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도마 오른 美 CIA의 정체성

‘해체냐 개혁이냐’ 논란 속 펜타곤과 밥그릇 싸움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4-09-22 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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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대 정보조직인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위기를 맞았다. 9·11테러를 막지 못한 데다 이라크 침공의 명분인 대량살상무기(WMD) 관련정보조차 엉터리였던 탓이다.일각에선 해체론까지 제기한다. 이 와중에 CIA 요원들은 펜타곤을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그 내막을 들여다봤다.
    도마 오른 美 CIA의 정체성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한 부정확한 정보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난 조지 테닛 전 CIA 국장과 새 CIA 국장으로 지명된 포터 고스(왼쪽).

    지난 2월5일 조지 테닛 당시 CIA 국장은 모교인 워싱턴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이례적으로 CIA가 무엇 때문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적이라는 정보판단을 내리게 됐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이라크와 관련한 의문은 엄밀히 말해 ‘우리의 판단이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였다. 정보업무에서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옳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정보 전문가들은 정보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고 했다. 또한 CIA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무시하기 어려운 정보를 많이 확보했음을 밝히면서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 같은 변명은 CIA를 비롯한 미 정보기관들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 이유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2002년 10월1일 CIA가 발표한 ‘이라크 무기 프로그램 백서’엔 “이라크는 화학 및 생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겨자, 사린, 사이클로사린 및 VX 등 화학전 물질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현 민주당 대통령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을 비롯한 미 민주당 소속 의원 상당수는 이 보고서를 믿고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침공 권한을 안겨주었다.

    “CIA 정보를 믿고 의회에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정책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정보가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면 앞으로 북핵 및 이란 문제에 있어 어느 누가 (CIA 정보를) 믿을 수 있겠는가?”(제인 하먼 민주당 상원의원) 하는 볼멘소리에 CIA는 아무 할말이 없다.

    해체론까지 거론되는 CIA

    결국 테닛은 국장 재임 7년을 맞은 지난 7월초 물러났고, CIA는 거센 변화의 풍랑 속에 휘말렸다. 그 과정에서 미국 정보기관의 개혁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큰그림으로 볼 때 그 방향은 민주·공화 양당 의원으로 구성된 9·11조사위원회가 지난 7월에 낸 권고안대로 ‘국가정보국장(National Intelli- gence Director, NID)’이란 새 자리를 만들어 정보기관간 정보 수집의 흐름을 조율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 정보기관들 사이에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고 따로따로 움직이는 바람에 알 카에다의 공격을 미리 막지 못하고 9·11 참사를 불러왔다는 공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



    9·11조사위원회는 567쪽 분량의 두꺼운 보고서(‘The 9/11 Commission Report’)에서 그 점을 지적하면서, 15개 미 정보기관을 통합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직 신설을 강력히 제안했다.

    문제는 후폭풍이다.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CIA를 해체하고 재조직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더구나 그런 목소리가 집권 여당인 미 공화당 상원의원들 입에서 나오고 있는 터라 CIA 간부들은 위기위식마저 느끼고 있다.

    그 중심인물은 팻 로버츠 상원 정보위원장이다. 그는 8월말 미 CBS 방송 일요 토크쇼인 ‘국민과의 만남’ 프로그램에서 미 정보기관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최대 정보기관인 CIA를 사실상 해체토록 하는 정보기구 개혁안을 제시해 화제를 모았다.

    로버츠 위원장을 중심으로 미 상원 정보위 소속 공화당 위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정보기관 개편안은 15개 정보기관을 통제 감독하는 국가정보국장직 신설을 제의한 9·11조사위원회 권고안보다 훨씬 혁신적인 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로버츠 위원장이 추진하는 개편안의 이름은 ‘9·11 국가안보보호법안’. 이에 따르면 CIA는 세 부문으로 분리돼 ▲기존 스파이 작전을 관할하는 국가첩보국 ▲정보를 분석하는 정보평가사무국 ▲연구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학기술국으로 개편된다. 이들 세 기관은 미 9·11조사위원회가 신설을 건의한 국가정보국장에게 업무를 보고하도록 돼 있다.

