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깊어가는 도처의 한숨 소리. 미국 등 세계경제 침체로 수출 급락에 수요 부진, 실업자 급증이 겹치면서 경제 위기가 날로 심화되던 지난해 11월28일, 홍콩 첵랍콕국제공항 부근 한 국수가게에서의 일이다. 둥젠화(董建華)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수반)은 이날 각료들을 대동, 쭌완 지역의 환경 및 위생 실태 등을 돌아보며 주민들을 격려하던 중 한 주민으로부터 악수를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수가게 주인 쩌우씨는, 집권 4년 만에 지지도가 바닥세로 급락한 둥장관 일행이 가게 앞에서 악수를 청하자 팔짱을 낀 채 “나는 악수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홍콩 주민 누구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둥장관을 면전에서 공박했다.
국수집 주인의 항변은 홍콩 주권이 1997년 7월1일 중국에 반환된 뒤 4년이 흐른 지금 680만 주민들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주권 반환 당시 중국정부가 확약한 ‘1국2체제’로 상징되는 ‘50년 고도자치(高度自治)’가 수년 만에 ‘1국1체제’로 변질되는 조짐을 보임에 따라 홍콩 주민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돼 있다. 게다가 미국경제의 침체와 중국의 수출 감소 등으로 홍콩경제가 지난해 마이너스 1.9% 성장을 기록하고, 실업률도 기록적인 6%대를 돌파하는 등 경제난이 날로 심화되며 정치·경제적 불안감 또한 고조되고 있는 형편이다.
홍콩에서는 지난해 개인 파산 신청자 수가 2000년의 두 배 수준인 1만명을 돌파해 금융기관들이 정부에 긴급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파산관리국(Official Receiver) 자료에 따르면 2001년 10월말 현재 9705명이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으며 12월중 신청자를 포함하면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전년도 파산 신청 건수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파산 신청자의 약 80%는 실업자 또는 신용카드 과도 사용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파산 신청자 수가 이렇게 급증함에 따라 개인 파산 신청을 받아들인 뒤 4년 후 신용을 회복해주던 종전의 부채 청산 관행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반발이 거세질 전망이다.
그러나 파산관리국의 이먼 오코넬은, 금융기관들의 대책 수립 촉구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단기내에 파산 신청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밝혀 이를 둘러싼 당국과 금융기관간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됐다. 지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후 급증해온 개인 파산 신청 건수는 올들어 홍콩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1998년 1362건에 불과했던 개인 파산 신청 건수는 1999년 5487건으로 폭등했다. 1990년대 초반엔 연간 사례가 수백 건에 그쳤었다. 개인 파산자 급증 요인은 지난해 8~10월 5.5%를 기록한 높은 실업률과 과도한 신용카드 사용 및 대출, 부동산 시장 침체 등인 것으로 보인다.
홍콩 금융전문가들은 올해 실업난이 더욱 가중되고 아르헨티나 디폴트 사태로 홍콩의 통화 불안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 악화에 이어 ‘9·11 테러’까지 발생해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져 실업률이, 아시아 금융폭풍 영향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1998~99년의 6.4%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지구상의 유일한 ‘달러 페그제 형제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통화 대폭 절하를 통해 페그제(고정환율제)를 사실상 폐지함에 따라 홍콩달러의 불안도 점차 가중되고 있다.
지난해 12월26일자 영자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한 칼럼은 “1998년 금융위기 때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빴지만 모두들 ‘한 번 붙어보자’는 파이팅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고 경기 반등에 대한 기대감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도 못쓴 채 쓰디쓴 알약을 삼켜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해 있을 뿐”이라며 경제위기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해온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뒤틀린 심사를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약 270만 홍콩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자랑하는 둥 행정장관을 비롯한 홍콩정부 각료들은 이렇다할 경기 부양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제문제뿐 아니라 중국 중앙정부가 철석같이 약속한 ‘50년 고도자치 보장’도 지켜지지 않고 있고 헌법격인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에 명시된 1국2체제를 지키려는 의지도 부족한 정부에 주민들은 (특히 중산층이나 지식층)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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