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바둑협회는 창립 26돌, 호주한인바둑협회는 20돌을 맞았다. 한국 바둑은 일본·중국세를 압도하며 호주 바둑계를 이끌고 있다. 한국계가 촉발한 호주 바둑광들의 바둑사랑은 눈물겹다. 멀쩡한 직업을 내던지고, “컴백 홈!”을 외치는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한국까지 날아가 탑골공원에서 국수를 얻어먹으며 온종일 돌을 놓는다. 이들에게 입신(入神) 조훈현 국수의 호주 방문은 글자 그대로 ‘신의 재림’이었다.
호주 기사들이 양재호 9단(오른쪽)과 다면기를 두고 있다.
그는 바둑에 흠뻑 빠져 한동안 사람이 찾아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문득 ‘저러니 이혼을 당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일리 회장뿐만이 아니다. 호주 바둑인들 중엔 바둑 때문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있다. 대개는 부인들이 “나무판에 돌이나 올려놓는 괴이한 취미 때문에 가족을 방치하는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래서일까. 호주 바둑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마치 기인열전(奇人列傳)을 보는 듯하다. 바둑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버린 파란 눈 괴짜들의 인생행로가 아주 흥미롭다.
시드니 서부의 관문 에쉬필드의 다운타운에 자리잡은 웨스트리그 클럽은 최근 개축한 건물이어서 무척 산뜻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건물 3층에 있는 간부회의실은 아주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이곳에서 ‘시드니 바둑클럽(Sydney Baduk Club)’이 매주 금요일 오후 5시부터 바둑 모임을 갖는다. 말이 모임이지, 무슨 비밀결사대의 극비회동 같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둑돌 놓는 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조 국수가 온다니 잠이 안 와요”
클럽 안에는 약 30명의 기사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호주 사람들 외에 여러 명의 중국인과 여성 기사 세 명이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국인은 진양일 박사(호주국립과학연구원) 한 사람뿐이었다.
시드니 바둑클럽에 한국 사람이 적은 것은 한국클럽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로이돈 팍에 있는 한인회관 세미나실에서 바둑을 둔다. 일본 사람들은 노스 시드니의 한 음식점에서 바둑 모임을 갖는다.
시드니 바둑클럽의 역사는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드니 시내의 YMCA에는 커트 프레토우가 이끄는 시드니 체스클럽이 있었다. 프레토우는 체스클럽 한 귀퉁이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호주 체스 챔피언이었던 프레토우는 1930년대에 독일에서 배운 바둑을 즐기면서부터 체스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클럽에 도착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데본 베일리 회장이 차를 마시러 가다가 필자를 발견하고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한인바둑협회 창립 20주년이 마치 내 일 같다”면서 “특히 조훈현 국수와 양재호 사범이 시드니에 온다는 뉴스에 잠을 설칠 지경”이라고 했다.
베일리 회장은 호주한인바둑협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장에서 읽을 연설문을 미리 보여줬다. 바둑 때문에 이혼당한 그의 처지가 연상되는 글 몇 줄이 눈에 띄었다.
“내가 한국 남자들의 바둑에 대한 열정을 알게 된 것도 어언 20년이 됐습니다. 또 한국 아내들이 바둑에 깊이 빠지지 않는 것이 한국 남편들에겐 행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남편들은 배를 곯을 위험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바둑 모임은 자정이 가까워서야 끝났다. 클럽 멤버들이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시간에 베일리 회장이 “조훈현 9단과 양재호 9단이 호주에 온다”는 뉴스를 회원들에게 전하자 갑자기 중국 기사들이 “와” 하며 환성을 질렀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조훈현 국수에 대한 중국계의 각별한 관심은, 지난 10여년 동안 세계 바둑계를 석권해온 한국 바둑의 맏형격인 조 국수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1988년 제1기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조 국수가 중국 바둑의 영웅 녜웨이핑(?衛平) 9단을 물리치고 우승한 ‘괘씸한 사건’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 필자가 AGA 제3대 회장을 역임한 한상대 교수에게 “호주 바둑쟁이들은 하나같이 별종이다”고 했더니, “별종이라기보다는 변태(變態)들이지요”라고 답해 껄껄 웃었던 적이 있다. 20년 넘게 호주 사람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온 한 교수가 말하는 호주의 ‘바둑 변태’들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 평가를 받는지 궁금하여 그들을 탐문해봤다. 몇 사람은 직접 만났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 교수와 진양일 박사로부터 들었다.
