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빈대철학’으로 현대왕국일구다

  • 엄광용 작가

    입력2005-04-15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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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3월21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회장은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일궈 건설, 중공업, 자동차, 전자 등을 아우르는 세계 유수의 ‘현대왕국’을 세웠다. 한때는 세계 9위의 부호에 오르기도 했다. 정회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한국 기업사에 큰 획을 긋고 적극적인 대북사업으로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것은 독보적인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양한 일화를 통해 돌아본다.<편집자>
    ‘정주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성공’이란 단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성공한’ 인물이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조그만 에피소드 하나에서도 그가 성공한 까닭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언젠가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정주영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부자가 되셨어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어린이가 알아듣도록 명쾌하게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질문을 던진 아이에게 물었다.



    “학생, 등산이란 걸 해본 적 있어요?”

    “네, 북한산에 가본 적 있어요.”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그래요? 나도 손자들과 함께 가끔 북한산에 오릅니다.”

    그러더니 정주영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는 그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자가 되는 비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는 까마득히 높은 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올라가면 안 돼요. 자꾸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저 높은 데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생각하면 등산하기가 힘들어져요. 그러나 한 발짝 한 발짝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발밑을 내려다보며 올라가면 어느 사이에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나도 처음부터 큰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살아오다 보니 부자가 된 거예요. 학생도 꼭대기만 쳐다보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예요.”

    어느 알피니스트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고 했다. 그렇듯 정주영의 ‘등산’ 목적도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시했다. 일이 좋아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이 모였고, 그 돈으로 좀더 큰 일을 벌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끈질긴 승부근성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고향에서 송전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5학년 학생인 최경태와 우연한 일로 싸움을 벌이게 됐다. 싸움은 송전에서 평양이 더 가까운지, 서울이 더 가까운지를 놓고 입씨름을 하다 비롯됐다.

    정주영은 서울이 더 가깝다고 했고, 최경태는 평양이 더 가깝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시를 동경하는 마음에서 그런 입씨름을 하게 된 것인데, 서로 끝까지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맞섰다.

    “아니야, 내가 지도를 놓고 어느 쪽이 더 가까운지 자로 재보기까지 했단 말이다.”

    정주영이 최경태에게 대들었다. 그는 정말로 지도를 펼쳐놓고 송전에서 서울과 평양 중 어디가 더 가까운지 삼각자로 재본 적이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도시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쬐끄만 게 우기기는… 평양이 더 가깝다면 가까운 줄 알아!”

    최경태는 두 학년이 더 높다는 것을 내세우며 자존심을 꺾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나이는 어려도 정주영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입씨름은 몸씨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는 상황이 됐다. 정주영은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최경태는 두 학년이 높은데다 나이는 열여덟 살로 이미 장가를 가서 아들까지 둔 ‘어른’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지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덩치로 보나 어른과 아이 싸움이었으니 최경태가 이기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햇병아리와 장닭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는 예상을 뒤엎고 햇병아리에게 돌아갔다.

    물론 얻어맞기는 정주영이 더 많이 맞았다. 상대가 서너 대 때리면 그는 겨우 한 대 때릴까 말까였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도전했다. 싸움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정주영은 수업만 끝나면 5학년 교실로 달려가 최경태에게 싸움을 걸었다. 수업을 일찍 마친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5학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정주영은 최경태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 싸울 작정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싸우자 나중에는 최경태가 질려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 뒤로 최경태는 졸업할 때까지 저 멀리에서 정주영이 걸어오는 것만 봐도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곤 했다. 최경태가 힘이 약해 정주영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어려도 그의 고래심줄같이 끈질긴 승부근성에 기가 질려 아예 접근하는 것조차 무서워했던 것이다.

    빈대에게 배운 철학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정주영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늘 뭔가를 궁리하면서 바쁘게 돌아갔다. 그는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뭔가 일을 꾸미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성격이었다.

    젊은 시절 정주영은 네 번이나 가출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돌밭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100평쯤 되는 논을 만드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릴 만큼 농사일은 힘들었다.

    정주영은 바쁜 농사일 틈틈이 매일 짬을 내서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하던 구장 집을 드나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는 데 재미를 붙인 것. 그는 이 소설이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믿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인 허숭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서울에 가서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읽고 첫 가출을 감행했다. 청진항 공사와 제철공장 건설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기사였다. 친구와 함께 도망쳤으나 결국 부친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가출은 서울행이었으나,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뒤쫓아온 부친에게 잡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정주영과 부친의 도망치고 뒤쫓는 숨바꼭질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얼마 후 그는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를 보고 학원에 가기 위해 세 번째 가출을 시도했다. 황소와 송아지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달아난 것. 그러나 이번에도 부친이 서울로 찾아와 집을 나온 지 두 달 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네 번째 가출을 감행할 때 정주영은 교과서에 나오는 ‘청개구리의 교훈’을 되새겼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올라가려고 몸을 날려 뛰었다가 가지가 너무 높아 실패했지만 낙심하지 않고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뛰어오르기를 거듭한 끝에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개구리도 성공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자식인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의지를 불태웠고, 결국 네 번째 가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객지생활을 시작한 정주영이 인천 부두에서 막일을 하고 있을 때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에는 빈대가 우글거렸다. 낮에 힘들게 일을 하고 나서 고단한 몸을 누일라치면 빈대가 극성을 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합숙소에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정주영과 몇몇 노동자는 빈대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그 식탁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빈대들은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악착같이 피를 빨아먹었다.

    정주영은 다시 꾀를 내어 탁자 다리를 물이 가득한 양푼 네 개에 담가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빈대들로선 탁자에 오르려면 양푼에 빠져 익사할 판이라 탁자 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게 된 것. 그날 밤 정주영은 간만에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틀밤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빈대들이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의 빈대들이 어떻게 탁자 위로 올라왔을까?”

    정주영은 불을 켜고 살펴보았다. 빈대들은 탁자 다리로 기어오른 게 아니었다. 빈대들은 장애물로 설치한 양푼을 통과하다간 물에 빠져 죽을 위험이 있으니까 아예 벽을 타고 우회해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공중낙하를 시도한 것이다. 그때 정주영은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빈대도 저렇게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노력해 제 뜻을 이루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빈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주영은 빈대에게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주영의 ‘빈대철학’이다. 그 후 정주영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빈대철학’을 되새기며 ‘빈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부터 무서울 정도로 절약하며 살았다. 열여덟 살 때 서울에서 막노동을 할 때 그는 혼자 방을 얻어 자취했다. 건설 현장에서 하루종일 돌을 져나르는 일을 했지만 일당은 아주 적었다. 그러니 입에 제대로 풀칠이라도 하려면 극도로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주영은 한 묶음에 10전씩 하는 장작을 사서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해먹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작이 재로 변하는 것을 보면 돈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기가 막힌 일석삼조의 방법이 있었군!”

    장작을 절약하려고 머리를 짜내던 그에게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저녁에 한꺼번에 세 끼 밥을 지으면 아침과 저녁 두 번씩 때던 장작의 양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요량이었다. 아침에 밥을 하기 위해 장작을 땔 경우 낮에 비워두는 방만 괜히 데워놓는 꼴이 되므로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 한 번 저녁에 불을 지펴 잠자리도 따뜻하게 하면서 밥도 하루 세 끼 분량을 한꺼번에 지어 장작값을 아꼈다. 저녁에 밥을 할 때 다음날 아침밥도 떠놓고 점심 도시락도 미리 싸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밥을 하는데, 정주영은 장작을 절약하려고 저녁에 밥을 짓는 기발한 방법을 착안해낸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정주영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상하게 여겼다.

