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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

“신체적 장애 있으면 심리적 장애를 가질 여유가 없다”

스티븐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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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킹은 대중적인 과학서를 쓸 생각을 한다. 때맞춰 그를 주인공으로 한 몇 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BBC 등에서 제작되면서 스티븐 호킹이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호킹은 이 유명세를 이용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의 처지에선 적절한 판단이었다. ‘대중적인 과학서’에 대해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는 1만파운드(약 2000만원)의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호킹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의 출판 에이전시와 접촉했다. 미국 출판사 밴텀은 계약금 25만달러(3억원)를 제의했고, 호킹은 이를 받아들였다.

남처럼 글을 쓰기 어려운 호킹의 상태도 그렇고, 연구와 집필을 병행하는 일정 때문에 ‘시간의 역사’ 집필은 2년 이상 걸렸다. 호킹은 ‘방정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책을 사는 독자는 반으로 줄어든다’는 밴텀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대한 쉽고 평이하게 우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다. 1985년 여름, 2년에 걸친 ‘시간의 역사’ 집필을 끝낸 호킹은 강연 초청을 받고 중국에 갔다. 그리고 유럽 공동 핵 연구기관인 CERN의 초청을 받아 제네바로 향했다. 이 무리한 일정이 화근이었다. 제네바에서 급작스러운 호흡 곤란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됐다. 루게릭병 환자에게 치명적인 폐렴에 걸리고 만 것이다. 영국 병원으로 후송된 호킹은 제인의 동의하에 기관지절개술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건진 대가로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전신마비에 이어 말조차 할 수 없게 된 남편을 보는 제인의 심정은 암담했다. 마침내 끝장이 왔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시간의 역사’가 그해 가을 출판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의 역사’ 판권이 세계 각국으로 신속히 팔려나갔으며 영국에서는 곧장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그로부터 5년간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시간의 역사’ 양장본은 영국에서만 60만부 이상 팔렸고 전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과학서적으로는 실로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독자 몇몇은 책 표지에 실린 호킹의 사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가까스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뒤틀린 육체에 경도돼 이 책을 집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심한 장애에 갇혀 있는 학자가 무슨 재주로 책을 썼을까 하는 호기심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호킹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호킹은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 러더퍼드와 아인슈타인의 연구 결과와 그들이 이루어낸 소립자 물리학,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왜 블랙홀이 검지 않으며 우주는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등 우주물리학의 방대한 이론들을 차분하게 설명해나간다. 그리고 모든 우주 현상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통일이론’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책을 맺는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과학, 그중에서도 물리학이 존재의 근원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를 실감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교황청이 호킹이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간의 역사’ 성공으로 마침내 호킹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고,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의 명예를 얻었으며, 인세 수입을 통해 충분한 돈도 벌었다(2006년까지 그의 인세 수입은 80억원에 달했다).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호킹의 초상화가 걸렸고, 미국의 TV 드라마 ‘스타트랙’이 그에게 출연을 요청했다. 곁에는 늘 그를 보살피는 아내 제인과 아이들이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은 호킹 부부의 막내 티모시가 1979년에 태어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호킹의 전신이 마비되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놀리곤 했다. 호킹은 이런 유머를 몹시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호킹의 스토리,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삶은 이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1990년, 호킹과 제인은 25년에 걸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새로운 배우자를 만났다. 호킹의 간호사이던 일레인 메이슨이 그의 새로운 아내가 되었다. 일레인 또한 호킹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는데, 그녀의 전 남편이 호킹에게 컴퓨터음성합성기를 만들어준 컴퓨터공학자 데이비드 메이슨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호킹은 왜 제인과의 결혼생활을 접어야 했을까? 호킹 본인은 이 첫 번째 이혼에 대해 어떤 설명이나 변명도 한 적이 없다. 다만 이혼으로 인해 세 자녀와 결별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루시는 신문 기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비난했다. 제인은 훗날 호킹과의 결혼생활에 대한 책을 출간해 결별의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두 사람의 종교 갈등(호킹은 무신론자지만 제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야만 했던 제인은 남편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자신이 남편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천재답게 자기중심적인 호킹은 제인의 좌절감을 제대로 살펴주지 않았다.

1995년 호킹은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생활을 했지만 이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초부터 호킹이 아내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호킹은 몇 번인가 타박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실려왔으며 목에 면도날로 그은 상처가 나기도 했다. 2004년 호킹의 전담 간호사들이 일레인을 폭행죄로 경찰에 고소했지만, 피해 당사자인 호킹이 일레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바람에 경찰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호킹 전담 간호팀에서 일하다 그만둔 한 간호사는 “일레인이 호킹 박사를 너무도 가혹하게 대해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만년의 불행

일레인을 둘러싼 추문이 잇따라 터지면서 두 사람은 이혼 소송에 들어갔고, 2006년 이들은 법원을 통해 이혼했다. 이듬해 호킹은 재혼으로 인해 소원해졌던 세 자녀와 화해했다. 늘 삶에 대해 낙관적이고 유머를 잃지 않았던 호킹은 일레인과의 사건으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의 오랜 친구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호킹은 지금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노령에 들어선 데다 건강마저 악화된 호킹이 더 이상 연구업적을 이루거나 새로운 저서를 내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올해 안에 30년 동안 재직해온 루카시안 석좌교수 직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사실상의 ‘은퇴’인 셈이다.

호킹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루게릭병에 걸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데, 사실 나는 이 병에 대해 그리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가능한 한 일반인과 똑같이 생활하려 하고 있고, 실제로 병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기억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호킹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삶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불공평함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낙천적인 남자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 닥쳐온 개인적 불행은 인간에게는 의지나 낙천성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숙명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불치병이라는 운명의 장난에 걸려든 호킹에게 숙명의 굴레는 너무 가혹한 듯싶다.

신동아 200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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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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