제프리 그레이는 시드니대 수학과 교수 출신으로 초대 시드니 바둑클럽 회장직을 맡아 1950~60년대 호주 바둑계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대학 재직중 수학 참고서를 써서 큰돈을 번 뒤 조기 은퇴해 바둑여행을 다니면서 전세계를 떠돌았다. 특히 한국과 중국을 좋아해 두 나라에 얽힌 많은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초에는 만리장성에 올라 바둑을 뒀고, 1996년에는 7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베일리 회장과 함께 한국의 권갑용 도장에서 몇 달간 유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이 그리워지면 주변의 바둑 친구들을 꼬드겨 서울로 향한다. 한번은 언어학자인 톰 포인튼 교수와 함께 서울 낙원동의 여관에 묵으며 매일 탑골공원으로 나가 그곳 노인들과 바둑을 두면서 몇 달을 보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아마 1급 정도의 실력이다.
점심때가 되면 공원 앞에서 노인들에게 무료로 국수를 나눠주는 트럭 앞에 줄을 섰다가 끼니를 때우고 저녁때까지 계속 바둑을 뒀다 하니 그들의 바둑 사랑을 무슨 말로 더 하겠는가. 두 사람 다 큰 부자지만 진정한 한국문화를 체험할 요량으로 한국에 올 때마다 허름한 여관에 머문다고 한다. 톰 포인튼은 언어학자답게 만년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호주 바둑인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할 뿐 아니라 한국문화에 심취해 다섯 차례나 한국을 방문, 전국을 일주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에반스는 호주 남동부에 있는 태즈메이니아(州) 국립의료원장을 지낸 저명한 의사다. 호주바둑협회 2대 회장으로 호주 바둑계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부인과는 일찍 이혼을 했다. 정년보다 3년 일찍 은퇴한 이유가 바둑 때문이었다는 풍문이 있는 걸 보면 이혼 사유가 바둑이라는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에반스는 취미로 바둑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나중엔 태즈메이니아의 질 좋은 적송(赤松)으로 본격적인 바둑판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뜻이 있어 한국을 방문해 바둑판 제작회사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의 공정을 수공업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한국계가 이끄는 호주 바둑
네빌 스마이스는 현재 호주국립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저명한 학자로 1978년에 호주바둑협회(AGA)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지낸 호주 바둑계의 대부다. 시드니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1961년 시드니 체스클럽에서 독일계 커트 프레토우에게 바둑을 배웠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했는데, 지도교수가 미국에 바둑을 보급한 랄프 폭스 교수여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바둑을 본격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스마이스는 1965년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과 호주에서 수학을 강의하다가 1972년 호주 수도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곧바로 캔버라의 바둑인들을 규합해 캔버라 바둑클럽을 만들었는데,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멤버로 가입해 함께 활동했다. 1978년에는 브리즈번 바둑클럽의 빌 리베리트와 시드니 바둑클럽의 크라이브 데이비스를 끌어들여 호주바둑협회를 창립했다. 초대 회장으로 네빌 스마이스가 취임했고 리베리트가 총무, 데이비스가 재무담당을 맡았다. 호주바둑협회는 제1회 전국대회를 시드니 소재 세인트 존스대에서 열었고, 그후에는 브리즈번, 멜버른, 캔버라, 애들레이드, 호바트 등 호주 각 주의 주도(州都)에서 대회가 이어졌다.