    이를 두고 CIA 내부에선 “사실상 CIA를 해체하자는 것이냐”며 반발하는 분위기다. 존 맥롤린 CIA 국장대리는 “이 개편안은 개악(a change for the worse)이다. 나는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밝힌다”는 성명을 냈다. 사임한 조지 테닛 전 CIA 국장도 성명을 내 “이는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조직을 뒤흔들어놓는 잘못된 계획이다. 그 같은 개편안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손상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로버츠 위원장은 “CIA를 없애는 것이 아니며, 다만 3개 주요 부문으로 나눠 새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개혁안이 원안대로 채택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미 상원에서 거론되는 정보기구 개혁안에 대해서는 펜타곤(미 국방부)도 못마땅해하는 분위기다. 개혁안에 따르면 펜타곤이 관할하는 국방정보국(DIA),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이 펜타곤으로부터 분리된다. 특히 펜타곤 쪽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은 DIA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첩보활동 부문을 따로 떼어내 곧 만들어질 것으로 보이는 국가정보국이 통제하는 독립기구로 만든다는 안이다.

    CIA와 펜타곤은 의회에서 논의되는 정보기구 개혁안이 실현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기에 국가의 정보기능에 손상을 줄 것이란 논리를 내세워 저항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보기구 개편안에 관한 한 민주당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편이다. 존 케리 민주당 대선후보의 국가안보보좌역 랜드 비어스는 “개편안이 케리 후보의 제안과 비슷하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지만, “개편안을 실행하려면 민주·공화 양당의 초당적 지지가 필요하다”며 일단은 유보적 입장이다.

    펜타곤은 9·11조사위원회가 ‘9·11 보고서’를 통해 권고하고, 부시 대통령이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 국가정보국장 신설안에 대해서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국가정보국장 신설안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8월17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정보체계의 어떤 변화도 전쟁 수행자들과 정보수집기관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나 여과기를 만들어선 안 된다”며 국가정보국장 신설에 대해 우회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군 정보기관들이 펜타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반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속내다.

    그러나 럼스펠드의 뜻과는 달리 9월 중순 현재 국가정보국장직을 신설하고 예산권을 준다는 내용의 그림이 그려졌다. 9월8일 부시 대통령은 미 의회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9·11조사위원회의 권고안대로 국가정보국장에게 15개 정보기관의 예산권을 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보기관의 파워는 예산이 얼마나 뒷받침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5개 미 정보기관의 1년 예산 규모는 약 400억달러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는 펜타곤이 전체 예산의 80%를 컨트롤해왔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미 의회 지도자들에게 밝힌 안에 따르면, 신설되는 국가정보국장이 전체 정보기관 예산의 75%를 주관하고, 나머지 25%를 펜타곤이 주무르게 된다. 지난 8월초 부시 대통령이 9·11조사위원회의 국가정보국장직 신설 권고안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일 때만 해도 예산에 관한 한 예전대로 펜타곤에 힘을 실어줄 것이란 입장이었다.

    실제로 부시와 콘돌리자 라이스 보좌관은 처음엔 형식상 국가정보국장직을 마련하려 했다. 예산권을 주지 않으려 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다. 그러나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판단을 바꿨다. 조지프 리버만 상원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은 “예산권이 없는 정보기관장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며 부시의 태도를 비판했고, 존 맥케인 상원의원을 비롯한 일부 공화당 의원들도 비판에 가세했다. 그들은 ‘리버만-맥케인 법안’을 내놓고 국가정보국장직 신설을 11월2일 미 대선 전까지 매듭짓겠다는 입장이다.

    키신저의 반론

    그러나 국가정보원장직 신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정보기관의 성격상 대통령 직속의 국가정보원장직을 새로 만드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라는 것이 반론의 요지다.

    국가의 정책결정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힘(power)을 중시하는 현재 국제정치학계의 주류 현실주의 학파의 리더이자 미 보수정객의 좌장격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8월 중순 ‘트리뷴 미디어 서비스 인터내셔널(TMSI)’에 기고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로 국가정보국장직 신설안에 반대했다.

    “국가정보국장을 대통령 산하에 두면 첩보기능의 구분을 침해함으로써 정보기관들이 정책결정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쳐 정보분석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국내외 정보활동을 대통령 직속의 단일 책임자 밑에 통합시키고 아무런 견제장치를 두지 않는 것도 걱정스럽다”

    헨리 키신저는 지난 30년간 미국이 겪은 네 가지 중대한 정보 실패 사례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1973년 중동전 ▲새로운 핵확산 위협을 촉발한 1998년 인도 핵실험 ▲9·11테러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적발 실패를 꼽았다. 이 가운데 9·11테러를 제외한 나머지 사건의 경우 사실 자체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오류가 있었다는 게 키신저의 분석이다(9·11조사위원회도 9·11테러를 막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개별 사실들을 종합하는 상상력의 실패’라고 보았다).

