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미국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네이션즈뱅크를 합병, 미국 최다인 4500여 개의 지점망과 6720억달러의 자산, 14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 은행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BOA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경제가 흔들리고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부실대출 비중이 늘어났다.
특히 거액을 대출해준 PG&E, SCE 등 캘리포니아주의 전력회사들이 도산위기에 몰리면서 채권회수가 어려워졌고, 지난해 4/4분기 매출은 26.8% 격감했다. 올해 초에는 BOA가 유럽 선물시장 등 투기성이 강한 해외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했다가 거액의 손실을 봤고, 향후 회수불능 여신이 급증하리라는 소문이 증권가에 퍼지면서 주식거래가 정지되는 사태를 빚었다. 넘쳐나는 수신고를 방만하게 운용한 결과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BOA의 부실여신 증가가 1998년 도산한 헤지펀드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경우처럼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PG&E와 SCE가 국유화로 가닥이 잡히면서 이들에게 빌려준 돈은 부실화 위험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해외 파생금융상품 투자 손실분이 드러나면 파산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경제여건이 받쳐주지 않을 때는 ‘은행 대형화=경쟁력 제고’의 논리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G-10은 올해 내놓은 금융분야 합병에 대한 보고서에서 “대형 은행은 해당 은행의 건전성 파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은행 부실시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특성상 워크아웃도 어려워 시스템 리스크를 증대시킨다”고 경고했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경상학부)는 “도매금융, 국제금융을 주로 하는 은행간의 대형화는 어느 정도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국민·주택은행은 가계금융과 중소기업 금융 위주의 소매은행인데다 합병 후에도 소매금융에 주력할 것이므로 두 은행의 대형화는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소매금융 비중은 각각 81.0%, 92.9%. 두 은행은 합병 양해각서에서 앞으로도 소매금융 위주로 영업활동을 할 것임을 확인했고, 양행의 외국인 대주주인 골드만삭스와 ING베어링도 이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찬근 교수는 “외국의 은행 대형화는 업역(業域)과 영업지역, 고객기반을 달리하는 은행끼리 손잡고 시장을 넓히거나 외국자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혹은 높은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자본베이스를 키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국민·주택 합병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며 합병의 시너지효과를 의심했다.
예를 들어 지역은행인 뱅크원과 대도시 은행인 퍼스트 시카고, 미국 동부에 기반을 둔 네이션즈뱅크와 서부 중심의 BOA는 영업지역과 고객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합병했고, 상업은행인 씨티코프와 보험 증권 자산관리 투자은행 기능에 강한 트래블러스 그룹의 합병은 업역확대와 겸업화에 목적을 둔 경우다. 또한 일본 은행들이 지주회사형 합병을 시도한 것은 외국자본을 견제하려는 측면이 강하고, 체이스 맨해튼과 JP모건은 위험감당(risk taking) 능력을 키우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규모의 경제’ 의문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이하 합추위)는 “개인 및 중소기업 금융 등 소매금융을 기반으로 대기업 금융, 국제금융, 자본시장 업무 등에서의 ‘선택과 집중’으로 비교우위 분야를 개척한다”는 ‘기본전략’을 제시했다. 이찬근 교수는 이런 전략의 현실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두 은행의 주력분야인 가계대출 시장은 씨티그룹, 홍콩상하이은행 등의 외국 은행과 외국자본이 인수한 제일은행이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국민·주택은행은 그간 소매금융에 치중해온데다, 합병은행의 대주주인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에 대한 대출을 꺼릴 것이 분명해 기업금융을 확대하기도 어렵다. 합병은행은 국제 비즈니스 경험이 일천하고 영어소통능력과 리스크 관리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국제금융에 진출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또한 전문성이 높은 외환딜링이나 M&A 분야는 외국계 지점들이 석권하고 있으며, 채권딜링은 규제 때문에 진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유휴자금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위험하니 160조원이 넘는 거대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만한 대상을 찾기 어렵다.”
합병은행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 비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산업대 조복현 교수(경제학과)가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은행합병 사례를 조사한 결과 자산규모가 250억달러(약 32조원)를 넘어서면 비용 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나타내는 은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국민·주택은행의 총자산은 그 다섯 배에 달한다.
설령 규모의 경제가 발생한다 해도 점포망의 확대에 따라 수신기반이 늘어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자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주택은행은 업역과 고객기반이 거의 같은데다 두 은행 지점이 1000개를 넘고 그중의 3분의 2가 500m 거리 안에 있다. 따라서 합병 후 점포망을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해야 할 처지여서 이자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중복점포의 폐쇄나 인력감축을 통해 비이자 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도 있지만, 이는 대개 중소형 은행끼리 합병할 경우에 나타나는 효과다. 1999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판매비 및 일반관리비 비중은 각각 영업비용의 11.9%와 18.5%에 불과하다. 영업비용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도 국민은행이 7.8%, 주택은행이 12.4%밖에 되지 않아 이 부문에서도 비용절감 효과가 크지 않다.
결국 두 은행은 각각 86.8%와 80.5%를 차지하는 이자비용과 기타 영업비용을 절감해야 비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데, 이는 해외 사례에서 보듯 단순히 규모만 불린다고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국민·주택은행측도 합병선언 이전까지는 두 은행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효과가 없다고 봤다. 국민은행 김상훈 행장은 “우리 은행은 주택은행과 업무영역이 비슷해 합병 시너지효과가 없는데다 인력을 줄여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주택은행과의 합병은 규모의 경제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업무의 중복성 등으로 범위의 경제는 기대할 수 없다”고 못박은 바 있다.
주택은행 김정태 행장도 “두 은행의 합병이 이상적일지 모르나 사업구조를 보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비슷한 규모의 우량 선도은행이 합병에 성공한 예는 외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국민은행과의 합병은 점포위치나 대상고객이 중복돼 시너지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합병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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