스마이스는 회장 취임 당시 10년 동안 회장직을 맡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1988년에 데이비드 에반스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었다. 1993년엔 한국 출신 한상대 교수가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 교수는 회장에 당선된 직후 초대 회장을 역임한 네빌 스마이스를 총무로 지명했다. 사람들은 전직 회장을 총무로 지명했을 때 놀랐고, 그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을 때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그후 진양일 박사가 제4대 회장을 맡았고, 지금은 호주 챔피언인 신명길 아마 7단이 제5대 부회장을 맡고 있어 한국계가 호주바둑협회를 이끈다는 말이 허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반면 바둑 인구가 한국보다 훨씬 많은 중국계는 회장단에 뽑힌 전례가 없다.
4명의 회장을 보필하면서 지금까지 총무로 일하고 있는 스마이스는 호주바둑협회의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다. 그가 들고 다니는 노트북 컴퓨터에는 지난 26년간의 호주바둑협회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수학에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철학과 만난다. 바둑은 동양철학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수리적 게임이다. 그 안에서 내가 찾던 어떤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바둑을 시작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호주의 한인 동포 소년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조훈현 9단.
호주처럼 바둑이 잘 보급되지 않은 나라에서 바둑클럽을 꾸려간다는 것은 한국에서 체스클럽을 꾸려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시드니 클럽도 그동안 교회, 회원의 사무실, 학교, 골프코스 클럽하우스, 음식점 등을 전전하다가 최근에야 웨스트클럽의 간부회의실을 모임장소로 사용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살림을 맡아 꾸렸으니 그의 가정이 온전할 리 없다. 특히 그의 첫부인은 바둑을 지독히 싫어해 “바둑과 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그는 농담 비슷하게 이혼 당시를 회상했다. 아내의 최종 통고에 그는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나야 당연히 바둑이지”라고 대답했다는 것. 그는 한동안 혼자 살다가 지금은 바둑을 이해하는 동료 교사와 재혼해 행복한 바둑 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돈 포터는 일본의 대학에서 오랫동안 동양학을 가르친 학자 출신 거부(巨富)다. 아마 4단의 바둑 고수일 뿐 아니라 프로 수준의 피아니스트이며, 청중을 황홀하게 만들 정도의 가창력을 지닌 멋쟁이다. 자신의 이런 운명을 미리 알았는지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있다. 다채로운 삶을 즐기겠다는 인생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해놓고 계획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학계에서 조기 은퇴하고 태즈메이니아에 대규모 목장을 일궈 수천 마리의 양과 소를 기른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는 농장을 뛰어다닌 후 피아노를 연주하고 바둑을 두면서 지낸다.
조금 특별한 케이스로, 호주 챔피언십의 단골 우승후보였던 존 파우어 교수가 있다. 그는 한상대 교수와 약 50차례 바둑을 두어 전패하자 그 충격에 바둑서적 저자로 변신, ‘무적의 슈사쿠(Invincible Shusaku)’ (슈사쿠(秀策)는 일본의 전설적인 바둑기사)라는 책을 쓰는 등 세계적인 바둑작가가 됐다. 한편 호주의 한 13급 바둑기사는 기존의 바둑 입문서로는 만족할 수 없어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
‘거리의 악사’ 출신 그렌 디바인(아마 2급)도 한때 호주 바둑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호주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대개 지적 특권층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민적인 그렌 디바인의 등장으로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는 듯했으나, 기성 그룹의 냉대로 끝내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그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단정하지 못한 복장, 거친 언행 등으로 바둑클럽 출입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호주 지식인 그룹의 편협한 일면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혼에 이르는 病’
바둑이 호주에 보급되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 가정파탄이다. 오랫동안 가족 중심으로 생활해온 호주 아내들로선 주말마다 반상의 신선놀음을 즐기는 남편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주 바둑인들의 이혼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우울해지는 사람이 한상대 교수다. ‘이혼에 이르는 질병’이라는 바둑을 널리 전파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는 20년 넘게 호주에서 살다가 수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명지대에 재직하고 있다.
