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언니 때문에 사격을 시작했어요. 언니의 지도 덕에 일찍 태극마크도 달았고, 운동이 힘들 때마다 언니에게 의지하며 정신적 지주로 삼았죠. 처음엔 엄마나 형부조차 언니의 병을 제게 정확히 알리지 않았어요. 폐암 초기라 수술 안하고 항암치료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니의 상태가 영 좋지 않더라고요. 7개월 될 때까지 몰랐으니 제가 너무 무심했던 거죠. 나중에 알고 나서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죽음을 기다리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어요.”
제주여상 1학년 때인 1983년 처음 총을 잡은 그는 운좋게도 3년 6개월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언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니는 은퇴 후 소속팀인 국민은행에 근무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릴 때마다 제주 대표로 동생과 함께 출전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때마다 잔소리처럼 했던 충고가 있었다. 총 쏘는 오른손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당부였다. 잘 때도 왼쪽 방향으로만 자고, 오른손으론 절대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동생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한 언니. 엄마처럼 다정했고 친구처럼 허물 없었으며 애인처럼 사랑을 아끼지 않던 그가 2000년 12월29일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는 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한동안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언니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데다 무덤 앞에서 통곡해봤자 가슴만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러다 자신의 병을 알고 난 후 수술받기 바로 전날 처음으로 언니한테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주저앉아 신세 한탄하며 언니의 위로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언니를 너무도 좋아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병까지 닮아가는 것 같다”는 탄식과 함께 언니의 영혼을 가슴에 묻고 돌아와야 했다.
88사격단에서 훈련받던 당시 체육부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중인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던 그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준 이가 바로 남편이었다. 1992년 결혼 후엔 그때껏 맛보지 못했던 행복감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나 아들 동규가 태어나면서 가정은 ‘전쟁터’로 변했다. 사격선수로 활동하면서도 주부, 며느리, 엄마, 아내의 다양한 역할까지 욕심껏 소화하려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몸이 축난 것.
아이는 시어머니가 맡아주었지만 한시적이었다. 동규가 유치원에 갈 시기까지 키워주시고 나서 시부모가 분가를 한 것. 자연히 유치원에서 돌아온 동규를 돌봐줄 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어머니께 죄송한 부탁을 드리려는데 시어머니가 암에 걸린 사실이 밝혀졌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신 바람에 언니를 찾아갔는데 이번엔 언니까지 아프더라고요. 아이 문제에다 시어머니와 언니의 병까지 겹쳐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투병중인 식구들을 남겨두고 출전한 시드니올림픽 성적이 좋을 리 있겠어요? 그때까지 쏴본 적 없던 최저 기록이 나왔어요. 어이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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