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이 만든 8도 체제 현실과 맞지 않아
갑오개혁서도 행정구역 개편 시도할 정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행정구역 개편안 필요하지만…
靑 20조 원 예산 걸고 졸속 통합 시도, 일종의 게리멘더링?
2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의 일부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이 직접 요청한 ‘충남·대전 통합’ 무산…靑, (더불어)민주당에 부글”이라는 제목의 같은 날 조선비즈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대통령의 취지는 분명하다. 보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행정구역 통합은 “야당과 시‧도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100%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해당 지역이 대체로 공감하고 정치권도 대체로 동의해야 통합할 수 있”는 데다 해당 지역에서 의견이 합치되고 있지 않으니 무리하게 밀어붙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원론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정부는 6·3 지방선거 이전에 행정통합 논의를 마무리하려 들기 때문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2월 11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2월 말까지 관련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않으면 (행정구역 통합은) 불가능하다”며 “여야의 당리당략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도록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2월 1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32회 국회 제6차 본회의에서 행정구역 통합에 관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동아DB
행정구역 통합이 지닌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현존하거나 논의 중인 지방자치단체 이름 중 ‘특별’이 들어간 것을 나열해 보자. 서울특별시,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충남대전통합특별시, 전북특별자치도, 전남광주특별시, 강원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대구경북통합특별시, 경남부산통합특별시,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 광역 지자체 중에서는 충청북도를 제외한 모두가 ‘특별’한 땅이거나 그런 땅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명칭만 봐도 석연치 않다. 서울도 특별하고, 강원도 특별하고, 전북도 특별하고, 제주도 세종도 특별하다. 충남과 전남과 경남 경북도 모두 특별해지기 위해 법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특별하다면 대체 특별하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방선거 이전에 끝낸다’는 작위적 데드라인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 ‘정부 예산 차지 경쟁’이다. 1월 16일 김 총리는 정부 서울 청사에서 행정통합 인센티브 브리핑을 열고 “통합 특별시에 연간 최대 5조원, 4년간 최대 20조 원 수준의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있는 ‘광주·전남 행정통합 특별법’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특별법은 전남광주특별시에 서울시에 준하는 지위와 차관급의 부시장 4인을 두며, 조선 사업을 중점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일단 ‘특별시’가 되었으니 성공 아닐까. 지역의 여론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역에서 제시된 요구안에는 자율 인사권과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면제가 포함돼 있었는데 실제로는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시’로서 ‘특별’하게 예타 없이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불만이라는 이야기다.
대구‧경북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김재원 국민의힘 경북도지사 예비후보가 대구·경북 행정 통합 특별법에 대해 내놓은 주장을 보면 그렇다. 이미 예타 면제를 받은 대구‧경북통합신공항에 대한 국비 지원 규정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가 통합되면서 발생하게 될 행정 혼란, 역할 분담, 장기적 비전 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이 기회에 더 많은 중앙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적의식만 도드라질 뿐이다.

강기정 광주시장(왼쪽)과 김영록 전남지사가 1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광주전남 통합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제4차 간담회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이 모든 난리가 벌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선거 이전에 끝낸다’는 작위적 데드라인을 걸고 ‘20조’라는 밑도 끝도 없이 큰 예산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전남광주특별시’가 되겠다며 가장 먼저 손을 든 지자체에 그 20조원의 포상 중 얼마를 어떻게 나눠줄지에 대한 법적 근거부터 명확하지 않다.
작금의 행정 통합 논의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헬레네의 사과’를 연상시킨다. 사과에 적힌 ‘그대들 중 가장 훌륭한 미인에게’라는 도발적 문구는 신들의 여왕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3신의 불화를 불러왔다 이 불화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대단위 행정 통합을 하면 20조의 예산을 주겠다’는 청와대의 도발이 정국을 혼돈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1000년 전 만든 8도 체제 변화는 필요
대통령에게는 국가 전체의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의제 설정권’이 있다. 인사권과 달리 법으로 규정된 권한은 아니다. 꼭 대통령이 아니고 심지어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나라 전체의 의제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국가 전체의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등의 일에서 대통령이 다른 그 누구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 대통령이 어떤 계산으로 이 의제를 꺼내 들었건 전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이상 멈출 수는 없다. 지금부터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과 지방자치제 수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충실한 논의를 축적해 나간 후, 다음 대선을 앞두고, 혹은 차기 정부가 수립된 후 완료될 과제로 다루어야 한다.