“서울에서 데이비드 허만의 전화를 받았다. 1976년에 헤어졌으니 실로 23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곧 한국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대뜸 ‘지금은 바둑을 얼마나 두냐’고 물어보니 아마 3단이라고 했다.
1975년, 내가 호주 멜버른에 살 때 데이비드가 내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애리조나대에서 수학 석사과정을 밟던 중 바둑을 배워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우리는 곧 만났고 치수는 9점, 승률은 70% 정도로 내가 우위에 있었다.
그는 시간만 나면 그의 집에서 7~8㎞나 떨어진 우리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였다.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데이비드는 빗속에 자전거를 타고 우리집을 다녀간 뒤 심한 몸살을 앓았다. 결국 자동차를 산 데이비드는 가족과 동행하는 일이 잦아졌고 내 아내와 데이비드의 처 자넷은 곧 친한 친구가 됐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오랫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데이비드와 함께 온 사람은 뜻밖에도 메리언이라는 이름의 새 아내. 자넷과는 6년 전 이혼했고 그후 5년간 혼자 살다가 지난해 메리언을 만나 재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소 명랑하던 데이비드에게 가끔씩 슬픈 표정이 보여 나중에 물어보니 5년간 자넷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생긴 슬픔의 응어리란다. 자넷과 헤어진 가장 큰 이유가 바둑이란 얘기를 듣고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바둑 중독으로 이끈 장본인이 다름 아닌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가정생활과 공동 행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서양식 가치관 앞에선 바둑광이 설 자리가 없다. 아마 그래서 대학교수 출신인 돈 포터와 톰 포인튼 등이 60이 넘도록 독신으로 사는지도 모른다. 미래에 이들과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를 호주의 젊은 바둑 중독자들을 볼 때마다 내 심정은 착잡해진다.”
“‘入神과 황제’는 ‘하늘과 땅’ 차이”
지난 8월7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는 시드니 바둑축제(Sydney Baduk Festival)가 성대하게 펼쳐졌다. 호주한인바둑협회창립 20주년 기념 행사였다. 축하사절로 ‘바둑황제’ 조훈현 국수와 양재호 9단이 참석했다. 두 사람은 한국교민들을 비롯해 유럽계 호주인, 중국계 호주인 등이 참여한 다면기(多面碁) 형식의 지도대국을 가졌다.
조훈현 국수는 호주 챔피언인 신명길 아마 7단과 특별대국을 가졌고, 이를 양재호 9단이 흥미롭게 공개 해설하는 팬 서비스를 제공했다. 양재호 9단은 해설 도중 한 호주 기사로부터 “양재호 9단은 입신(入神)이고 조훈현 9단은 입신이면서 황제다. 황제와 입신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하늘과 땅 차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조훈현 국수는 나중에 “수졸(바둑에 막 입문한 초급자)이나 입신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공식행사의 한 순서인 ‘조훈현, 양재호와의 대화’ 시간에는 호주 기사들과 중국계 기사들이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특히 데본 베일리 회장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중에서 한국의 인구가 가장 적은데도 한국 바둑이 오랫동안 세계 정상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조 국수가 “나도 잘 모르겠다. 혹시 그 이유를 안다 해도 국가기밀일 텐데 그걸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답해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축시로 시드니한인바둑협회 20주년을 축하했다.