    “담배를 피운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왜들 저렇게 담배를 피우지?”

    담배를 살 돈이면 우동이나 떡으로 한 끼 배를 채울 수 있는데, 뭣하러 돈을 연기로 날려보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종일 힘들여 번 돈을 ‘물 한 잔’ 마시는 데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은 공짜로도 얼마든지 얻어 마실 수 있지 않은가.

    막노동판을 떠돌던 정주영이 쌀도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직할 때의 이야기다.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주인이 이렇게 묻자 정주영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다. 몇 번 타본 적은 있지만 익숙하진 않았다.

    “흠, 가랑이는 길구먼.”

    쌀가게 주인은 정주영의 다리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정주영은 튼튼하고 긴 다리 덕분에 쌀 배달꾼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쌀가게에서는 자전거로 배달을 했으므로 자전거를 잘 타야 배달을 나갈 수 있는데, 정주영은 일단 취직을 하고 나서 자전거를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주인은 정주영에게 쌀 배달을 시켰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포장도 안 된 길에 쌀가마를 싣고 나갔다가 그는 자전거와 함께 진흙탕에 나뒹굴었다. 자전거 솜씨가 서툴러 핸들을 잘못 꺾은 것이다.

    진흙탕에 팽개쳐진 쌀가마를 바라보며 정주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을 게 뻔했다. 그가 진흙투성이가 된 쌀가마를 어깨에 메고 가게로 들어서자 주인이 껄껄 웃었다.

    “빗길에 넘어졌구먼.”

    정주영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어야 산다네. 그러니 비가 와도 쌀 배달은 해야 한다는 말일세. 그러니 앞으로는 빗길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자전거 타는 법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게.”

    신용 담보로 사업 일궈

    당장 나가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주인이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자 그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정주영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그는 선배 배달꾼 이원제를 졸라 자전거 쌀 배달의 기술과 요령을 배웠다. 불과 사흘이 지난 후부터 그는 자전거에 쌀을 두 가마씩 싣고 배달을 나갈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가 터득한 노력은 가령 이런 것들이었다.

    ‘쌀가마는 세워서 실어야지, 뉘어 실으면 균형이 안 잡힌다. 쌀가마는 절대 자전거에 비끄러매서는 안 된다. 쌀가마를 비끄러매고 넘어지면 쌀 무게 때문에 자전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단순해 보이는 자전거 쌀 배달도 공부를 해서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세상에 공부하지 않고 되는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새벽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까지 뿌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장부 작성하는 것도 도와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창고 정리까지 도맡았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지켜본 쌀가게 주인은 게으른 아들 대신 그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정주영은 성실함말고도 ‘신용’이라는 무형의 재산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쌀가게를 운영할 때 거래하던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덕분에 그 뒤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할 때 그로부터 신용으로 사업자금 3000원을 빌릴 수 있었다.

    “자네가 쌀가게를 할 때 외상값을 제때 제때 갚아서 이 돈을 빌려주는 것일세.”

    정미소 주인은 아무런 담보 없이 선뜻 거금을 내주었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자금이 3500원이었으니 사업자금을 전부 대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잔금을 치르고 공장을 인수한 지 닷새가 지난 새벽이었다.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한 두 기술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정주영은 숙직실에서 혼자 잠을 잤다. 늦게 잠이 들었지만 그는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세수할 물을 데우려고 불을 피우면서 그는 마침 옆에 있던 신나통을 들어 화덕에 조금 부었다. 그 순간 불길이 확 일어나며 신나통에 옮겨 붙었다. 그는 얼떨결에 신나통을 바닥에 팽개쳤고 그 바람에 신나가 쏟아지면서 불길은 순식간에 공장 건물을 덮쳤다. 공장은 목조건물인데다 자동차를 칠하고 닦느라 기름으로 온통 범벅이 된 상태여서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불을 꺼보려던 정주영은 자칫하면 불길에 휩싸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통을 집어들어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공장은 전소됐고, 수리를 끝낸 고객들의 자동차까지 몽땅 타버리고 말았다. 공장도 빚을 얻어 인수한 마당에 외상으로 들여놓은 부속품과 고객의 자동차까지 재로 변하면서 그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건설업의 유혹

    정주영은 망연자실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미소 주인을 찾아갔다.

    “공장이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감님의 빚도 못 갚게 생겼으니,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사업자금을 더 빌려주십시오. 이번에도 담보로 잡힐 것은 없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정미소 주인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하지. 내 평생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였다는 오점은 남기고 싶지 않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고, 또 단 한 번도 돈을 떼인 적이 없어.”

    정미소 주인은 “사람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정주영의 신용이 담보라는 얘기였다.

    “영감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공장에 불이 났으니 사업이 불처럼 일어날 조짐이라고 여기고 맘 편히 먹게나.”

    정미소 주인은 고맙게도 위로의 말까지 건네며 그를 격려했다.

    정주영은 정미소 주인에게서 다시 3500원의 사업자금을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었다. 그 후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정주영은 정미소 주인에게 두 차례에 걸쳐 빌린 사업자금을 3년 만에 이자까지 보태 갚을 수 있었다. 그는 끝까지 신용을 지켰고, 따라서 그의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정미소 주인의 사람 보는 눈은 아주 정확했던 셈이었다.

    정주영이 건설업을 시작한 것은 1947년 5월25일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 안에 자그맣게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내걸었던 것.

    자동차 수리업도 잘 되고 있었다. 46년에 시작한 이 사업은 1년 만에 종업원이 30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우연히 건설업자들이 공사비 받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건설업자들이 받아가는 공사비는 자동차 수리대금의 몇십 배나 되는 거금이었다.

    정주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동차 수리나 건설이나 똑같이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는 일인데, 그 대가에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매제 김영주에게 뜬금없이 말했다. 김영주의 눈이 희둥그레졌다.

    “형님, 토건업은 자기 자본도 넉넉해야 하지만 우선 경험이 많아야 해요. 자동차나 만지던 우리가 어떻게 토건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김영주만 반대하고 나선 게 아니었다. 당시 동업자로 경리 일을 맡고 있던 오인보도 그를 말렸다.

    “토목이나 건축공사라는 게 한두 달에 끝나는 게 아니잖은가? 어떤 공사는 1년도 걸리고 2년도 걸려. 자고 나면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요즘에 잘못 공사를 맡았다간 돈을 벌기는커녕 공사비용도 못 건지네.”

    말리기 힘들면 구워버려!

    그러나 정주영에겐 토건업이 아주 생소한 분야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때 토목 공사판에서 일해본 경험도 있었고, 당시만 해도 토건업이라는 것이 대개 단순한 수리나 영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만만하게 여겨졌다.