이 대통령의 발언으로 돌아가 보자. 광역 행정구역이 ‘1000년의 역사’를 지녔다니, 무슨 말일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전국 8도 체제의 원형은 고려 8대 임금 현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5도 양계(양광, 경상, 전라, 서해, 교주 5도와 북계, 동계의 양계)’ 체제가 도입된 것이다. 현종의 재위 기간은 1009년부터 1031년까지이므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우리가 아는 땅의 구분은 천 년의 역사가 있는 셈이다.

고려 현종 시기(1018년 전후) 정비된 행정구역 체제인 ‘5도 양계’.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대대적인 개편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4년 제2차 갑오개혁 당시 전국을 23부 아래 337개 군으로 분할한 23부제가 도입된 바 있다. 부-군 체제로 이원화해 행정 효율을 높이며, 각 지역 주민 생활권에 맞춰 행정구역을 고치는 방안이었다. 갑오개혁 실패와 함께 23부제는 역사의 유물이 돼버렸다. 식민지 조선의 통치에 있어서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일제 역시 익숙한 8도 체제를 유지했다.
8도 체제는 189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도 현실과 맞지 않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2020년대인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국가의 산업 기반이 농업에서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결정적으로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행정구역 통합 논의가 보여주고 있다시피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점 더 퍼져가고 있다.
졸속 논의는 ‘선거용’ 의심 살 공산 커
오늘날 한국인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존의 행정구역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시민들의 생활과 기업이 이끄는 산업을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대한민국은 3대 메가시티와 몇 개의 소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의 도시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도시문헌학자 김시덕 박사의 저서 ‘한국 도시의 미래’에 따르면 그렇다.“① 서울시를 중심으로 강원도와 충청남도 일부 도시부·공업지대를 포괄하는 대서울권
② 북한의 공격에서 안전한 콤비나트(공업지대)로서 구상된 포항·울산·부산·창원·거제·사천·진주·하동·여수·순천·광양의 동남권
③ 북한의 재래식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며, 한반도 전체가 아닌 대한민국의 국토 중심에 자리한 대전·세종·청주·계룡·논산 등에 국가 기관을 집중시킴으로써 성립한 중부권”
한국인은 이렇게 크게 나눠볼 수 있는 세 개의 메가시티와 몇 개의 소권역에 모여 살고 있다. 가령 동남권이라는 메가시티 혹은 도시-연속체를 놓고 생각해 보자. 영‧호남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순천이나 광양에 사는 시민에게는 호남의 대표 도시인 광주보다는 창원과 거제가 더욱 심리적으로는 물론 생활 반경에도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문헌학자 김시덕 박사의 저서 ‘한국 도시의 미래’(2024). 포레스트북스
8도제는 1000년 전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생활은 ‘전라도’나 ‘경상도’ 같은 추상적 범주 위에 성립하고 있지 않다.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야 없지만 기존의 행정 구역 구분이 국민의 생활과 맞지 않게 헛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 위에 지방자치제가 추가되면서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각 지자체가 중앙 예산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너도나도 앞다투어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는 촌극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지방자치뿐 아니라 국토 균형 발전 역시 점점 더 요원해질 뿐이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졸속 행정통합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 본인 임기 내에 마무리 짓겠다는 모종의 소명 의식이 있다면, 더더욱 그 시점을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야 마땅하다. 지방선거 전에 행정통합 논의를 마무리하려 한다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보려 해도 선거구 뒤틀기 전략, 이른바 게리멘더링(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위)이라는 의심을 살 공산이 크다. 대통령의 의제 설정력을 이런 식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대신 현실에 맞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행정구역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 행정구역 개편에 맞춰, 각 지자체가 중앙 예산을 두고 경쟁하는 식의 지방자치 역시 전면 수정하거나 대폭 축소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이장과 군수를 직선으로 뽑고 기초 단위 의회를 운영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인지, 이제는 국민적 의견을 다시 한번 모아볼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행정구역을 넘어, 다음 1000년을 향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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