[바둑 두는 사람들]
뭍이 그리워서 달려온 바다바다를 향한 들꽃세상이꼭 껴안은 물항(港)… 시드니꼿꼿한 정신들이마주 앉아서 바둑을 둔다
세상번뇌와 욕망을 벗고검은 돌, 흰 돌흰 돌, 검은 돌361집… 그 적요(寂寥)한 공간에서
바다 건너온 도인(道人)의 기침소리에먼먼 전설의 새가 날아가고끝없는 수담(手談)… 바둑 삼매경차를 끓이던 동자는 졸고 있다
깊은 밤에도 강은 흐른다강물처럼 흘러가는 것… 인생저 티 없는 반상 위에서집의 크고 작음이 무엇이며이기고 지는 것은 또 무엇인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달빛 어린 시드니 바닷가에서유정(有情)한 사람들이 바둑을 둔다각진 허무의 집을 짓고허물면서… 한 生을 건너간다
베일리 회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호주 한인바둑 20년을 평가하면서 “전반기 10년을 한상대 교수가 이끌었다면 후반 10년은 최해택 화백이 이끌었다. 특히 최 화백은 한국 호주 중국 일본의 바둑을 하나로 묶어냈고 ‘바둑 낭만주의’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바둑 낭만주의’는 1991년 개원한 시드니 기원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서 화가로 활동하다 호주에 온 최해택 화백이 자신의 작업실을 개조해 작업실 겸 기원으로 만들었던 것. 20평 남짓한 시드니 기원은 호주 최초의 기원이었다.
기원이 문을 열자 한국 출신 바둑 애호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바둑을 두고 싶어도 마땅한 상대와 장소가 없었던 호주 사람들과 중국·일본계 사람들도 환호작약했다. 주말이면 네 나라 출신의 바둑 애호가들이 모여서 바둑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최해택 원장은 화가답게 기원을 바둑만 두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국적을 초월해 교제하고 술 마시며 노래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바둑인들은 시드니 기원과 근처 ‘템테이션’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오가며 항구도시의 낭만을 만끽했다. 시드니 기원에서는 한국 호주 중국 일본의 기사들이 참가하는 ‘4개국 바둑대회’가 열렸고, 한국 호주 중국의 챔피언이 참가하는 ‘3개국 슈퍼리그’도 펼쳐졌다. ‘호주·뉴질랜드 정기전’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최 원장 한 사람의 힘만으로 ‘바둑 낭만주의’를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기원 문을 닫았다. 그후로도 여러 사람이 기원을 운영했으나 시드니 기원의 낭만적인 무드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최 화백은 그후에도 한인바둑회장 등을 역임하며 4개국 대회와 3개국 슈퍼리그 등을 계속 열었다.
시드니 한인바둑협회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조훈현 국수와 양재호 9단을 초청한 것도 최해택 전 회장의 제안에 서학범 현 회장과 운영위원들이 뜻을 같이함으로써 성사됐다. 문제는 조 국수의 수락 여부였는데, 뜻밖에도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초청에 응했다.
조 국수의 시드니 방문은 호주 바둑계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바둑을 두지 않는 한인 동포들과 호주인, 중국계에게도 큰 뉴스였다. 특히 중국계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조 국수와 함께 방문하는 양재호 9단은 이미 세 번이나 호주를 방문한 바 있다. 호주에는 양재호를 사랑하는 모임인 ‘양사모’ 회원도 여럿 있다.
1442勝의 사나이
조훈현 국수의 호주 방문을 앞두고 중국계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 고이밍(郭伊鳴) 아마 7단 등을 만났다. 그들은 필자도 미처 살피지 못했던 조 국수의 최근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잠깐 들어보자.
