 수염이 잘리지 않고 뽑혀 나가기 때문에 불량률이 제로여야 한다. 또한 망은 얇고 질겨야 한다. 요즘 나오는 제품의 망 두께는 0.05mm. 더욱이 망은 피부와 직접 닿기 때문에 촉감도 좋아야 한다.
28년 면도기 외길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국산 면도기를 쓰다가 수염이 뽑히면 ‘역시 국산품은 못 쓰겠어’ 하고 제품을 탓하면서, 외제 면도기 쓰다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내가 잘못 써서 그렇겠지’ 하고 자기 탓으로 돌려요. 이런 인식의 장벽을 넘기가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건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날림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고는 뒷수습도 안 하고 돈만 챙겨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짓을 몇십 년 계속하다 보니 지금 제품 만드는 사람들이 그 욕을 다 얻어먹고 있어요. 국산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때까지는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면도기는 날이 움직이는 형태에 따라 회전식, 왕복식, 로터리식으로 나뉜다. 손이 큰 서양인들은 대개 회전식을 찾는 반면 국내 소비자들은 작고 두께가 얇은 왕복식을 선호한다. 회전식은 소음과 진동이 적지만 절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왕복식은 소음과 진동은 많지만 2중 혹은 3중 날로 되어 있어 한 번에 두세 차례씩 수염을 밀고 지나가기 때문에 수염이 잘 깎인다. 로터리식은 진동과 소음이 적고 수염도 잘 깎이지만 구동하는 데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배터리 소모가 크다. 이 모든 단점을 보완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태준 사장의 과제다.
오사장이 면도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심미전자에 입사하면서부터. 당시 심미전자는 일본과 홍콩에서 완구와 전자제품들을 들여와 상품이 될 만한 것을 골라 새로운 형태로 만든 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오씨는 제품 개발과 제조, 조립공정을 두루 배웠다. 면도기도 이때 처음 접했다. 면도기는 다른 제품에 비해 상당히 높은 기술력을 요구해 아무나 손댈 수가 없는데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면도기를 뜯어 연구한 뒤 새로운 제품으로 조립해 만들면서 면도기 제조 기술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그러다 75년에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회사가 문을 닫았다. 회사를 나오게 된 오씨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고교졸업 학력만으로는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다. 면도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될 것 같았지만 갓 스무살을 넘긴 그를 믿고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었다. 심미전자에서 함께 근무했던 부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는 오씨의 기술 정도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남대문시장에서 돈을 투자할 판매상을 수소문했다. 어렵사리 판매상이 나타나자 오사장은 제품 개발을, 부장은 경영을, 판매상은 상품판매를 맡기로 하고 76년 우진공업사를 만들어 처음으로 면도기를 생산했다.
“초기에는 대개 부속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어서 제품이라고 할 만한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물건은 잘 팔려 나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낮에는 물건을 만들고 밤에는 기술을 연구했어요. 그때가 스물두 살 때였는데, 그 후 서른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사흘에 한 번꼴로 밤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진공업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업멤버들 사이에 의견차가 컸기 때문이다. “갈라지면 다 끝난다”고 버티던 오사장도 결국 사장과 뜻이 맞지 않아 79년에 회사를 나왔다. 그는 면도기 사업에선 손을 떼겠다고 마음먹고 ‘제2의 고향’인 남양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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