    “자동차 수리나 토건업이나 그게 그거지 뭐. 견적서 넣고 계약하고 일해주고 돈 받는 것은 자동차 수리나 토건업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토건업에 뛰어들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현대토건사는 그 다음해에 광화문 평화신문사 빌딩에 방 두 개를 얻어 사무실을 옮겼다. 1년남짓 경험해본 정주영은 토건업이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공사를 따내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일을 시작하면 수지타산은 맞았다. 당시 기술자라고는 공업학교 교사출신인 송상술이라는 사람 한 명뿐이었으며, 기능공도 겨우 10여 명 정도가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50년 1월 정주영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중구 필동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현대건설주식회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건설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현대건설이 국내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태국은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공사 진척도 더디고, 특히 모래와 자갈이 항상 젖어 있어 그대로 섞을 경우 함량이 맞지 않아 아스팔트 콘크리트(아스콘)를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맡았을 때 정주영은 일주일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갔다.

    “큰일입니다. 모래와 자갈이 젖어서 아스콘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생각 끝에 건조기에 자갈을 넣고 말리려 했지만 건조기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아 제대로 마르질 않습니다.”

    현장 책임자의 보고를 받은 정주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젖은 모래와 자갈 때문에 벌써 두세 달이나 공정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건조기에 비싼 기름 때가며 말릴 게 뭐 있어? 골재를 직접 철판 위에 놓고 구우면 될 거 아냐!”

    직원들은 그의 말에 무릎을 치고 당장 그렇게 해봤다. 건조기를 사용할 때보다 2∼3배나 높은 생산능률을 올리 수 있었다. 또한 밤이면 모래와 자갈을 천막으로 덮었다가 햇볕이 강한 낮에는 걷어내 말리는 방법으로 80% 이상의 아스콘 가동률을 얻어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해 방파제와 호안공사에 쓸 스타비트를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총 16만 개의 스타비트를 생산해야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믹서트럭이 싣고 온 콘크리트를 스타비트 거푸집에 퍼붓기 위해 150t짜리 크레인 다섯 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설쳐대는데도 하루 작업량은 200개에 지나지 않았다.

    ‘신문대학’ 졸업생

    “아니, 믹서트럭의 콘크리트를 직접 스타비트 거푸집에 쏟아부으면 될 걸 가지고 왜 번거롭게 크레인 버킷으로 붓나?”

    스타비트 만드는 광경을 바라보던 정주영이 현장 감독에게 물었다.

    “믹서트럭의 콘크리트 토출구(吐出口)가 거푸집보다 낮기 때문에….”

    정주영은 ‘이런, 빈대만도 못한 녀석들!’ 하고 생각하며 다시 현장 감독에게 물었다.

    “앞으로 스타비트를 몇 개나 더 만들어야 하나?”

    “이제 7000개 만들었으니 15만3000개를 더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루 200개씩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15만 개가 넘는 스타비트를 만들겠나?”

    “…”

    “믹서트럭의 콘크리트 토출구를 스타비트 거푸집보다 높게 만들면 될 것 아닌가. 그러면 번거롭게 크레인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시간도 그만큼 절약될 것 아닌가.”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현장에서는 곧 믹서트럭의 토출구를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보다 높게 개조했다. 현장 인력들은 ‘완제품’인 믹서트럭은 개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정주영의 말대로 믹서트럭를 개조해 사용하자 하루 200개에 불과하던 스타비트 생산량이 350개로 늘어났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정주영이 누구보다 박식하고 돈을 많이 벌었는데도 농부처럼 소박하고 정직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박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고속도로 공사 얘기를 꺼내기가 뭣해 가벼운 담소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정사장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까?”

    “세 끼 밥 먹고 살기가 어려워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남보다 열심히 일했을 뿐 처음부터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정주영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쟁쟁한 대학 출신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어렵지 않던가요?”

    박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저는 신문대학을 나왔습니다.”

    “신문대학이라니요?”

    “예, 저는 매일 머릿기사에서부터 광고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신문을 읽습니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야 몇몇 한정된 교수님한테서 배웠겠지만, 저는 무수한 교수님들이, 그것도 일류 대학 교수님들이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배웠습니다.”

    정주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신문부터 읽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그의 머리맡에는 석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어린 시절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이광수 ‘흙’의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운 적이 있었고,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가출을 결심하기도 했던 정주영이고 보면, 신문은 그를 키워준 대학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박대통령도 정주영의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사장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번 태국 고속도로 공사에서 손해를 봤다고 들었는데….”

    박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짐짓 이렇게 물었다.

    “손해라기보다 수업료를 좀 비싸게 치른 셈입니다. 지금 하는 공사가 끝나면 미리 따놓은 탁 토엔 고속도로 공사가 또 있으니, 그때 가서 이미 낸 수업료를 찾으면 되겠지요.”

    이미 손해본 것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업가다운 배짱이었다. 사업이란 하다보면 손해볼 때도 있고 큰 이익을 얻을 때도 있는 법. 한 발짝 물러서 두 발짝 전진하는 지혜를 터득하면, 오히려 한 번의 손해는 두 번의 이익을 내기 위한 수업료에 불과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비싼 수업료 내고 고속도로 건설 기술을 배웠으니 나라를 위해서 그 기술을 좀 써주시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계획인데, 이득 볼 생각말고 본전에 공사를 맡아주실 수 없겠소?”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정주영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태국에서 배운 고속도로 건설 기술을 국내 경부고속도로를 닦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1971년 10월23일 착공, 45일 만인 12월5일 45km 전구간 공사를 끝낸 통일로는 현대건설의 국내외 도로 공사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한 공사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해 10월 초의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차에 타시오.”

    박대통령은 정주영을 바로 옆자리에 태웠다. 차 안에는 당시 건설부장관 태완선도 동석하고 있었다. 청와대를 빠져나온 차는 곧바로 문산 쪽으로 달렸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정주영이 묻자 박대통령은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서울에서 판문점까지 4차선 도로를 내려고 하는데, 12월5일 전까지 완공이 가능하겠습니까?”

    박대통령이 12월5일 이전으로 날짜를 못박은 것은 북한에서 박성철을 단장으로 한 남북적십자회담 방문단이 바로 그날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입성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정주영은 결심이 선 듯 자신있게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 뭐요?”

    “우리 현대건설 이외에 다른 3개의 건설회사가 함께 참여한다면 그 기간 안에 완공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죠.”

    정주영은 곧바로 통일로 공사에 착수했다. 이 공사에는 현대건설을 비롯, 삼부토건 동아건설 대림산업 등 4개 건설업체가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공사가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구간을 맡았는데, 특히 그 구간에 있는 벽제교 가설은 대단한 난공사였다.

    정주영은 새벽 5시에 작업 현장에 달려가 진두지휘를 했다. 워낙 시일이 급박하다 보니 현대건설 전 임직원이 공사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불도저로 땅을 밀고 아스콘을 깔고 땅을 다지는 작업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진행됐다.

    아스팔트엔 김이 솟고

    드디어 12월5일 아침 북한의 적십자회담 방문단이 판문점을 통과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까지도 뉴스 속보를 들으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을 만큼 현장 상황은 급박했다. 벽제교의 경우 교각 밑에 스태칭(받침판)을 받쳐놓은 상태에서 방문단 일행의 차를 통과시켰다. 그 직전에 아스콘을 깔아 채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방문단의 차가 들이닥치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도로에서 작업을 진행하던 현대건설 직원들은 급히 작업 차량을 마을 뒤쪽에 보이지 않도록 숨기기에 바빴다. 방문단의 차가 벽제교를 지나갈 때는, 모두들 마을 집 뒤에 숨어서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바라보았다.