“현 세계 챔피언은 이창호 9단이다. 중국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조훈현 9단은 중국인들에게 특별한 존경을 받고 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뉴스에 의하면 조훈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긴 프로기사라고 한다. 입단 이래 최근까지 1442승을 거두었다니 경이로울 뿐이다. 지금까지 2000판 이상의 대국을 가진 사람이 서봉수 9단, 린 하이펑 9단, 조훈현 9단 세 사람뿐인데, 그중에서도 조 국수는 78%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먹이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 “어떤 경로로 조훈현 국수의 최신정보를 얻었냐”고 묻자 “중국 인터넷에 들어가면 한국 바둑뉴스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고 했다. 중국 본토도 아닌 호주에 사는 아마추어 기사들이 조 국수의 이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지만, 중국 바둑이 한국 바둑을 뛰어넘기 위해서 무척 애쓰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조 국수의 호주 여행은 한마디로 ‘명랑 소년 호주방문기’였다. 그만큼 유쾌한 기분으로 시드니 일정을 즐겼다. 공식 초청된 손님 역할은 물론이고 행사장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날카로운 외모와 ‘바둑황제’라는 명성과는 달리 시종일관 장난기 넘치는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갖혀 지내다 저잣거리로 뛰쳐나와 낄낄대는 ‘개구쟁이 황제’ 같았다. 필자의 이런 평가에 조 국수는 “원래는 장난치고 만화 보는 것을 무척 즐기는 쾌활한 성격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으로 건너간 뒤부터 성격이 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동서고금의 황제들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무기력해지거나 타락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 국수는 ‘영원한 현역’을 자임하면서 무섭게 성장한 후배들 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여러 날 함께 지내다 보니 그가 신으로부터 세 가지 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첫째는 바둑의 천재성이고, 둘째는 정미화라는 부인, 셋째는 선천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다. 술을 못 마시다 보니 남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바둑에 정진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됐다는 것. 술은 각박한 삶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데는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국수는 맹물을 가득 채운 소줏잔을 들고 다니면서 건배도 하고 “어, 취한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물을 마시고도 술 취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흥겹게 어울리는 것을 보니 거의 주신(酒神)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시드니 방문에 동행한 부인 정미화 여사가 들려준 금연에 관한 에피소드에서도 조훈현 국수의 단호한 성격이 진하게 배어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5일 만에 담배를 끊었다. 줄담배로 유명했던 조 국수가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건 타의에 의해서였다. 해외여행 중 비행기에서 담배를 참는 것이 힘들었고, 미국에 사는 절친한 친구 차민수씨(드라마 ‘올인’의 주인공 모델)가 강하게 금연을 권유했다. 특히 차씨는 여러 날 함께 지내는 동안 집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못 피우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금연초’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고, 조 국수는 “이게 운명이다” 싶어 금연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정작 조 국수의 금연을 미심쩍어했던 사람은 부인이었다. 그 당시 왕위전 도전기가 지방에서 열려 여행가방을 챙기면서 평소 하던 대로 담배를 넣었는데, 남편이 떠난 다음에 보니 담배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정미화 여사는 금연으로 인해서 리듬이 깨진 조 국수의 성적이 나빠질 것으로 예상, 친구들에게 “한동안 굶고 살아야겠다”고 농담을 했다는데, 실제로는 금연 후의 성적이 더 좋았다. 체중이 늘어서 고생한 것말고는 금연 후유증은 없었다고 한다.
부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조 국수가 제자 이창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창호는 나보다 더 지독하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창호가 스승이 지닌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아가던 시절 얘기다.
“나는 대국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휴식을 취하면서 TV를 보거나 가벼운 마음으로 바둑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기 전 창호의 방을 살펴보면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그의 방을 열어보면 한 손엔 바둑책, 또 한 손엔 바둑알을 쥐고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담배 끊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정신력이다.”
조 국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미화 여사의 철저한 내조가 큰 몫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 조 국수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현실감각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바둑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하물며 운전조차 부인의 몫이다. 조 국수는 “아내가 모든 일정을 관리해주는 매니저라서 편하다”면서도 “다만 좀더 쉬고 싶은데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아놓아 불만일 때가 있다”고 했다. 물론 정 여사는 “엄살떨지 말라”고 일축했지만.
정 여사는 ‘조훈현-이창호 사제대결 10년’을 회고하면서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남편과 창호의 대결이라서 드러내놓고 어느 한 쪽을 응원할 수 없었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결과를 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당시 대국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신문사나 대국장으로 전화를 가장 많이 건 사람이 나였다. 기자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챌까봐 아주 난처했는데, 마침 한국기원에서 전화 자동응답 서비스를 해줘서 한숨 돌렸다. 나중에 보니 그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도 나였다.”
