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창석은 김 위원장의 7촌 조카, ‘주변부 로열 패밀리’
- 40대 친중파 테크노크라트들 3대 세습에 분노한 듯
- “김정일 포기한 중국은 알고도 방조, 묵인”
- 정권 위해세력 제거하며 김 위원장이 내건 ‘핑계’ 가능성
- 장성택과 측근들 실각 등 권력변화와의 관련성 주목
장면2. 7월 중순, 한 탈북 관리는 대북정보당국 관계자로부터 ‘허창석’이라는 인물을 알고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허창석은 허담의 조카이며 대중국 무역업무에 종사하던 경제일꾼인데, 용천 사건과 관련돼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허창석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사항이나 의견이 필요해 질의했다는 것이 이 정보당국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장면3. 7월말, 북한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한 정부기관 연구원은 업무 파트너인 정보기관 관계자로부터 최근 준비중이라는 한 보고서의 내용을 듣게 됐다. ‘용천 폭발은 김정일 암살 시도였으며 주동자인 허창석이라는 인물은 사건 직후에 체포, 처형됐다’는 것이다. 이 정보기관 관계자는 연구원에게 그 보고서의 타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지난 4월22일 오후 1시 평북 용천군 용천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발사고. 4월25일 현재 무려 161명이 사망하고 1300여명이 부상당한 초유의 대형사고가 발생한 지 다섯 달이 지났다. 국제사회의 협력에 힘입어 사고현장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폭발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둘러싼 갖가지 정황이 음모론이 제기되기에 더없이 적합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열차가 통과하는 날 벌어진 사건이었던 만큼, 사고 직후 외신은 ‘암살시도설’부터 쏟아냈다. 이후 “40t의 질산암모늄 비료를 실은 화차와 유류를 실은 화차를 교체 연결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북한의 공식설명이 있었지만 국내외 언론들은 스커드 미사일 폭발 사고설, 김정일 위원장 자작극설 등 다양한 가설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동아’는 대북정보당국이 지난 7월 무렵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암살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복수의 정부 안팎 취재원으로부터 확인했다. ‘1991년 사망한 허담 전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조카인 허창석 등 8명이 사건 직후인 4월말 김 위원장 암살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됐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주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간접경로를 통해 수집된 첩보로 처음 ‘암살시도’의 단초를 파악한 대북정보당국은 중국측 정보통을 통해 이를 교차확인하며 더욱 정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국내에 있는 북한 출신 인사들, 특히 고위관료나 상류층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허창석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확인작업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7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고 이 무렵 정보기관은 종합한 정보를 극소수의 북한 연구자들과 부분적으로 공유하며 타당성을 검토해 7월말 보고서로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확인작업에 참여한 북한 출신 인사들과 중국측 소식통, 검토작업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철저한 보안준수를 당부받았지만, 워낙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작업이어서 부분적으로나마 이야기가 새어나온 것으로 보인다. 8월 무렵에는 정부 주변 북한 연구기관이나 소수의 지식층 탈북자 그룹 사이에서 희미하게나마 ‘공훈 집안의 자손이 용천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암살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주동자 7~8명, 동조자 수십명”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문제의 허창석이 1991년 사망한 허담 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조카라고 알려져 있다는 점, 또한 체포된 것은 허창석 혼자가 아니라 모두 8명(허창석을 포함한 숫자인지 제외한 숫자인지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가 다르다)으로 이들이 함께 처형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용천사고가 발생한 직후인 4월 말이고 처형은 5월 초에 비밀리에 이루어졌다는 전언이다. 모두 40대 중반의 테크노크라트로 무역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신진 경제일꾼들이며, 허창석 이외의 사람들도 출신 성분이 훌륭한 이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이 별도로 체포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동자들과는 달리 처형되지는 않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주동자들의 가족이나 직장상사 등 감독책임을 문책당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탈북 인사들의 분석이다.
반면 정보당국의 조사작업을 자문한 탈북 관리들과 북한연구자들은 폭탄테러에 의한 암살시도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암살방법에 대해서는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어떤 경로로 어떤 폭발물과 기폭장치를 설치했는지 등에 대해 정보기관이 정보를 수집하고도 전달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아예 파악되지 않았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다만 한 북한연구자는 “휴대전화를 기폭장치로 활용한 것 같다는 외신보도가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부인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지는 6월13일자 신문에서 평양의 소식통을 인용해 “폭발사고 현장에서 기폭장치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 접착테이프가 붙어 있는 휴대전화 잔해가 발견되었다. 북한 당국은 그 휴대전화의 소유자를 추적해 조사를 벌였으나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인민보안성은 평양 주민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1만여대를 압수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분노한 ‘주변부 로열 패밀리’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과연 허창석이 김정일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동기는 무엇이며, 그 배후는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를 유추하기 위해서는 허창석 본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허창석은 1970년대 북한 외교부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주석의 핵심 측근이었던 허담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허담의 아내이자 허창석의 숙모가 되는 김정숙 현 ‘민주조선’ 책임주필이 김정일 위원장의 사촌누나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허창석은 김정일 위원장의 사촌매형의 조카가 된다. 인척관계로는 7촌이므로 한국에서였다면 크게 의미 있는 관계가 아니지만, ‘로열 패밀리’의 위세가 엄청난 북한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허담은 이미 사망했지만 1982년부터 현재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1988년부터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겸직하고 있는 김정숙은 지금도 최고 실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명문가 출신인 허창석이 김 위원장 암살을 시도할 까닭이 있을까. 정보기관의 확인작업 자문에 응한 이들을 비롯해 북한 출신 인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개연성은 ‘직계 로열 패밀리에 대한 분노’다.
