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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로 달러 뿌려 금융위기 불길 잡다

벤 버냉키 美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헬리콥터로 달러 뿌려 금융위기 불길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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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9월 14일, 자산 2000억 달러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초유의 금융위기 쓰나미가 세계를 강타했고 그 여파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소방수로 나섰다. 그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맞아 강력한 양적완화로 급한 불을 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조기 감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2002년 11월 21일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전미경제학자클럽(NEC). 얌전하고 소심해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연단에 올랐다. 그로부터 3개월 전, 세계의 중앙은행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하 연준)의 이사가 된 벤 버냉키(60)였다.

버냉키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 공대(MIT)를 졸업한 수재지만 연준 입성 전에는 미국 경제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신경제’ 호황과 곧바로 이어진 2000년대 초 닷컴 버블로 한창 들떠 있던 미국에는 대공황 전문가이던 그를 주목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연단에 오른 그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미국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처럼 장기 불황에 시달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버냉키는 답했다. “인구구조, 생산성 등 많은 면에서 미국의 경제구조는 일본과 완전히 달라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가능성이 낮다. 설사 그런 위기가 온다 해도 밀턴 프리드먼이 언급한 대로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듯 중앙은행이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을 단행하면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다.” 유명한 그의 별명 ‘헬리콥터 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언급으로 그는 일약 세계경제학계의 시선을 끄는 인사가 됐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가 인플레이션 파이터, 즉 물가 안정에 있다고 믿는 다수의 경제학자나 중앙은행 관계자와 달리 물가 안정보다는 경기 부양, 즉 디플레이션 파이터의 임무를 중시하는 버냉키의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이날 발언 때문이었을까. 2006년 1월 연준 의장이 된 버냉키는 취임한 지 불과 2년 반 만인 2008년 9월 세계 금융위기라는 초대형 태풍을 맞게 된다. 그는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금리 인하, 과감한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금리 인하로도 경기가 예상만큼 살아나지 않을 때 국채 매입 등으로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직접 돈을 푸는 방식)를 단행하며 시스템 붕괴 위기에 놓였던 세계경제를 일단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대공황 전문가로서 그의 진가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일각에서는 버냉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을 조기에 감지하지 못해 금융위기를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며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의 주원인인 세계경제의 과잉 유동성은 버냉키의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유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최소한 ‘제2의 대공황’을 예방한 공로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숫자·언어 영역에서 두각

벤 샬롬 버냉키는 1953년 12월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오거스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약사, 어머니는 교사였고 유년 시절 토라(유대교 율법서) 강독을 비롯한 유대식 가정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특유의 투철한 교육열로 무장한 그의 부모는 똑똑한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버냉키는 어릴 때부터 숫자와 언어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 철자 맞추기 대회인 ‘스펠링 비(spelling bee)’에서 우승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속독을 익히고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적분학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1971년 버냉키는 대학입학시험인 수학능력적성검사(SAT)에서 1600점 만점에 1590점을 얻어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그가 경제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은 1920년대에 대공황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똑똑한 손자에게 대공황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버냉키는 ‘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대공황을 못 막았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였고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박사 논문을 쓰며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밟던 버냉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시카고 학파의 거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였다. 버냉키의 별명이 된 ‘헬리콥터의 통화 살포’는 원래 프리드먼 교수가 자신의 강의에서 즐겨 사용하던 비유였다. 프리드먼 교수가 학생들에게 종종 ‘헬리콥터가 하루만 돈다발을 떨어뜨리는지, 아니면 매일 와서 돈을 살포하는지에 따라 통화정책의 효과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는 유의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버냉키는 프리드먼 교수가 1960년대 초 발표한 ‘미국의 1867~1960년 화폐사(史)’를 탐독했으며 대공황의 원인이 자유경제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연준의 과도한 통화긴축 정책에 있었다는 이론에 매료됐다. 이는 약간의 물가상승 부담을 각오하더라도 중앙은행이 경기침체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디플레이션 예방에는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확대가 최선이라는 그의 지론으로 굳어졌다.

1979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딴 버냉키는 스탠퍼드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 미국의 주요 명문대를 거치며 교수로 승승장구했다. 20년 넘게 학계에서만 활동하던 버냉키는 2002년 8월 연준 이사로 뽑히면서 본격적으로 세계경제계에 데뷔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하는 연준 이사는 임기가 14년에 달하며 연준 의장을 포함해 총 7명뿐인 자리다.

연준 이사가 된 지 석 달 만에 이른바 ‘헬리콥터 연설’로 유명해진 버냉키는 2005년 6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가정교사나 다름없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부시 대통령과 돈독한 교분을 쌓았고 결국 4개월 뒤인 그해 10월 부시 대통령은 그를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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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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