파문당한 소년 조훈현
조훈현 국수는 부채에다 ‘무심(無心)’이라는 글자를 써서 몇몇 호주 바둑인들에게 선물했다. 신명길 아마 7단이 부채를 받아들고 한마디했다.
“‘무심’은 조 국수님의 바둑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조 국수는 껄껄 웃더니 소년 시절 일본에서 파문당한 얘기를 들려줬다.
“열한살에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가서 세고에 겐사쿠 선생의 문하생(內弟子)이 됐다. 세고에 선생은 70이 넘은 노인이었다. 처음엔 무척 엄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은 분이었던 듯하다.
일본에서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 세고에 선생이고 또 한 분은 후지사와 선생이다. 그런데 두 분의 성품은 정반대였다. 겉모습도 수도승 같았던 세고에 선생의 삶은 ‘고요’ 그 자체였다. 거의 말씀 없이 지내시다가 가끔씩 한말씀하셨는데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곰곰이 되새겨보면 그 뜻이 너무 깊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반면 후지사와 선생은 스케일이 아주 큰 분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판이하다. 주색잡기(酒色雜技), 즉 여자 술 노름 등에도 도통했다.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서에도 일가를 이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내가 이런 두 분과 지내다보니 헷갈리는 것도 많았지만, 양쪽 세계를 다 배우는 행운을 얻었다. 세고에 선생은 함께 살면서, 그리고 후지사와 선생님은 바둑을 함께 두면서 나의 정신세계를 열어주셨다. 세상을 물끄러미 관조하는 깊은 강 같은 세고에 선생의 정신세계와 바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과 부딪치면서 삶의 뜻을 음미해보는 후지사와 선생의 정신세계는 언뜻 생각하면 크게 다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조훈현 떠나자 자살한 스승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후지사와 선생과 내기바둑을 둔 게 화근이었다. 하루는 후지사와 선생이 한 판에 100원씩 걸고 바둑을 두자고 했다. 세고에 선생이 알면 큰일날 것 같아 ‘싫다’고 했지만, 후지사와 선생이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내기바둑이 시작됐다.
하루는 내가 내리 6판을 이겨서 선생이 600원을 주셨다. 열세살짜리에겐 짭짤한 용돈이었다. 그 사실을 후지사와 선생이 사방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조훈현이라는 내 제자한테 돈을 잃었다. 그놈 정말 세다’라고.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이 세고에 선생님께 고자질을 했다. 선생께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딱 두 말씀을 했다. ‘내기바둑을 뒀느냐?’ ‘보따리 싸서 나가라.’ 파문을 당한 것이다. 한번 파문은 영원한 파문이었다.
본가에서 쫓겨난 나는 2주 동안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고생깨나 하다가 선생께 싹싹 빌고 나서 겨우 용서받았다. 그때는 세고에 선생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는 아직도 무심의 경지를 모른다. 다만 그 경지에 들고 싶어 붓으로 쓰고 마음으로 써볼 뿐이다. 세고에 선생은 아마도 그 경지에 들었을 것이다. 도인(道人)이나 선인(仙人)이었으니까….”
세고에 겐사쿠 9단은 조치훈, 하찬석, 고바야시 등 수십명의 문하생을 둔 기타니 사단과는 달리 평생 몇 안 되는 제자만 키웠다. 일본의 하시모토 9단, 중국의 오청원 9단, 그리고 조훈현 9단이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다들 동양 3국을 대표하는 프로 기사들이다.
세고에 9단은 오청원과 조훈현을 키운 뒤 “중국과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았다”며 아주 흡족해했는데, 조훈현이 병역을 치르기 위해 귀국하자 몹시 애통해했다고 한다. 그는 절친한 친구이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하고 조훈현마저 떠나자 고독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내 사랑하는 제자 조훈현이를 다시 데려다가 크게 성공하도록 해달라.”
“현재 세계 최강은 이창호”
조훈현 국수 일행이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줄곧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도 했지만 대부분 함께 여행하면서 허물없이 주고받은 얘기들이다. 그 내용을 정리해봤다.