    정주영 역시 가슴을 졸이며 벽제교 위로 지나가는 방문단 차량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단양시멘트 공장에서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만들어 긴급 공수했기 때문에 교각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이렇게 45일 만에 완성한 통일로는 의외로 부실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완공 이후 하자 보수가 발생한 곳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기를 앞당기되 공사만큼은 완벽하고 철저하게 수행해야 한다며 새벽부터 밤까지 공사 현장을 지휘한 정주영의 ‘잔소리’가 이뤄낸 성과였다.

    남산 밑에 있는 현재의 아시아나항공 건물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의도로 옮기기 전까지 쓰던 빌딩이었다. 이 빌딩을 지을 당시 정주영은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었다. 전경련에게 자체 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창한 사람도 그였으며, 빌딩을 건립하는 데 드는 자금 확보와 공사의 대부분도 현대건설이 주도했다.

    당초 이 건물은 20층 규모로 설계했는데, 고도 문제 때문에 신축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건물을 20층으로 올릴 경우 남산 중턱에 항공 방위를 위해 설치해 놓은 고사포대의 사계(射界)를 가린다는 것이었다.

    서울 한가운데 위치한 남산은 국토 방위의 상징이었다. 당시는 지금의 서울타워 전망대까지 군 작전상 시민에게 공개하지 않던 시절인 만큼 군사시설과 관련된 규정은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대건설 실무자들은 전경련빌딩 신축 허가를 얻기 위해 행정기관과 군부대, 관련단체 등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모두 ‘불가’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러자 담당 임원은 정주영에게 남산 밑에 20층짜리 건물을 세울 수 없게 된 경위, 이와 관련한 자료와 법령 등이 포함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회장님, 다른 지역의 부지를 찾아보는 길밖에 없습니다.”

    “왜 부지를 바꾸려고 하나?”

    정주영은 전후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이렇게 되물었다.

    “남산 중턱에 있는 포대의 사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20층 건물을 올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사계를 가리지 않게 10층 정도로 낮추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는 안 돼. 반드시 20층 건물로 지어야 해.”

    “그러면 부지를 옮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중역의 말에 정주영은 혀를 끌끌 찼다.

    역발상의 천재

    “이 사람 참 한심한 작자로군. 포대 사계를 가려 건물을 못 짓는다면 포대를 20층 건물보다 높은 곳으로 옮기면 될 게 아닌가? 포대야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거잖아. 군 당국에 다시 건의해 봐. 우리가 포대를 위치 좋은 곳으로 옮겨서 멋지게 지어주겠다고.”

    정주영의 질책에 임원은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예? 포, 포대를 옮긴다구요?”

    “부지를 새로 선정하는 것보다 아예 포대 위치를 더 높이 옮기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란 말일세. 이미 주변 여건에 맞춰 건물 설계까지 해놓은 마당 아닌가?”

    결국 전경련빌딩은 정주영의 고집대로 남산 밑에 지어졌다. 포대는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더 튼튼하게 지어줬다. 감시를 하려면 높은 곳일수록 좋기 때문에 군부대에서도 대환영이었던 것이다.

    1971년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정주영은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바클레이즈은행의 문턱은 너무도 높았다. 한국에서 조선소를 만든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정주영은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한 영국 A&P 애플도어 엔지니어링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바클레이즈은행을 움직일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직 배를 계약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실정이고, 또 한국의 상환능력과 잠재력에 의문이 많아서 곤란할 것 같군요.”

    그때 문득 정주영은 바지 주머니 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이것은 한국 지폐입니다. 여기 그려진 것이 바로 거북선이지요. 한국은 이미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국의 조선(造船)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1800년대이니 한국은 그보다 300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주영의 말에 감동한 것이다. 물론 그가 감동한 것은 500원짜리에 그려진 거북선이 아니라 정주영의 불타는 열정이었다. 그런 열정 없이는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내놓는 임기응변도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바클레이즈은행의 부총재를 만날 수 있게 해드리지요.”

    정주영은 그의 도움으로 바클레이즈은행과 차관도입 협의를 재개할 수 있었다.

    콧대 높은 영국 은행의 부총재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외국인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주영에게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 역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 그런 행운을 가져다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주영은 그의 도움으로 바클레이즈은행과 차관도입 협의를 재개할 수 있었다.

    “나는 조선소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서류를 검토해 주십시오.”

    정주영이 바클레이즈은행 부총재에게 열변을 토했다.

    “당신의 전공은 뭡니까?”

    부총재는 고자세를 유지한 채 물었다. 그는 이미 자료를 훑어보고 정주영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보지 않았습니까?”

    “물론 면밀히 검토했지요. 아주 완벽하고 훌륭했소.”

    “그 사업계획서가 바로 내 전공이오. 사실은 내가 어제 옥스퍼드대학에 그 사업계획서를 들고 가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달라고 하니까 한 번 척 들춰보고는 두말 없이 학위를 주더군요. 그러니까 그 사업계획서는 내 박사학위 논문인 셈이오.”

    ‘옥스퍼드 유머’에 부총재는 껄껄 웃었다. 물론 정주영의 말은 농담이었다.

    “하하하, 옥스퍼드대학 경제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이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거요. 옥스퍼드대학에는 역시 석학들이 많군요.”

    “나를 석학으로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당신은 유머가 전공인 듯싶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이 사업계획서를 수출보험국으로 보내겠소.”

    이것으로 정주영은 바클레이즈은행의 높은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봉이 정선달

    흔히 정주영의 현대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기업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 무일푼으로 시작해 오늘의 대그룹으로 발전했으니, 그 말은 옳다. 현대가 그렇듯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정주영의 긍정적인 사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백사장 사진 한 장 들고 가서 대형 선박 두 척을 수주해 온 ‘봉이 정선달’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정주영의 신화적인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지극히 긍정적인 사고 없이는 이런 신화가 탄생할 수 없다.

    정주영은 ‘거북선 지폐’와 ‘옥스퍼드 박사’의 임기응변으로 바클레이즈은행의 벽은 넘어설 수 있었지만, 아직 영국 수출보증기구(ECGD) 총재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정주영과의 면담에서 총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제출한 조선소 건립 사업계획서에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영국의 일류 기술회사가 현대의 조선 능력을 인정했으니 나는 그걸 믿겠습니다. 또한 영국 제일의 바클레이즈은행이 당신네 회사를 긍정적으로 진단한 것도 믿겠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기술진과 창업주의 능력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선주라면 세계 유수의 조선소에다 배를 주문하지, 왜 배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현대에 주문하겠습니까? 주문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배를 만든다면 그 배를 누구에게 팔겠습니까? 만약 배가 안 팔리면 영국 은행에서 빌려간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앞으로 현대에서 만드는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게 증명해보세요. 그 전에는 차관 제공이 불가능합니다.”

    백 번 옳은 소리였다. 총재의 말이 너무도 논리정연해서 정주영은 오히려 설득을 당할 처지였다. 잠시 조선소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정주영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세상의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있는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마치 봉이 김선달처럼 세계 유수의 해운회사들을 찾아다녔다.

