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발칙한 ‘도둑’ 연기로 부활 전지현

“김수현과의 키스신보다 육두문자 대사가 더 짜릿했어요”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2-08-22 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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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한 ‘도둑’ 연기로 부활 전지현
    서울 지하철 5호선 공덕역에는 열차 타는 승객의 눈길을 끄는, 대문짝만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과 1980~90년대를 풍미한 홍콩 누아르 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 런다화(任達華)까지 합류한 최동훈 감독의 신작 ‘도둑들’ 포스터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아침 출근길을 반긴 이 인쇄물은 전지현(31)과의 예정된 만남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가는 배우들 사이에서 혼자만 고개를 쳐든 사진 속 그의 아우라는 단연 돋보였다. 개성 강한 연기파 배우 김윤석도, 건강미인 김혜수도,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전국의 여심을 뒤흔든 김수현도 그 옆에선 밋밋해 보일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개봉 20일 만에 940만 관객을 돌파하며 무서운 기세로 인기몰이 중인 ‘도둑들’에서 전지현은 최대 수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존재감이 그만큼 돋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문 분야가 다른 10명의 도둑이 뭉쳐 마카오에 숨겨진 300억 원짜리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과정을 그린다. 전지현은 이들 중 유일하게 사랑이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줄타기 전문 도둑 ‘예니콜’ 역을 맡았다. 예니콜은 “어마어마한 쌍년” “이렇게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키스하려면) 입술에 힘 좀 빼” 같은 발칙한 언사로 폭소를 자아내는가 하면 농염한 몸짓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관객을 숨죽이게 한다.

    7월 20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스위트룸에서 그를 만났을 때 기자를 놀라게 한 건 ‘자연미인’으로 정평이 난 그의 미모가 아니다. 신비주의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감 없이 풀어내는 언변과 예니콜을 빼닮은 담백한 성격이다.

    “발랑 까지진 않았죠?”

    ▼ 이번에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최동훈 감독님이 예리하세요. 예니콜 역으로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모아놓은 것 같아서 놀랐어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었거든요.”

    ▼ 극중 캐릭터가 실제 성격과 닮았나요?

    “제가 발라당 까지진 않았죠. 기본적으로…(웃음).”

    ▼ 거침없는 면은 비슷하지 않나요?

    “성격상 그런 면이 좀 있어요. 무모하게 도전하거나 무모한 일을 벌이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행동이 앞설 때가 많거든요. 생각할 때 이미 몸이 그걸 표현하고 있어요. 좀 피곤하죠.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심사숙고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 점이 비슷하다고 할까. 무엇보다 예니콜을 연기할 때 굉장히 속 시원했어요. 평소에는 배우로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니콜은 ‘나 아니면 다 쓸모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내키는 대로 속 시원하게 말하고 행동하잖아요. 철저히 개인주의고, 인생에 아쉬울 것도 없고. 그런 게 대리만족이 되더라고요. 마카오 박(김윤식 분)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궁금한 게 있으면 다 물어보고, 자기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슬쩍 찔러보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더라고요.”

    ▼ 최동훈 감독의 부인(안수현 케이퍼필름 대표)과 친분이 있다면서요?

    “네. 잘 알죠. 2003년에 ‘4인용 식탁’이라는 영화를 같이 작업했어요. 당시 (안수현) 언니는 제작프로듀서였어요. 그 영화가 인연이 돼 영화계 선후배로 친하게 지내다가 언니가 감독님과 결혼하면서 저도 자연스레 감독님에게 호감을 갖게 됐어요.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흥행감독 중 한 명이고 최고의 이야기꾼이잖아요. 당연히 배우로서 같이 작업하고 싶었죠. 그러던 중 감독님이 ‘도둑들’이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언니를 통해 알게 됐고, 제가 영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서로 같이 작업하자는 무언의 사인이 오갔었죠.”

    ▼ 그럼 예니콜은 애초부터 본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개릭터인가요?

