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대 SM5.
르노삼성자동차는 SM5 단 한 대였다. 그것도 1990년 중반 모델. 권총, 장총, 대포까지 갖춘 상대와 가스총 하나 들고 맞서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시쳇말로 ‘뽀대’가 자동차를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 한국 소비자. 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르노삼성이 믿는 것은 ‘사실상 수입차’인 SM5의 품질뿐이었다. 하지만 3,4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는 소비자에게 ‘10년을 타도 끄떡없는 차’라는 사실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르노삼성은 고민 끝에 택시기사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하루 10~12시간 운전해야 하고 소모품 교체나 정비 등으로 차를 세울 때마다 수익에 타격을 받는 택시기사. 이들에게 잔 고장 없고 소모품 교체주기가 길며, 바꾸지 않고 오래 탈 수 있는 차량은 곧 생계 수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당시 SM5는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르면 8만㎞, 늦어도 10만㎞에서 꼭 교환해야 하는 ‘타이밍벨트’. 그때만 해도 자동차 대부분이 고무 재질로 된 타이밍 벨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무 재질 타이밍벨트는 제때 교환하지 않으면 끊어질 우려가 있었다. 만약 주행 중에 이게 끊어지면 차가 그 자리에서 서고 견인차를 불러야 한다. 제때 교환하려고 해도 엔진을 내리고 작업을 해야 하는 대공사이기 때문에 반나절 정도 차를 정비소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SM5는 타이밍 ‘벨트’ 대신 금속 재질의 타이밍 ‘체인’을 장착했다. 타이밍 체인은 교환할 필요가 없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택시기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경쟁업체 영업사원들은 “빠르게 회전 하는 벨트를 쇠로 만들었으므로 소음이 클 수밖에 없다”고 흠집 내기에 나섰지만 ‘자동차 전문가’인 택시기사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또 하나는 백금 점화 플러그. 보통 점화 플러그는 2만~3만㎞마다 교환해야 하지만 SM5의 점화 플러그는 10만㎞까지 바꿀 필요가 없었다.
르노삼성은 택시기사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도 내놓았다. 공항에서 줄지어 선 택시들을 대상으로 무상점검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차에 대해 잘 알고 스스로 정비할 수 있는 기사들을 위해 자가 정비 코너도 운영했다.
입소문에 탄력이 붙자 “SM5는 쏘나타보다 오래 운전해도 피곤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가 됐다.
입소문 마케팅은 적중했다. 택시기사들은 택시 승차장에서, 기사식당에서 차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SM5를 화제에 올렸고 귀가 솔깃해진 택시 회사 관계자, 개인택시 운전자들은 SM5 계약서에 사인했다.
당시 국내 택시 수요는 연간 6만~7만대 수준. 전체 중형차 시장의 30% 규모였다. 르노 삼성은 택시시장에서 입소문 효과를 발판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2000년 SM5 판매량은 3만대 수준이었다. 그러던 게 택시기사들의 ‘도움’으로 2001년에는 두 배가 넘는 7만대가 팔려나갔다.
한번 ‘망한’ 회사, ‘그 회사 차 사면 AS 안 된다’던 SM5로서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환자에 비유할 만한 대단한 변화였다.
SM5의 고속주행
택시기사들의 입소문은 기사들끼리 나누는 대화로 끝나지 않았다. 차량 구입을 고민하는 소비자는 밤늦게, 때로는 술 한잔하고 택시를 타면서 기사에게 구입 상담을 했다.
“제가 이번에 중형차를 사려고 하는데, 무슨 차를 사면 좋을까요?”
이렇게 묻는 승객에게 택시기사의 상당수는 “에스엠 파이브가 좋아요”“에스엠 파이브가 좋다더라고요”, “에스엠 파이브는 일제차로 보면 돼요”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SM5가 아닌 다른 차종을 몰던 택시기사도 “나도 다음에 차 바꾸면 SM5로 사려고요, 이 차는 잔고장이 너무 심해서 영업하는 시간보다 공장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라며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SM5 구입을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