    키신저는 “정보 실패는 정보수집과 기능조정이 부적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보의 평가단계에서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정보국장직 신설의 대안으로 국내외 정보활동은 별도로 유지하되 사안별로 태스크포스를 통해 협력토록 하고, 정보활동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는 특별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도마 오른 美 CIA의 정체성

    미 부시 대통령의 테러전쟁을 비판한 CIA 현직 간부의 베스트셀러 ‘제국의 오만.’

    이 같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국장직이 신설돼 미 15개 정보기관을 컨트롤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그럴 경우 지금까지 CIA 국장이 맡았던 권한의 일부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부시 대통령은 지난 8월말 ‘새 국가정보국장이 임명될 때까지’라는 단서조항을 달아 CIA 국장의 권한을 오히려 늘리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잠정적으로 CIA 국장에게 국가정보국장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 이 조치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펜타곤 산하 3개 정보기관(국가안보국, 국방정보국, 국가정찰국)을 포함한 15개 미 정보기관에 대한 예산 감독권을 CIA 국장이 갖도록 한 조항이다. 이 조치에는 그밖에 대(對)테러센터 신설, 정보기관 사이의 정보공유 지침 등이 언급돼 있다.

    “CIA에게 덮어씌우는 거냐”

    현재 미 의회와 9·11조사위원회, 부시 행정부, 백악관 사이에는 국가정보국장에 얼마나 많은 권한을 넘길 것인가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묘한 긴장이 형성돼 있다. 이는 이른바 밥그릇 싸움과 맞물려 있다. 펜타곤이나 CIA 등 정보기관마다 지금껏 누려온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CIA 국장 자리가 과연 지난날 누렸던 파워를 지니게 될까. 9·11조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국가정보국장직이 신설될 경우 CIA 국장의 권한은 예전에 비해 제한될 전망이다.

    CIA 국장이 국가정보국장직을 맡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CIA 내부의 분위기는 “정보기관의 중심인 CIA 국장이 국가정보국장직을 맡아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스콧 매클랠런 백악관 대변인도 그 가능성을 따져묻는 출입기자들의 질문에, CIA 국장이 국가정보국장직을 맡게 될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엇보다 9·11조사위원회가 보고서에 겸직을 바라지 않는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 개편논의 한복판에 서 있는 CIA의 분위기는 흉흉하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가 잘못됐다는 책임을 지고 조지 테닛 국장이 사표를 내고 물러가자, CIA 내부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펜타곤 강경파의 주장에 끌려 이라크전쟁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한 책임을 이제 와서 CIA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냐”며 분노와 모욕감에 떨고 있다. CIA 국장에게 잠정적으로나마 예산권을 넘긴 것도 CIA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백악관 쪽의 ‘액션’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물론 CIA가 이라크내 대량살상무기 존재 여부에 대한 정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라크내 생화학무기 관련 보고서를 엉터리로 작성해 그를 믿은 미 의회 의원들이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전권행사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그럼에도 CIA 요원들은 조지 테닛 전 국장과 CIA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 실책을 가리기 위한 희생양이 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특히 펜타곤 내부의 유대인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자) 강경파 거두인 폴 월포위츠 국방부(副)장관과 직속부하 더글러스 페이스 정책담당 차관(펜타곤 서열 3위, 유대인 출신), 그리고 그들에 업혀 있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본다.



    펜타곤은 2001년 9·11테러 직후 국방정보국 등 내부의 정규조직을 제치고 소규모 비밀 직할 정보조직을 만들어 가동해왔다. 이 조직은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를 비롯한 이라크 관련 정보판단에 관한 한 CIA나 국방정보국을 따돌리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들은 펜타곤이 후원해온 아흐메드 찰라비(이라크국민평의회 의장) 등 일부 이라크 망명세력과 손잡고, 엉터리 정보(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보유설)를 퍼뜨림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논리를 뒷받침해왔다.

    펜타곤 직할 정보조직은 럼스펠드 장관과 월포위츠 부장관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이른바 ‘맞춤정보’를 만들어냈다는 혐의마저 받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고, 이라크가 엄청난 양의 생화학무기를 숨겨두고 있으며, 중동지역은 물론 미국까지 위협할 만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것이라는 등의 정보가 그것이다.