    “당신이 만약 배를 사준다면 우리는 영국 수출보증기구의 승인 아래 바클레이즈은행으로부터 차관으로 건설자금을 받아 곧바로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이 주문한 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배를 수주하러 다닌 정주영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에 미치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렇게 미친 듯이 떠돌던 정주영은 마침내 자신처럼 ‘미친’ 해운업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세기 가까이 해운업을 영위해온 그리스의 거물 해운업자로, 한때는 처남인 선박왕 오나시스를 능가한 적도 있는 리바노스라는 인물이었다. 정주영은 그에게 백사장 사진을 내밀면서 다른 조선소보다 훨씬 싼 가격에 배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이 사업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어요. 가격은 척당 3035만 달러, 5년 6개월 후에 배를 인도할 수 있게 해주시오.”

    리바노스는 그 자리에서 26만t급 선박 두 척을 주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주영에게 계약금으로 14억 달러를 선뜻 내주었다.

    내친 김에 국산車까지

    현대자동차 설립을 앞뒀을 무렵 정주영은 미국 포드사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조립 자동차를 생산하려 했었다. 66년 4월, 포드사는 한국 진출을 겨냥하고 서울에 와서 시장조사를 한 바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는 그들의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포드가 시장조사를 끝내고 돌아간 뒤에야 정보를 입수한 정주영은, 마침 단양시멘트 1차 확장 공사를 위한 차관 교섭차 미국에 가 있던 동생 정인영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포드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으라고 말했다.

    “아니, 그런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합니까?”

    정인영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했다. 그러자 정주영이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해보기나 했어?”

    ‘해보기나 했어?’는 그가 전매특허처럼 쓰는 말이었다.

    66년 12월 정주영은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2월 현대와 포드는 한국산 부품과 미국산 부품을 21 대 79의 비율로 자동차를 조립한다는 1차 기술계약을 체결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후발업체였기 때문에 현대와 포드의 제휴는 일본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코로나를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조립·생산하던 신진공업 등 기존 자동체업계는 일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울산에 공장을 지은 현대자동차는 3년은 걸려야 자동차 생산이 가능하리라던 포드의 예상을 깨고 1년 만에 ‘코티나’를 조립·생산했다. 69년에는 부품의 국산화율을 높여 포드와의 조립기술 계약에 따른 출자액을 현대 자본으로 바꾸고, 포드는 자동차 조립 판매로만 이득을 챙길 수 있도록 하는 2차 계약을 맺었다. 계약기간은 71년까지였다.

    정주영은 2차 계약기간이 끝나는 1971년부터 현대자동차를 합작회사로 전환해 선진 자동차 공업 기술을 국내에 완전히 정착시키려 했다. 그러나 포드측은 투자 비율 50 대 50의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시장이 좁다고 판단, 합작회사 설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오히려 치고 나가는 게 정주영의 스타일이었다.

    “까짓것, 좋아! 포드가 합작회사를 반대한다면 우리끼리 노력해서 100% 국산 자동차를 만들자구. 현대자동차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고유모델 자동차 생산 준비에 돌입한다.”

    정주영이 동생 정세영에게 말했다.

    “네? 독자모델 자동차요? 그건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기술 수준도 아직 멀었어요.”

    그러나 정주영은 한번 결단이 서면 즉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우리가 왜 안 된다는 거야? 배도 만드는데 자동차는 왜 못 만들겠어?”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역들도 한결같이 반대했다. ‘때를 기다리자’는 것은 무조건 보류하자는 말이었다.

    “그래, 지금까지 때를 기다렸잖아? 지금이 바로 그때라구.”

    정주영은 말 그대로 그때가 자동차산업에 뛰어들 절호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 무렵 때마침 영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인 BLMC(British Layland Motors Corporation) 부사장 조지 턴불이 신형차 개발문제를 놓고 회장과 갈등을 빚다 회사를 그만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주영은 설득의 천재였다. 그는 턴불과 엔진, 엑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등 주요 부품 제작 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포드사와 완전 결별한 후 3년이 지난 76년 1월, 현대자동차는 최초의 국산차 ‘포니’를 탄생시켰다.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할 때 현대건설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75년 7월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10억 달러 규모의 항만공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때는 이미 선진국의 대형 건설업체들이 몇 년 전부터 입찰을 준비해온 시점이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정주영은 뒤늦게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전에 출사표를 던졌다.

    “우리의 목표는 이 대형 수주전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정주영은 전략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뚫고 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그는 사운을 걸다시피 전력을 다해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준비를 서둘렀다. 이처럼 현대건설이 입찰을 준비하고 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입찰 참가 예정 10개 업체 중 9개 회사를 선정해 놓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현대건설은 그 나머지 1개 입찰 기업이 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입찰 보증금이 공사액의 2%나 됩니다. 10억 달러에 수주하려면 2000만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돈을 어디서 구하지요?”

    담당중역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현대건설은 그만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행운이 계속 따라줬다.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 관계로 거래하고 있던 바레인 국립은행에 입찰보증금 지원을 요청했는데, 극적으로 입찰 마감 나흘 전에 지급보증서를 보내준 것. 주베일 산업항 건설을 위해 2640만 달러 한도 내에서 무조건 지급을 보증한다는 내용이었다.

    입찰 전야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암투의 현장이었다. 현대건설을 포함한 세계 굴지의 10개 입찰 건설회사들에게는 어느 회사가 얼마를 입찰가로 써넣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이것은 극비에 붙여졌기 때문에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졌고, 당사자들 사이엔 극도의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정주영은 처음에 공사액을 15억 달러 정도로 예상했다. 그러나 너무 많다고 생각해 12억 달러로 낮췄고, 꼭 공사를 수주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자 다시 9억 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떨어뜨렸다. 마지막에는 8억7000만 달러로 결정했다.

    “9억 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너무 억울합니다.”

    당시 현대건설 상무 전갑원이 정주영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우린 반드시 이번 입찰에 성공해야 해. 입찰에서 2등은 꼴찌나 마찬가지라구. 8억7000만 달러라도 우린 이득을 남길 수 있어.”

    정주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집 對 고집

    다음날 아침인 76년 2월16일 마침내 현대건설의 운명이 걸린 입찰의 순간이 왔다. 정주영이 제시한 입찰가에 이의를 제기했던 전갑원이 현대건설을 대표해 투찰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투찰을 마치고 나온 그는 죄인 같은 표정으로 정주영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8억7000만 달러는 너무 적은 것 같아 9억3114만 달러로 써넣었습니다.”

    “뭐라구?”

    정주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날 오후 3시경 미국의 한 건설회사가 제시한 9억444만 달러에 공사가 낙찰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투찰에 임했던 전갑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정주영이 시킨 대로 8억7000만 달러로 써넣었으면 현대건설에 사업이 돌아갔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행운은 현대의 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건설회사가 써넣은 투찰액은 유조선 정박시설 부문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는 9억3114만 달러를 써넣은 현대건설로 최종 낙찰되었음을 선포했다.

    “현대건설의 모든 서류는 완벽했다. 특히 44개월의 공사 기간을 조건 없이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제의에 감명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밝힌 낙찰 사유였다.

