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 성격의 세 번째 특징은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도덕적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반듯하고 금욕적으로 살던 남자에게 어느날 숨겨둔 첩과 아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처럼 지나친 도덕적 무장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은 그만큼 일탈의 욕망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자신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을 “기업이란 이윤추구 집단이 아니라 높은 도덕성과 강한 동지애로 뭉쳐 최고의 효율을 통하여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 모임”이라고 정의한다. 허황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일제치하의 독립군에게나 요구함직한 덕목을 절대적인 이윤추구 집단인 기업에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기업이나 종교단체·학교·사회단체 등은 지역사회나 개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각기 담당해야 할 몫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기업의 오너이면서 완전한 도덕성을 꿈꾸는 이 회장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요새 과학으로는 밥 안 먹고도 살게 되어 있다. 난 밥을 안 먹고, 하루종일 생선 몇 조각과 채소만 집어 먹고 있다. 금욕·권력욕·식욕, 이 세 가지가 사람을 버린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없애느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지난 대선 때 이회창 총재가 패배한 가장 결정적 원인은 그가 ‘도덕성’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한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한 사람은 테레사 수녀 정도의 몇몇 성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는 내적 기준과 원칙에 엄격하고 특히나 도덕이라는 절대선을 자기의 푯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잔소리가 많아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침해하게 된다.
영자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96년 9월에 한국 재벌 총수의 위압적인 자세를 꼬집는 기사를 실었는데, 특히 이건희 회장은 직원들에게 취침시간 까지 가르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면서 구습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초일류 사원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초일류가 되어야 한다. 업무의 질은 인간의 질, 나아가서 삶의 질과 이어져야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삼성맨은 직장인으로서뿐 아니라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도덕심을 갖춘 교양인, 국제적 감각과 매너의 소유자, 신뢰받는 동료애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질’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적인 분노와 공포의 두 얼굴
이 회장의 내적 공포심의 대상은 그의 아버지, 이병철 선대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은 새끼를 벼랑 밑으로 떨어뜨려서 살아남은 새끼만 키우는 사자를 예로 들면서 강한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도 ‘어설픈 정’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 회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향의 친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업하는 아버지 뒷바라지 때문에 대구에 나가 있던 엄마 품에 처음 안겨본 것이 네살 때였고, 그때 엄마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특정 대상과 가까이 있으려 하고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되는 유아들의 성향을 ‘애착(Att- achment)’이라고 한다. 사람은 초기 발달과정에 부모와 따뜻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성장하면서 대인공포증이나 불안장애 등 여러 가지 정서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일본을 배워라”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연락선을 타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간 게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 당시 일본에선 한국이란 나라를 ‘전쟁과 가난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일본 아이들이 소년 이건희를 어떻게 상대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민감한 때에 인종차별, 분노, 객지에서의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런 걸 다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는 뭐든지 지고 싶지 않아요. 상품은 물론이고 레슬링, 탁구, 뭐든지 일본에 이기면 즐거워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소년 이건희는 또다시 일본에서 엄청난 열등감을 경험하며 영화에 빠져 든다. 초등학교 3년간 그가 본 영화가 1000편이 넘는다고 하니, 그가 영화 속에서 홀로 보낸 공상의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혹한에 내던져진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 속에서 따뜻한 난로와 엄마를 보듯이 소년 이건희에게 영화는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과 같은, 유일하게 안락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던가요?”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요, 저희 남매들이 부모님과 함께 다 모인 게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모두 모이게 돼서 사진관에 연락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혼자 있거나 떨어져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게 보통인 것 같아요.”
정상적인 가족 개념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으로는 얼른 납득할 수 없는 고백이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에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공포의 감정이 내재화됐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그만큼의 분노와 반항의 감정도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에 잠재하는 분노나 반항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불쑥불쑥 그들의 삶을 위협한다.
얼마 전 그는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치료경과가 좋아 경영일선에 복귀했는데도 일각에서는 ‘포스트 이건희’라는 말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사실 필자는 이 회장이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 회장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비판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다만 이 회장의 특이한 여러가지 행동들이 그의 열등감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정신과적인 의견을 내놓고 싶었다.
필자는 이 회장에게 강박적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적인 규율이나 원칙이 엄격하고 이상주의적이어서 스스로는 고통스럽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특징이 있다.