우선 무역 등의 경제실무에 종사하던 허창석과 그의 동료그룹은 중국 등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한 까닭에 국제사회의 흐름이나 북한의 현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40대 중반이라는 그의 나이는, 그가 한창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직계 인척이 아닌 까닭에 최고위직까지 나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른바 ‘주변부 로열 패밀리’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최근 평양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3세대 세습과정이었을 공산이 크다고 북한 출신 인사들은 분석했다.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 김정철의 나이가 불과 스물셋임을 감안하면, 60대인 김 위원장과 20대인 김정철의 중간세대에 해당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의 반감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한편 용천과 관련해 전혀 별개의 소식통에서 전해진 정보는 허창석 건과 관련해 묘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의 조성렬 박사는 지난 여름 한 중국계 소식통으로부터 용천사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을 전해들었다. 중국 최고지도부 및 북중 관계에 관해 믿을 만한 내부정보를 제공해왔다는 이 소식통은, 용천사고가 김정일 암살 시도였다는 내용을 중국측 각도에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국의 암살시도 방조설’이다.
‘용천사고에서 주목할 부분은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최고위 지도자들을 줄줄이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물론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 지도부가 총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폭의 무상원조와 다양한 기업합작이라는 선물도 안겼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당초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핵문제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6자 회담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수준의 발언이 전부였다. 사실상의 거부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최고지도부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지지를 포기했다. 오히려 새로운 정권이 등장해 자신들과 보조를 맞춰갈 수 있다면 최근 그들이 이 지역에 대해 갖고 있는 계획, 즉 동북공정·동북개발로 상징되는 그랜드 디자인에 더 적합하리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무렵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 체제 전복을 계획하고 있던 일군의 친중국 인사들이 김 위원장의 귀국일인 4월22일을 ‘거사일’로 잡고 중국 최고지도부에 그 지지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해놓은 상황이었다. 판단을 굳힌 중국 최고지도부가 최소한 용인 또는 방조하겠다는 사인을 보내자 이들 그룹이 감행한 것이 용천 폭발사고였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등장하는 ‘친중국 인사’가 허창석일 개연성이 다분하다는 점이다. 대중무역에 종사했다는 허창석 본인의 직업도 직업이거니와, 그의 삼촌이라는 허담은 외교부장을 지내는 동안 덩샤오핑 등 중국의 최고위 관계자들과 깊은 신뢰를 쌓은 인물이다. 허창석이 대중무역에 종사하게 된 것 또한 그러한 삼촌의 인맥이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별개의 소식통에서 나온 두 개의 김정일 암살시도설은 이렇듯 무리 없이 하나로 만난다. 허창석의 김 위원장 암살시도를 중국측이 방조 혹은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는 군부 출신도 아니고 강력한 정치기반을 가진 권력자도 아닌 허창석이 김 위원장 암살 같은 큰 일을 감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친중 정권의 수립을 기대하는 중국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확신, 유사시 얼마든지 북한에 군사력을 투입해 위력을 과시할 수 있는 중국을 등에 업었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른바 ‘친중파 쿠데타’다.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
북한 관련 정보는 그 성격상 ‘관측’과 ‘분석’을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허창석이라는 인물의 김정일 암살시도설 역시 그러한 한계를 갖고 있다.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이러한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을 몇 가지 주요한 조각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각각의 조각이 ‘실제 일어났을’ 가능성과 ‘실제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으로 구분하면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고, 그 시나리오를 하나하나 발전시키면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허창석의 체포’와 ‘김정일 암살시도’가 그 큰 조각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두 가지 조각이 모두 틀린 경우다. 대북정보당국이 수집한 허창석 관련 정보가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공신력 있는 정보기관에서 수집한 정보이고 보면 그간 떠돌았던 갖가지 설에 비해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북한 정보의 특성상 100%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 가능성을 암시하는 몇 가지 단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북한 출신 인사들 가운데 ‘허담의 조카 허창석’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1994년 탈북한 강성산 전 정무원 총리의 사위 강명도씨, 1991년 한국에 온 전직 북한 외교관 고영환씨 등은 모두 “그런 이름은 들어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허창석의 숙모가 되는 김정숙이 용천 사고 이후 현재까지 신변의 변화 없이 ‘민주조선’ 책임주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사촌이라는 특수신분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허창석이라는 인물이 김 위원장 암살혐의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실제로 김정일 암살을 시도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김정일 리포트’의 저자인 북한전문가 손광주씨는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구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핑계로 용천사고를 활용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한다.
이는 후계체계가 서서히 가시화되면서 정권의 2인자였던 장성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지난해 8월 이후 공식매체에서 사라진 사실, 최춘황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리광근 무역상, 박명철 체육지도위원장, 최용수 인민보안상 등 장성택의 측근들이 최근 해임됐다는 소식 등과 맥을 같이한다. 허창석 등이 대중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온 40대 테크노크라트 그룹이라면 장성택과 가까운 사이였을 공산이 크므로 이들도 같은 이유로 제거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습파’와 ‘도전파’
마지막 가능성은 물론 허창석 관련 정보가 모두 사실인 경우다. 이는 최근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흐름이 허창석의 암살시도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즉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용철 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 등 고영희-김정철 모자의 친위세력을 이른바 ‘세습파’로, 장성택과 측근들을 ‘도전파’로 두고 허창석 등의 친중그룹을 도전파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설정이다.
국가정보원 산하 연구기관의 한 북한 전문가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세습파와 도전파의 세력균형이 김정철 후계구도의 가시화로 깨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열세에 몰린 도전파가 마지막 승부수로 김 위원장의 암살을 시도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팽팽한 최고권력 싸움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파멸을 의미하므로 거사를 도모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권력승계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밀린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는 1973년 이후 20년 가까이 자강도 산골에서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김 위원장 체제가 완전히 굳어진 1990년대 초반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