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단법인 한국생약협회의 엄경섭(54) 회장은 현재 국내 생약재 시장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등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약재들로 인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농업인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것. 그는 이런 위기 상황을 타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화된 재배 양식을 도입해 국산 생약재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970∼80년대만 해도 국내 생약재 시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우리 농가에서 생산한 약재의 30% 가량을 일본, 동남아, 북미 등지로 수출해 ‘수출역군’으로서 생약재배 농민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이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면서 값싼 약재를 다량 수출하기 시작했고, 속절없이 우리는 생약재 시장을 중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젠 생약재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뀌게 된 것.
“값싼 중국산 약재가 들어오면서 많은 농가들이 생약재배를 포기했어요. 굳이 경쟁력 떨어지는 생약재배를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실제로 생약 재배는 이윤이 많지 않은 편입니다. 대규모 유통물류센터 등 직거래 할 장소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중간 상인이 재배 농가에서 약재를 사서 도매상으로 넘기고 도매상은 다시 소매상으로 넘기는 단계를 거쳐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 때문에 재배 농가는 싼값에 넘겨도 소비자는 높은 가격에 구입해야 합니다. 중간 유통마진 때문에 당연히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일부 몰지각한 상인들은 마진을 더 남기려 중국산을 국산과 섞어 팔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워낙 생약 재배 농가 수가 적다 보니까 농림부에서도 별다른 육성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요. 이런 추세로 가다간 우수한 우리 생약재의 종자와 종근마저도 보존하기 힘든 지경이 될 거라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3월 한국생약협회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우리 생약 재배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해결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답은 간단했다.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때마침 농림부에서는 우수약용작물 재배관리(GAP·Good Agricultural Practice) 규범을 만들어 시범 실시할 농가들을 찾고 있었다. 엄 회장은 ‘바로 이거다’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그 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약재 재배를 해왔어요. 토양이나 수질이 약재에 맞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농약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했으며 재배 후 관리에도 소홀했습니다. 그러니 가격뿐 아니라 품질 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GAP 규범을 도입해 과학적, 체계적으로 생약을 재배한다면 중국산 약재와 경쟁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품질 경쟁력 갖춘 GAP 약재
GAP는 한약재의 생산단계에서부터 가공, 유통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규격기준에 의거해 관리하는 규범이다. GAP에 따르면 우선 작물을 재배하기 전 토양, 수질검사를 실시해 최적의 재배환경을 선택하고, 환경에 맞는 종자를 뿌린다. 농업진흥청에서 마련한 작물별 재배기준에 맞춰 약물을 관리하는데, 가급적 유기질 비료와 독성이 약한 농약을 사용한다. 수확 후 중금속 검사, 잔류농약 검사, 이산화황 검사 등을 실시해 합격한 약재에는 GAP 인증 마크를 부여한다. 독성이 없는 포장지에 생산자의 이름과 연락처, 파종 및 수확 날짜, 수확 후 관리 내용 등을 일일이 기록한 후 약재를 포장하고, 해충이나 가축의 접근이 불가능한 깨끗하고 건조한 장소에 보관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