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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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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란한 역사와 지정학적 다양성 때문에 터키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지리적 상징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 터키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적 상징물이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Ataturk)다. 아타튀르크가 사랑했고, 아타튀르크만큼 터키 국민이 사랑하는 술이 ‘라키(raki)’다. 라키는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물과 섞어 마신다. 이때 화학반응으로 투명했던 술 색깔이 젖빛 흰색으로 변한다. 터키 사람들이 라키를 ‘사자의 젖(lion′s milk)’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동상.

지형적으로 동서양에 걸쳐 있는 터키는 세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국가다. 우리나라와는 6·25전쟁 때 연합군으로는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해 전쟁을 치른 남다른 인연을 맺은 나라기도 하다. 이 때문에 현지에서는 우리나라를 흔히 ‘형제의 나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2002년 월드컵에서는 4강까지 진출해 우리나라 대표팀과 격돌해 더욱 친숙한 느낌을 주는 나라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터키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오랜 이슬람 역사를 지닌 터키는 20세기 초 현재의 터키공화국으로 새 출발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의 형태로 유럽식 제도를 채택했다. 물론 지금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 신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교가 아니며 기독교 등 타 종교의 활동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다.

어쨌든 찬란했던 오랜 역사와 함께 그 지정학적 다양성 때문에 터키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지리적 상징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 터키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적 상징물이 하나 있다. 별칭인 아타튀르크(Ataturk)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바로 그 인물이다.

현대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는 그에 대해 전혀 몰랐던 일반 관광객들도 일단 터키에 발을 들이면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그 족적을 발견할 수 있다.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우선 터키의 ‘상징 도시’ 이스탄불의 관문인 국제공항 이름이 아타튀르크이며,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큰길 이름도 아타튀르크다. 이 길과 연결되어 골든혼(golden horn)을 가로질러 신시가지로 향하는 다리 이름 역시 아타튀르크다. 그런가 하면 신시가지 중심의 탁심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1938년 그가 사망한 장소였던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사망 시각인 9시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춘 시계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수도 앙카라의 아타튀르크 추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 여러 도시에서도 그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터키 국민이 자발적으로 아타튀르크라는 인물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끼고 있는 점이다. 이 때문에 터키 곳곳의 작은 상점에는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내걸려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타튀르크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쳐놓은 정도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토록 광범위하게 터키 국민의 진심 어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아타튀르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1881~1938)는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지금의 마케도니아 지역 살로니카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살로니카는 여러 인종이 같이 어울려 살던 번창한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국제 감각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아타튀르크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 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에 그를 보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당시 터키의 관습대로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해 무스타파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그를 보고 담당 수학교사가 감탄해 완벽함을 뜻하는 터키어 ‘케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타튀르크 자신도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해 그 후부터는 무스타파 케말로 불렸다. 그런데 아들이 장사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군대에 관심이 있었던 아타튀르크는 이후 마케도니아의 군사 예비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있는 오토만 군사대학에 입학해 1905년 졸업했다.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그가 졸업할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한때 강성했던 위세를 잃고 유럽 변방의 힘 빠진 국가 취급을 받고 있을 때였다. 1453년 ‘정복왕’ 메흐멧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세계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그 후 2세기 이상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랍지역과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반도 국가들, 그리고 헝가리 지역까지 모두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그 기세를 몰아 1683년에는 서유럽의 관문인 오스트리아까지 진출해 일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이후에도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시대의 변혁에 뒤처지면서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어쨌든 아타튀르크는 졸업과 함께 지금의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 제5군단에 초급장교로 배속된다. 이곳에서 그는 ‘조국과 자유’라는 이름의 개혁 성향 비밀 장교모임에 가입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전제왕정 제도에 대한 반감을 키운다. 1907년 마나스티르에 있는 제3군단으로 전속한 아타튀르크는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청년 투르크당은 당시 술탄이었던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정지된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체를 폐지하여 입헌군주제를 실현할 목적으로 1889년 대학과 사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었다. 이후 청년 투르크당은 1906년 통일진보위원회(CPU·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라는 공식적인 정당 단체를 만들어 실질적인 혁명 세력으로 등장했다. 1908년 술탄 정부가 발칸반도의 이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발칸반도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자, 청년 투르크당은 혁명을 일으켜 그해 6월24일 헌법을 부활시키며 의회제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 혁명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는 중요 인물로서 점점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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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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