    정주영의 고집도 고집이었지만, 그보다 더 고집불통이었던 전갑원 덕분에 현대는 6000만 달러의 이득을 본 셈이었다. 당시 9억3000만 달러는 우리나라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마침내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공사계약을 맺었고, 공사에 착수하기 전에 2억 달러 상당의 선수금을 받아냈다. 당시 외환은행장은 정주영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이렇게 축하했다.

    “정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 보유고를 기록하게 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코바와 제다에서 공공주택 공사를 입찰할 때 정주영은 나와프 왕자로부터 정식 초청을 받았다. 그는 공항에서부터 왕자가 보낸 왕자 전용차를 타고 귀빈 대접을 받으며 왕실로 향했다.

    그날 오후 3시쯤의 일이었다. 정주영을 태운 차가 갑자기 멎었다. 운전사는 마포 같은 깔개를 가지고 내리더니 메카 궁전 쪽을 향해 절을 했다. 그 뒤를 따라오던 차들도 모두 멈춰섰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일제히 길에 엎드렸다. 정주영은 그때가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를 향해 예배를 올리는 ‘싸라’ 시간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언젠가도 오후 3시에 아랍 사람들이 이렇게 절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었다. 순간 정주영은 얼른 차에서 내린 다음 운전사 곁으로 가서 메카를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깔개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정주영은 아랍인들이 절을 다 끝냈는데도 계속 절을 했다. 보다못한 운전사가 “그만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해서 절을 올렸다. 절을 다 끝내고 일어선 그의 이마에는 무더위에 녹아내린 아스팔트에서 검은 칠이 묻어나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얼굴이며 목과 팔은 줄줄 흘러내린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아랍인들의 감동

    정주영이 메카 궁전에 들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을 배알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당신은 무슨 종교를 믿습니까?”

    파이잘 국왕이 정주영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그 신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자비한 신이므로 그 신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게 저의 신앙입니다.”

    정주영의 말에 파이잘 국왕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신이 바로 알라신이오.”

    정주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 신을 가리켜 한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천주님, 서양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창조신을 호칭할 만한 말을 이 땅에서 발견하지 못해 아직 무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감히 인간들이 그 신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은 마치 노아의 홍수 이후 평지에 살던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하늘 꼭대기에 오르려던 교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주영의 일장 연설은 마치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것같이 일사천리였다.

    “당신이 공항에서 왕실로 오는 길에 우리 아랍 사람들과 같이 싸라 시간에 메카 궁을 향해 절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무슨 이유 때문이오?”

    파이잘 국왕이 다시 물었다.

    “신의 이름이 다르고 믿는 방법이 다를 뿐 아랍인이 믿는 알라신이나 제가 믿는 신이나 똑같은 신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자기 신을 경배하는 시간에 그 자리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은 인간이 신에 대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주영은 평소에도 교회에 가면 신도들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고, 절에 가서는 부처님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파이잘왕은 정주영이 메카 궁을 향해 절을 했다는 얘기를 나와프 왕자에게 들었다. 왕자는 운전사로부터 그 얘기를 듣자 국왕에게 귀띔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왕실에는 한국에서 온 정주영이 남의 종교를 존귀하게 여기는 덕성 높은 위인이라고 소문이 났다.

    이렇게 되자 알코바와 제다 공공주택 입찰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결정권을 가진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 장관도 왕실로부터 정주영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래서 그를 덕성 높은 사람으로 존경하게 됐던 것이다. 현대건설은 비교적 높은 입찰가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따냈으며, 알코바 제1지역과 제다 지역은 물론 리야드 지역의 공공주택단지까지 수주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때 현대건설이 주택단지 건설로 수주한 총공사금액은 무려 12억 달러에 달했다.

    1981년 5월 어느 날 문교부 체육국장이 프린터로 뽑은 올림픽유치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들고 정주영을 찾아왔다. 그에게는 사전 통고도 없이 급박하게 결정된 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인 9월30일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투표일이었으니 정부로서도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정주영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위원장 자리에 앉게 됐지만, 국가를 위한 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유력시되던 곳은 일본의 나고야였다. 뒤늦게 뛰어든 한국이 개최지로 선정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더욱이 국내 유력인사들조차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정주영은 9월20일, 개최지 결정투표를 하게 될 독일의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그는 현대 프랑크푸르트 지점의 전 직원과 그 부인들, 밥하는 아주머니들까지 바덴바덴으로 옮겨 유치활동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정주영은 절망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의 기질이었다. 그리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일 때 그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곤 했다. 정주영은 자신의 이름을 써서 82명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방으로 꽃바구니를 하나씩 보냈다. 이 꽃바구니는 유치 대표단을 돕기 위해 동원된 부인들이 꽃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골라 만든 것이었다.

    다음날 각국 IOC 위원들은 한국 유치대표단을 볼 때마다 반색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내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때 일본 대표단은 IOC 위원 부부들에게 최고급 일제 손목시계를 선물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투표일 전날인 9월29일에 실시된 각국 기자단의 모의투표에서는 나고야가 서울보다 우세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바람에 나고야 유치대표단은 미리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 동안 유치활동을 펴온 결과 82명의 위원 중 적어도 46명은 서울에 표를 던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9월30일 오후 3시, 제24회 올림픽 개최지 발표의 순간이 왔다.

    “쎄울 코리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프랑스어로 이렇게 외쳤다. 정주영이 예상했던 46표보다 6표나 더 많은 52표를 얻어 서울시가 88 올림픽 개최지로 최종 결정된 것이다.

    기적처럼 살아난 김윤규

    89년 정주영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서울 본사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회장님, 비보(悲報)입니다.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에서 KAL기가 추락했습니다.”

    정주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행기가 추락했다면 승객의 생존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 그런데 사고기에는 김윤규 당시 전무를 포함해 여덟 명의 현대건설 임직원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정주영은 서울을 떠나기 전에 김윤규 전무가 발전소 공사 협상 관계로 리비아 전력청 장관을 만나러 간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는데, 시계가 나빠 비행기가 공항 건물을 들이받으면서 두 동강이가 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서울 본사에서 다시 걸려온 전화 보고에 의하면 승객 7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김윤규는 살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김전무를 비롯, 부상당한 현대 직원들 모두 서울로 후송해 서울중앙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

    정주영은 비행기 추락 사고가 난 현장이나 인근 병원들이 아비규환일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피가 모자라 부상자들에 대한 수혈도 어려운 실정일 것이라 예상하고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소련에서의 공식 행사를 서둘러 마친 그는 예정돼 있던 일정을 당겨 서둘러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정주영은 서울중앙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회장님! 소련에서 고생 많이 하셨죠?”

    정주영이 병실로 들어서자 환자복을 입은 김윤규가 문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넙죽 인사를 했다.

    “아니, 너, 이래도 돼? 윤규, 너 멀쩡하구나?”

    정주영은 김윤규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예, 멀쩡합니다. 재수가 좋았어요.”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김윤규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올리브 나무 밭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비행기 동체는 저 멀리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는 거짓말처럼 의자 위에 안전벨트를 맨채 앉아 있었다. 비행기 동체가 두 동강 나면서 그는 의자에 묶인 채 공중에 붕 떠서 올리브 나무 밭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기적처럼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가 부상자 명단에 오른 것은 일단 사고 비행기에 탔던 사람은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멀쩡한 몸으로 입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회장님, 발전소 공사 협상은 성사시켰습니다.”