삼성 초일류주의의 이면
삼성이 지향하는 초일류주의는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초일류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겪는 이 회장과 삼성 사람들의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열매를 달게 즐기고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필자는 삼성의 문화가 우리 삶의 질을 상당 부분 향상시켰다고 믿는다. 삼성은 우리에게 서비스라는 개념, 고객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기업이다. 어떤 회사에서 야유회를 갈 때 그 행사를 준비하는 관리부서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크면 클수록 나머지 사람들의 기쁨은 커지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회장에게 빚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비자에게 개운치 않은 느낌을 주면서 부를 축적하는 기업이나 경영자가 너무 많은 현실에서 이 회장과 삼성이라는 기업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그게 필자의 생각이다.
오너의 지나친 영향력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보류하고 현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면, 삼성의 완벽주의적 문화는 이 회장의 개인적 성향으로부터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성의 문화는 이회장의 개인적 고통을 기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삼성이라는 조직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놀랄만한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자는 게 아니고 아직까지는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혈기왕성할 때부터 “제발 나를 비판해달라. 비서실에 200명이 있지만 아직까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회장 이러시오. 저러시오’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개탄했던 사람이다.
‘인재의 삼성’에 예스맨만 즐비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회장은 분노와 은둔의 극단적인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인데, 그의 분노나 적개심은 적절한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회장식 사고방식을 한번 그대로 차용해보자.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순간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회장 자신과 삼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 이건희와 삼성의 울타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 유연하고 여유있는 ‘남근기적 삶’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이회장의 고통스런 삶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도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회장을 비롯한 삼성 사람들의 행복감이 곧 우리의 행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열등감에서 해탈한 조영남
이번에는 조영남에 대해 살펴보자. 1970년대 초반, 조영남이 지금의 서태지나 조성모 급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조영남 콘서트가 열렸다. 공연 몇 시간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자기 학교 강당이라는 핑계로 이대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게 되었다.
구경꾼(그것도 여자들)을 의식한 조영남은 확실하게 오버하며 열창했다. 너무 불러제끼는 통에 진짜 공연 때는 목이 거의 잠겨 공연을 망쳐버리고 말았단다. 아마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그는 여전히 오버할 것이다.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도 설교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목사 되기를 포기했다는 조영남이다.
“왜 노래를 부르냐구요? 더 예쁜 여자, 더 좋은 여자를 얻어 멋지게 살기 위해서죠.”
데뷔 2년째인 1968년,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못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일부러 큰 안경을 끼고 다닌다는 그가 그렇게 여자를 중요시(?)하면서도 그로 인한 열등감에 발목이 잡혀 있지 않은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가수, 화가, MC, 글쟁이, 뮤지컬 배우, 연애쟁이’
그가 밝히는 자신의 다채로운 이력이다. 근자에 그가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은 그림인 모양이다. 20여 년간 십수번의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지금은 미술계에서도 무시 못할 존재로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저는 가수입니다.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기고한 그의 칼럼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데뷔 초창기의 이문세가 가수로서보다 모창을 잘하는 재치 있는 MC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종환이 그에게 늘 히트곡도 없는 가수가 무슨 가수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이문세에게는 그 말이 엄청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그 후 그는 피나는 연습과 좋은 곡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최정상급 가수가 됐다.
그러나 조영남은 30년 넘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그걸 자기 무기로 삼고 인기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1968년에 조영남이 ‘쇼쇼쇼’라는 무대를 통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릴 무렵, 최희준은 몇 년째 가수왕을 독식하면서 가요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조영남의 데뷔 당시를 회고하는 최희준의 고백.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놈이 나왔으니 정말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얼마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버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영남은 그런 가수였다. 그는 지금까지 늘 팬들로 꽉 찬 수백 차례의 개인 콘서트를 열었고 100여 장의 음반을 냈다. ‘이 세상에 있는 히트곡이 바로 나의 히트곡’이라는 그의 배짱이나 당당함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건강하게 만든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천성적으로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클래식을 아무리 파야 대학교수 되는 것말고는 뾰족한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쉽게 유명해지고 돈도 벌 수 있는 경음악을 선택했다.
와우아파트를 건설한 서울시장 앞에서 신고산 타령을 개사한 ‘와우아파트는 우르르…’를 불러 괘씸죄로 군대에 끌려갔고, 군 시절에는 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전대통령 앞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를 열창해 주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죄로 인생을 마감할 뻔하기도 했다. 그게 조영남이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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