-현재 한국 바둑은 세계 최강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이런 추세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나.
“한국인의 핏속에 바둑에 적합한 기질이 숨어 있는 것 같다. 1988년 내가 운 좋게 제1기 잉창치배에서 우승하면서부터 한국세가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엔 일본 바둑이 도저히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는데, 한번 고비를 넘기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1990년대에 이창호는 기적 같은 일들을 이뤄냈다.
현재 프로기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일본에 400명, 한국에 200명, 중국에 100명 정도 있다. 그중에서 한국이 질적으로 단연 우위에 있다. 요즘 세계대회를 휩쓴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한국이 모든 층에서 두터운 세를 형성하고 있고 실력도 발군이다.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이창호 같은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한국의 독주는 오래갈 것이다.”
-삶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조 국수는 늘 긴장하면서 대국하는가.
“프로기사들의 긴장과 불안감은 바둑돌을 놓기 전까지다. 바둑을 시작하면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조차 잊어버린다. 바둑판밖엔 보이는 게 없다. 그러나 바둑이 끝나면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만일 매일 대국을 한다면 몸과 정신 모두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은?
“뭐니뭐니 해도 제1기 잉창치배 대회다. 개인적으로도 큰 전환점이었지만 한국 바둑이 융성기를 맞는 출발점이 됐다.”
-12억 인구의 중국 전체가 성원하는 녜웨이핑 9단을 꺾었을 때 조 국수는 기뻤겠지만 중국은 실망이 컸을 텐데.
“내가 우승하는 순간 대국장 분위기가 마치 초상집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4국과 5국 내내 녜웨이핑 9단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어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중국은 대국답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실망감을 삭여내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조 국수가 바둑을 통해서 이룰 것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러한가.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아직도 내가 가는 길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길을 가다 보면 또 다른 길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도전해야 할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無心의 경지를 향해
-지금까지 상대한 기사 중에서 승률이 가장 나쁜 상대는? 또한 현재 세계 최강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며, 본인의 세계랭킹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통틀어 승률이 가장 나쁜 상대는 당연히 이창호다. 그러나 지금은 이세돌 등에게도 승률에서 밀리고 있다. 세계 최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창호다.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정상을 지킬 것이다. 현재 나의 세계랭킹은 잘 알 수 없지만 톱10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바둑이 점점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만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삶의 굴곡이 있다. 바둑이 아닌 다른 일로 좌절하여 바둑을 그르친 일은 없는가.
“왜 없겠는가. 한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방황했다.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바둑공부를 게을리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운이 좋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
조 국수 일행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체커스 리조트 호텔 이종원 회장이 송별만찬을 마련했다. 이 회장은 조 국수 일행이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숲속에 자리잡은 자신의 호텔에 머물도록 후원했다. 만찬이 끝난 후 “석별의 정을 노래로 나누자”는 바둑회원의 제안에 따라 교민이 운영하는 노래방으로 갔다. 조 국수는 저녁 내내 맹물 소줏잔을 기울이면서도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특히 노래점수로 ‘갑오 떼기’를 하여 상금을 주자는 특이한 제안을 해서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동점이 나오면 상금은 무효가 된다. 참가자가 10여명이 넘다 보니 동점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자정 가까운 시각까지 결판이 나지 않자 조 국수는 “다음에 시드니에 와서 결판을 내겠다”며 상금봉투를 봉수(封守) 처리했다. 봉수는 이틀 동안 두는 일본바둑에서 첫날의 마지막 수를 적어 봉투에 넣어두는 것.
조 국수는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는 양재호 사범에게 “왜 자꾸 시드니에 가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양 사범의 대답은 항상 “가보시면 알게 됩니다”였단다. 그는 “막상 시드니에 와보니까 양 사범의 말뜻을 알겠다”면서 “꼭 시드니에 다시 와서 못다 나눈 정을 나누겠다. 부디 그때엔 ‘무심(無心)의 경지를 헤아렸으면 좋겠다”는 고별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