    “아니, 그새 어떻게?”

    “몸은 멀쩡한데 병원에 누워 있으려니 환장하겠더라구요. 리비아 전력청 장관도 만나야 하겠고. 그런데 병원에서는 환자라면서 밖에도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생각다 못해 몰래 환자복 대신 현대건설 작업복으로 바꿔 입고 전력청 장관을 만나러 갔지요. 장관이 깜짝 놀라더군요. 비행기 사고로 몸도 불편할텐데 왔다면서 저더러 소파에 누워서 얘기하라고 하더군요. 소파에 누워서 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 잘 했다. 너 몸도 멀쩡한데 병원에 누워 있으면 뭘하냐? 마침 내일 일본에 갈 일이 있는데 나와 같이 가자.”

    정주영의 말에 김윤규도 같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일본에 가서 일을 끝낸 정주영은 김윤규와 함께 온천에서 휴식도 취하고 여행도 즐기며 심신을 달랬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주영이 말했다.

    “난 윤규 네가 돌아버린 게 아닌가 하고 무척 걱정했는데, 이젠 안심이다. 일본 여행을 하면서 보니 넌 분명 정상이야. 세상에 비행기에서 떨어졌는데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나? 내가 병실에 들어설 때 네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한 것도 워낙 충격을 많이 받아서 그런 줄 알았어. 그래서 너같은 사람은 병원에 누워 있는 것보다 차라리 강행군을 시키는 것이 충격을 이겨내는 데 좋겠다 싶어 일본에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정주영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김윤규의 손을 꼭 잡았다. 일견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면모와는 달리 그는 이렇듯 각별한 부하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주영식 물막이 공법

    서산간척지 공사 당시 현대건설은 A지구와 B지구로 나눠 공사를 했다. B지구 공사는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A지구의 경우 최종 물막이 공사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A지구 방조제 길이는 총 6400m였는데, 양쪽에서 방조제를 쌓아오던 중 가운데 270m를 남겨놓고 공사가 중단됐다. 초속 8m의 무시무시한 급류가 흐르고 있어서 승용차만한 바윗덩어리를 던져넣어도 금세 물살에 쓸려내려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B지구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 때는 4.5t짜리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두세 개씩 묶은 후 바지선으로 운반해 떨어뜨렸다. 그러나 A지구에서는 워낙 유속이 빨라 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철사로 돌망태를 엮어 15t 트럭과 30t 트럭으로 매일 돌을 실어다 쏟아붓고 있는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현장감독의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많은 돌망태를 쏟아부어도 코끼리에게 비스킷을 먹이는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였다. 현대가 가진 장비를 총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간척공사의 최종 물막이 공법으로는 흔히 케이블과 바지선 등 해상장비를 동원해 물막이 구간의 바닥을 점차 높여가는 점고식(漸高式), 덤프트럭 등 육상장비를 이용해 공간을 점차 좁혀가며 축조하는 점축식(漸縮式), 그리고 이 두 공법을 적절히 병행하는 병행식 등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A지구 최종 물막이 공사에는 세 가지 방법이 다 무용지물이었다.

    정주영은 고심했다. 시간을 끌수록 돈과 인력이 낭비되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살이 거세 해상장비로도 안 되고, 육상장비로도 안 된다? 그러면 그 거센 물살을 죽이는 방법을 쓰면 되지 않겠어?”

    정주영은 그답게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폈다. 어떤 일이든 난관에 부딪히면 난관의 원인이 되는 것을 찾아 제거하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글쎄요. 물살을 어떤 방법으로 죽이느냐, 그게 문제겠죠.”

    공사 현장 책임자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머리를 쓰라구. 머리는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야. 이럴 때 쓰라구 붙어 있는 거야. 거 왜 고철로 팔아먹으려고 사온 유조선 있지? 그걸 당장 서산 앞바다로 끌고 와.”

    정주영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현대는 해체해서 고철로 팔기 위해 30억 원을 주고 스웨덴에서 사온 폐(廢)유조선을 울산 앞바다에 묶어두고 있었다. 정주영의 지시에 따라 332m 길이의 고철선이 울산에서 서산으로 옮겨졌다. 이른바 ‘정주영 공법’ 또는 ‘유조선 공법’이라 불리게 된 세계 최초의 최종 물막이 공법이 시작된 것이다.

    D데이인 84년 2월25일 새벽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주영이 개발한 새로운 공법으로 물막이 공사 시범을 보인다는 소문이 나자 각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현장취재에 부산했다.

    하지만 새벽 4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 차례에 걸쳐 폐유조선을 물막이 현장으로 끌어오려 했으나 물살이 너무 거세 실패하고 말았다. 6시가 됐는데도 유조선은 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직접 해보지.”

    정주영은 작은 배를 타고 유조선으로 건너가 진두지휘를 했다.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을 무렵인 저녁 7시경, 필사적인 노력 끝에 썰물을 이용해 유조선을 접안시켰다. 그러나 배 양쪽 끝에 20m 정도의 틈이 생겨 그 사이로 거친 급류가 급속하게 내해 쪽을 향해 빨려들어갔다. 작업은 철야로 진행됐고, 밤 11시 경에 겨우 유조선의 꽁무니 쪽 틈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썰물 때의 노역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조선은 저만큼 먼 바다로 떠밀려가 있었다. 그때까지 유조선 탱크에 물이 차 있지 않아 완전히 침하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 동안의 노력이 헛고생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지. 예인선을 다시 불러!”

    정주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정주영식 유조선 물막이 공법’은 성공을 거뒀다. 이 공사가 성공하면서 정주영은 290억 원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사상 초유의 이 공법은 미국의 ‘뉴스위크’지와 ‘타임’지에 소개됐으며, 그 후 영국 런던 템스강 상류 방조제 공사를 맡은 세계적인 철구조물 회사에서 이 공법에 대해 문의해 오기도 했다. ‘정주영 공법’이라고 이름붙은 이 유조선 공법이 세계적인 물막이 공사의 신공법으로 기록된 것이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 나폴레옹, 링컨, 칭기즈칸 등의 위인전을 많이 읽었으며, 또한 그들을 존경했다. 그가 존경했던 인물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랐으며, 강인한 정신력과 집념어린 노력으로 자신의 뜻을 이뤄 마침내 정상에 오른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주영에게도 꿈이 많았다. 그의 소년시절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 그러나 조금 나이가 들자 그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주영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그의 모친이 올라와 그는 시간을 내어 서울 시내를 구경시켜 드렸다. 전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며 곳곳의 명소를 구경하는데, 마침 중앙청 앞에서 내렸을 때 정주영이 모친에게 말했다.

    “어머니, 여기가 중앙청입니다.”

    “그러냐?”

    “저는 이 서울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거예요. 그래서 저 중앙청처럼 큰 집에서 살 겁니다. 어머니도 저런 집에서 잘 모실게요.”

    정주영의 말에 모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얘, 짚신 한 켤레 달랑 신고 서울에 온 촌녀석이 뭘 가지고 그런 갑부가 되고 저런 큰 집에서 살아? 말이야 고맙지만, 너무 헛된 꿈은 갖지 말거라.”

