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호

[신동아 만평 ‘안마봉’] 2026년 부동산, 서민을 밀어냈다

  •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lunapiena7@naver.com

    입력2026-04-28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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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 만평 ‘안마봉’은 과거 ‘신동아’와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그림체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 만평입니다.
    ⓒ정승혜

    ⓒ정승혜

    뭔가 좀 달라질까 싶었는데 여전히 서민은 애달프다. 정부의 고강도 대출 규제와 공급 부족 등으로 중저가 아파트값이 치솟고, 전세난도 심화되면서 서민들이 밀려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장기보유특별공제(장특공) 폐지 논의가 맞물리면 전세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질 거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래저래 고달프다.

    4월 27일 KB부동산 4월 전국 주택가격 동향(13일 기준)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은 6억8147만 원으로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서울의 중위 전세가격은 6억 원으로, 2022년 9월(6억658만 원) 이후 처음 6억 원을 넘어섰다. 구축 대단지 전세 물건이 많았던 외곽지역이 전셋값 상승을 이끌었다.

    서울 한강 이북 14개 지역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도 지난 3월 사상 첫 11억 원을 넘었는데(11억1831만 원), 이는 8개월 만에 1억 원 이상 오른 것이다. 

    강북권 집값 상승은 대출 규제 탓이 컸다. 지난해 정부의 ‘10·15대책’에 따라 15억 원 이하 아파트에 대해서는 최대 6억 원, 15억 원 초과~25억 원 이하는 4억 원, 25억 원 초과 아파트는 2억 원으로 대출 한도가 제한됐다. 이에 따라 15억 원 미만 중저가 단지가 많은 강북권으로 매수세가 집중된 것이다. 

    전세 매물이 급감한 것도 한몫했다. 올해 초 2만3060건이던 서울 전세 매물은 4월 들어 3분의 1 가량 줄었는데, 노원구와 중랑구, 금천구 등의 전세 매물 감소 폭이 컸다. 



    10·15대책으로 서울 전역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갭투자(전세 끼고 매입)’를 봉쇄한 영향도 있다. 투기를 막자는 의도였지만, 전세를 놓는 갭투자 집주인이 사라지면서 결과적으로 매물 감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그러니 서울 외곽에 살던 전세 세입자들은 안양과 용인, 구리 등 서울 인접 지역으로 옮겨가 이 지역 집값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주택난이 사회 초년생들의 피해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깡통 전세’ 수법으로 청년들의 임대 보증금 52억 원을 가로챈 일당 49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다. 대학생 등 피해자 22명은 거금을 떼였다.

    부동산대책은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망치로 때려 넣는 ‘두더지게임’이 아니라, 시장과 수요자를 달래며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양치기’라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 

    1932년 
    도로공사, 빈민을 밀어냈다

    <어대로 가나?>- ‘신동아’ 1932년 10월호

    <어대로 가나?>- ‘신동아’ 1932년 10월호

    1932년 10월호 ‘신동아’는 ‘광주면’이 ‘도로공사’라는 몽둥이를 들고 ‘광주 빈민(貧民)’을 낭떠러지로 몰아가는 만평을 실었다. 이른바 ‘광주궁민(窮民) 사건’이었다. 이 그림은 식민지 조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의 자리에서 밀려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30년대 초 조선은 세계대공황 여파로 농촌 경제가 흔들리고 도시빈민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살길을 잃은 사람들은 읍내와 도시 변두리로 몰려들었지만, 가난한 조선인들의 삶은 늘 불안정했고, 그들을 지원해야 할 행정은 그 불안을 덜어주기보다 임시적·단편적 행정으로 문제를 키우는 쪽에 가까웠다. 이는 광주궁민 사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광주궁민 사건은 1920년대 후반 광주천 주변 하천 정비사업으로 생긴 빈터에 형성된 빈민 가옥을 1932년 7월 철거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사건이다. 

    1932년 9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 ‘다시 광주궁민문제에 대하야’에 따르면, 광주읍 당국은 도로공사를 이유로 광주읍 유지에 살던 200여 명의 집을 철거했다. 광주는 1931년 ‘읍’으로 승격했는데, ‘광주면’ 표기는 옛 지명에 익숙한 독자들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살 곳을 잃었고, 총독부도 새 거주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광주읍 당국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집은 먼저 헐어놓고, 옮겨 살 곳은 마련하지 않은 것이다.

    대책 없이 쫓겨난 이들을 위해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읍 당국과 교섭을 벌였으나 진전이 없었고, 결국 총독과의 면담 이후에야 일부 빈민들이 이주하게 된다. 

    이 만평이 날카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을 낸다는 ‘행정의 몽둥이’를 들고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한 장면에 압축했다.  

    행정은 공익과 정비를 내세웠지만, 그 공익 속에 가난한 조선인들의 삶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만평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다. 개발의 이름으로 사람을 밀어내고, 그 책임마저 약자에게 떠넘기던 시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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