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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레고리 펙’남궁원

“임금보다는 머슴, 007보다는 빨갱이 역 맡고 싶었다”

한국의 ‘그레고리 펙’남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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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70줄에 들어서는 그를 다시 만났다. 만남의 첫 느낌은 ‘신은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세월은 아직도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갓 쉰이 넘었을까 싶은 외모에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처럼 선이 굵은 배우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또 다른 한 배우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레고리 펙이었다. 모범적인 가정생활에 스캔들 한번 없는 성실함,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도 끝까지 정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화판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까지, 남궁원 그는 끝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마다했던 그레고리 펙과 실제 인생조차 닮은 삶을 살고 있었다.

-잔 모로라는 프랑스 여배우와 인터뷰할 때도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했는데요, 평생을 잘생긴 남자로, 누가 봐도 잘생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온 기분이 정말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대표적인 미남배우’잖아요.

“그런 얘기 참 많이, 오래도 들었죠. 지금은 어디 가서 그런 얘기 들으면 쑥스럽기도 하고.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과연 괜찮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그러니까 저는 잘생겼다는 감이 없어요. 밉게는 안 생겼나 보다, 남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구나 그런 정도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로서는 드물게 180cm를 넘는 큰 키가 고민이었다는 일화도 있더군요.



“그랬죠. 제가 처음 나왔을 때는 영화배우 중에서 그렇게 큰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여배우들과 연기할 때는 상대역 발 밑에 벽돌이나 나무조각을 괴어놓고 대사신을 찍곤 해서 굉장히 어색했죠. 한번은 최은희씨하고 신상옥 감독이 한 마디 하더군요.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안됐다. 10년이나 15년 후에 나왔으면 좋았을 걸.’ 당시에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토속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저는 그런 역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물론 내 자신 양복이나 군복 같은 정장을 입어야 더 보기 좋다는 것, 꼭 외국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잘 알죠. 그렇지만 나는 순박하고 한국적인 머슴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유럽인 스타일의 이미지가 방해가 되어 못했던 거죠.”

―남궁원씨가 머슴 역할을 하고 싶었다니 상당히 의외네요(웃음). 우선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부터 짚어주시죠.

“학교 다닐 때부터 그런 제의가 많았어요. 유명한 감독들이 대학교(한양대 공대) 다닐 때부터 심심찮게 쫓아다녔죠. 원래는 졸업한 후에 유학을 갈 생각이었어요. 콜로라도 주립대학에 장학금 수속까지 다 밟아놓고는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자궁암 3기 진단을 받으셨어요. 두 달밖에 안 남았다는 거였죠. 급한 마음에 찾아간 사람이 친구 아버지였던 아세아영화사 사장 이재명씨였죠. 배우를 하겠다고 하니 굉장히 큰돈을 내주었어요.

그 돈을 받아서는 제가 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어머니 치료에 쏟아부었죠. 장남이다보니 어머니께 잘하고 싶었거든요. 평소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얼마 못 사신다고 하니까 앞뒤 잴 겨를이 없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넓게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영화계에 나오게 됐습니다.”

―원래는 학자나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교수가 아니면 외교관이 될 생각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5일장을 치르고 나니 영화사에서 촬영을 하자고 나서더군요. 눈앞이 깜깜해졌죠. ‘아 이렇게 딴따라가 되는구나.’ 그때 기분이 참 아이러니했어요. 아버지도 허탈해 하셨고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출연한 첫 영화가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이었어요. 소박한 시골 선생 역할이었죠. 연기의 연자도 모르면서 촬영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첫 컷은 여선생과의 이별 장면이었어요. 대본 대로 ‘나 가봐야겠어.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사하고 시계를 보는데 손이 천근만근이더라고요(웃음). 친구들이 주위에서 보고 있으니까 더 창피한 거예요. NG를 열 번도 넘게 낸 뒤에야 겨우 성공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다는 거죠. 내 외모가 선하게 생긴 덕분인지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참 아껴주셨죠.

촬영이 끝나고 개봉을 할 무렵에는 ‘혜성처럼 나타난 사나이’ 어쩌고 하면서 신문에 막 나더라고요. 단성사에서 개봉했는데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짓하면서 수근거리는 게 느껴졌죠. 명동에 가면 여자들이 사인해달라고 나서곤 해서 무척이나 쑥스러워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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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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