    “두고 보십시오. 제가 꼭 그렇게 할 겁니다.”

    정주영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중앙청 같은 큰 집’에서 살겠다는 정주영의 꿈은, 모친의 말처럼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다. 그 꿈은 현실이 됐으며, 그는 한국 최고의 갑부가 됐다.

    그런데 7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정주영은 ‘중앙청 같은 큰 집’에서 다시 ‘청와대로 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92년 1월1일, 그는 새해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인 가족들에게 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가족 중 단 한 사람도 정주영의 뜻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던 기업이나 계속하지, 다 늦게 정치판에는 왜 뛰어들려 하느냐며 만류하고 나섰다.

    “정치판이 시궁창이란 걸 내 모르는 바 아니다. 경제만 잘 되고 있다면 누가 날 정치판에 끌어들이려 해도 끌려 들어갈 내가 아니다.”

    이미 정주영은 확고부동하게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는 외국 언론에서 꼬집은 것처럼 ‘포니 수준을 못 따라오는 한국의 정치 수준’이란 비난에 공감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실패했을 경우 현대가 당하게 될 불이익을 생각하셔야죠.”

    이렇게 말하는 동생들에게 정주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옛날에 짚신 한 켤레 신고 맨몸으로 고향을 떠난 나다. 우리가 이제 망한다고 해도 구두는 신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라꼴이 이 모양인데 그냥 앉아서 정치 욕이나 하며 내 안전만 도모하는 게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할 일이냐? 시궁창을 시궁창인 채로 내버려두면 언제까지나 시궁창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걸 내가 해보겠다는 거야. 모두들 우거짓국 먹고 살 각오를 해둬라. 죽으면 맨몸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망한다고 해도 아까울 게 없다.”

    열흘 후인 92년 1월10일 정주영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결국 그는 낙선했고, 혹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그가 인생에서 결정적인 실패를 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정주영 자신은 결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선거에 나선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대선 이후 정주영은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게다가 YS 정권 말기에는 IMF 한파가 불어닥쳤다. 현대는 물론, 온 국민에게 시련을 안겨준 한파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시련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이미 온갖 시련을 다 겪었기 때문에 어떤 혹독한 시련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일단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소떼 몰고 판문점 넘어

    언론에서는 ‘정주영의 소떼 방북’을 보도하면서 ‘소떼 드라마’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고향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마치 잘 꾸며진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 같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기획자이며 연출자이자 주연배우는 정주영이었다.

    어려서부터 정주영은 소와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부친이 이웃 마을에 갔다가 소 판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을 때, 그는 뛰어난 기지로 진짜 도둑을 찾아내 아버지의 누명을 벗게 해준 일이 있다. 그는 17세 때 세 번째로 가출하면서 부친이 소를 팔아 손에 쥔 돈 70원을 가지고 도망쳐 그 돈으로 서울에서 부기학원을 다녔다.

    고향 생각을 할 때마다 정주영은 늘 농사 지을 땅이 없어 한숨짓던 부친을 떠올렸다. 소를 재산목록 1호로 여길 만큼 귀중하게 여기던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그는 부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서산 간척사업으로 여의도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땅을 만들었고, 그 땅에서 기른 소 1001마리를 북한에 보내게 된 것이다.

    소떼 드라마의 시나리오가 구체적으로 작성된 것은 97년 11월, 북한측에서 정주영에게 경제협력 활성화를 희망한다는 요지의 서한을 전달해온 이후부터였다. 사실상 그 이전까지는 시나리오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정도였다. 김일성 사망 후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혼선 등으로 경제협력도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에 방북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말년에 와서 북한이 먼저 그에게 방북 의사를 물어왔다. 당시는 한창 대선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현대와 북한은 중국 베이징에서 조용히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98년 연초에야 정주영은 현대그룹 핵심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로소 소떼 드라마 기획을 공개했다.

    “금년 안으로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할 계획입니다.”

    상당수 간부들은 정 명예회장의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경협이 중단된 마당에 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소떼를 몰고 간다는 것은 어쩌면 희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98년 2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남북경협이 다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현대는 발빠른 행보로 대북사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정주영의 소떼몰이 방북이 결코 희극적인 발상이 아닌, 실현 가능한 일로 비치게 된 것이다.

    현대측의 대북사업 책임자는 현대건설 부사장 김윤규였으며, 곧 방북 절차 등 제반 실무를 담당할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북한과의 접촉에 나섰다. 정주영은 실무자들을 통해 북한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도록 했다. 첫째, 고향인 통천을 비롯한 북한에 곡물과 소를 지원한다, 둘째,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다, 셋째,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야 한다.

    마지막 승부, 대북사업

    그런데 북한측에서는 소 500마리로는 부족하니 더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아예 1000마리를 보내자구.”

    정주영은 더 생각해보지 않고 선뜻 말했다. 소 500마리만 해도 시가로 9억 원 가량인데, 그것을 다시 두 배로 늘린 것이었다.

    한때 소 운송 문제에 대해 여러 방안이 검토됐다. 육로로 가되 판문점을 통과하지 않고 가거나, 배에 실어 바다로 가는 방안도 검토됐다. 그러나 정주영은 “소떼는 반드시 판문점을 거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정주영은 서산농장에다 소를 기를 때부터 그런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민간인 최초로 정식 절차를 밟아 판문점을 통과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더구나 소떼를 선물로 가지고 방북한다는 사실에는 정치가 아닌 경제로 분단의 벽을 허물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 언론은 소떼 방북이라는 기이한 드라마에 촉각을 세웠다. 이는 세계적인 이벤트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소떼가 배를 타고 방북했다면 그처럼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98년 6월16일 방북하는 날 새벽에 정주영은 돼지꿈을 꿈었다. 소떼를 몰고 가는데 돼지꿈이라니, 길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터져도 뭔가 큰 프로젝트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 전날 밤 소떼 행렬이 서산농장을 떠나면서 장중한 드라마는 시작됐다. 소를 실은 50대의 트럭이 밤새 줄을 이어 달려 판문점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방송사들은 트럭 행렬을 공중 촬영까지 하며 중계방송했으며, 판문점에는 전 세계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경쟁에 열을 올렸다.

    정주영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그는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세계적인 경제 이벤트의 주인공이 됐다. 이 드라마 한 편으로 현대는 세계인들에게 뚜렷한 이미지를 심었으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얻기 힘든 커다란 광고효과를 거두게 했다.

    정주영은 소 1000마리를 북한에 보내기로 했지만, 마지막 순간 그의 머리는 또 한 번 기발하게 회전했다.

    “이봐! 이왕이면 한 마리 더 보태서 1001마리로 해.”

    정주영이 실무진에게 이렇게 말하자 현대 간부들은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한 마리를 더 보내라구요?”

    “1000마리로 딱 끊으면 서운하잖아. 또 이번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정주영은 1000마리에다 1마리를 더 보탬으로써 앞으로 이런 행사가 계속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소떼로 물꼬를 튼 정주영의 대북사업은 일생일대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고향인 북한 땅에 소로 밭을 갈아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그것을 수확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벌써부터 그의 대북사업에 대해 결과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는 어쩌면 20년 후의 통일시대를 내다보고 대북사업의 토대를 닦아놓은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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