    이런 맞춤정보들이 거짓임은 이미 드러났다. CIA는 국무부와 함께 일찌감치 아흐메드 찰라비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고 그와는 거리를 둬왔다. 그러나 펜타곤은 달랐다.

    현재 CIA와 펜타곤 사이엔 묘한 암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미국을 위협하고 있으니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펜타곤의 강경 매파들은 멀쩡하고 신중론을 제기했던 조지 테닛 CIA 국장이 ‘정보처리’를 잘못했다는 덤터기를 쓰고 물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조직에 칼을 대겠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CIA로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밖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현직 CIA 간부의 ‘테러전쟁’ 비판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난 7월 저자 익명의 ‘제국의 오만(Imperial Hubris)’이 발간됐다. 22년 동안 정보계통에 몸담아온 CIA 현직 간부가 쓴 이 책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밀어붙인 ‘테러와의 전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CIA 규정에 따르면, CIA 요원이 책을 내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민감한 사안을 다룬 책은 검열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그런 절차가 생략됐다. CIA 내부의 견해를 담았다는 점에서 형성된 공감대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출판되자마자 단숨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제국의 오만’의 저자는 마이크 쇼이어다. 그는 “부시 행정부는 알 카에다 토벌에서 미국이 승리를 거뒀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졌다”고 비판했다. 부시 행정부의 잇단 테러전쟁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적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권 저항세력의 반미테러 명분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그 저항세력이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미국민과 세계에 선전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권 반미저항세력을 상대로 한 테러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저자에 따르면, 알 카에다의 성명서는 이슬람권의 부패한 친미왕조들을 보호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슬람권인 아프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빈 라덴 지지자들은 따라서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여기며, 미국과의 전쟁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 이슬람 저항세력의 목표는 세속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지키는 미국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이슬람권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온건한 무슬림들조차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쇼이어는 책을 낸 뒤 복면을 쓴 채 언론과 인터뷰를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펜타곤의 강경파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물러난 조지 테닛 전 CIA 국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가 9·11조사위원회에 CIA가 9·11테러 방지 실패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것도 테닛을 겨냥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스 임명은 CIA 역사상 최악”

    조지 테닛이 사임한 한 달 뒤인 지난 8월10일 새 CIA 국장에 지명된 포터 고스(65·전 하원 정보위원장)가 과연 CIA를 잘 이끌어나갈지도 관심거리다.

    고스는 보수적 색채가 강한 강골 공화당 정치인이다.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강경 매파 의원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장은 초당적인 인물이 지명되는 게 그간의 관례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CIA 국장을 지낸 스텐필드 터너는 고스에 대해 “그렇게 당파적인 인물을 CIA 국장 자리에 임명하면 정보국에 대한 공공의 신뢰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고스의 임명은 CIA 역사상 최악”이라고 비난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주로 중남미와 유럽에서 CIA 요원으로 일한 경력을 지닌 고스가 넘어야 할 첫 번째 벽은 9월 중에 있을 미 상원 인사청문회다. 민주당은 그의 인준 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그래서 고스 임명은 재선 고지를 겨냥한 부시의 승부수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하원 정보위원장 시절 고스는 조지 테닛 CIA 국장과 한 차례 논전을 벌인 적도 있다. 그는 하원에서 정보기관 세출 예산안이 통과될 즈음, 공개적으로 CIA를 비판했다.

    “CIA가 잘난 체하는 관료주의(stilted bureaucracy)에 빠져 정보수집 활동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비밀작전이 지닌 부담과 그것이 낳을지도 모를 정치적 파장을 너무 두려워해왔다. 그래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지 못했다. CIA 정보분석가들은 결단력이 부족하며 사안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에 대해 테닛은 ‘터무니없는 비난’이라며 즉각 맞받아쳤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해 비난과 책임을 뒤집어쓴다고 여기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던 테닛은 고스 위원장에게 보낸 반박 서한에서 “하원 정보위원회의 비난은 불합리하며,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체질적으로 강성 인물인 고스는 한술 더 떠 “CIA가 요원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위험한 일을 벌이길 망설인다”며 CIA 간부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고스가 미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쳐 인준을 받는다면, 지난날 냉전시대에 미 정보기관들이 펼쳤던 비밀공작을 더욱 활발하게 벌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그러나 케리 후보가 미 대선에서 이긴다면, 고스는 단명에 그칠 것이다. 미 대선 정국과 겹쳐 CIA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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