    “감독님께 여쭤봐야죠. 영화에서 마카오 박(김윤석 분)이 예니콜을 보면서 ‘여자가 치마는 짧고 머리는 길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님이 시나리오 작업할 때 그 부분에서 ‘이거 전지현이 안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셨대요. 대사마다 감독님의 기발한 발상과 재치가 담겨 있죠.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스타파(派)의 선두주자

    배우들의 대사 중 일부는 최 감독의 실제 경험담이다. 극중 잠파노(김수현 분)가 예니콜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할 때 예니콜이 담담한 어조로 내뱉는 “입술에 힘 좀 빼”라는 대사는 최 감독이 연애 시절 아내에게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 이번 영화에서 데뷔 15년 만에 첫 키스신을 찍은 거라면서요?

    “하하. 그래요? 미처 의식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여성 캐릭터 위주의 영화나 판타지 요소가 들어간 영화에는 스킨십이나 키스가 어울리진 않죠. 그런 영화를 주로 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키스신을 이제야 찍었네요.”

    ▼ 상대가 연하의 꽃미남 김수현 씨였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그 친구가 ‘해를 품은 달’을 하기 전에 이번 영화를 찍었는데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키스신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정이 들진 않았어요. 다만 그 친구는 이미 한두 번의 전적이 있었으니 제가 밑진 셈이죠(웃음). 사실 기억에 남는 건 따로 있어요. 재미있는 대사들이 자주 생각나요. 웃긴 대사가 참 많거든요. 그 맛을 살리고 싶었어요. 너무 엉뚱하고 재미있어서 딱 봐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았어요. 육두문자가 섞인 대사나 태연하게 잘난 척할 때가 재미있었어요. 대신 비어, 속어가 많으니까 가벼워 보이지 않으려고 고민 좀 했죠.”

    발칙한 ‘도둑’ 연기로 부활 전지현

    영화 ‘도둑들’에서 전지현은 줄타기 전문 도둑으로 등장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뭔가요.

    “모든 신을 재미있게 즐기되, 긴장하면서 촬영했는데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김윤석 선배(마카오 박)와 함께 찍은 신으로 할래요. 김윤식 선배가 소위 연기파 배우잖아요. 근데 현장에서는 아우라가 굉장히 편안하고 자유로웠어요. 부럽더라고요.”

    ▼ 현장을 휘어잡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김윤석 선배에겐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어요. 물론 현장 분위기가 그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휩쓸려갈 때가 많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나쁜 답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같이 분위기를 타면서 연기하는데도 그 선배는 유독 자유롭더라고요.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어도 연기가 살아요. 멋지더라고요.”

    ▼ 출연진이 스타파와 연기파로 나누어져 있었다던데, 소속이 어느 파였나요?

    “스타파죠. 스타파의 선두주자요. 김윤석 씨가 절대 스타파가 될 수 없듯 스타파도 아무나 못 하는 거예요(웃음). 김윤석 선배가 영화시사회 끝나고 기자간담회에서 멋진 말을 하시더라고요. ‘5개월 동안 촬영하면서 단 한 명의 스타도 없었다’고. 맞는 말이에요. 저흰 그저 한 팀이었어요. 팽팽한 신경전이나 경쟁구도 없이 서로 잘해보자고 격려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이 멤버 그대로 촬영을 몇 년이고 계속해도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평소에 알고 싶고 궁금했던 배우들을 한꺼번에 만나 즐거웠어요.”

    추억보다 일

    ▼ 김혜수 씨와 미모를 놓고 각을 세우진 않았나요?

    “전혀요. 색깔이 워낙 다르니까요. 배우 본연의 색깔도 다르고, 영화에서도 캐릭터 간에 부딪칠 일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 것만 각자 잘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왜냐하면 도둑 개개인의 매력이 굉장히 뛰어나거든요. 다 도드라지죠. 각자 맡은 바만 잘해도 영화가 잘되겠더라고요.”

    ▼ 줄 타는 연기가 인상적이던데 직접 한 건가요?

    “대부분 직접 했어요. 아주 위험한 부분만 대역을 썼죠.”

    시간을 거슬러 그의 연기 인생을 잠시 돌아보자. 1997년 전지현은 하이틴 잡지 ‘에꼴’의 표지모델로 얼굴을 알린 뒤 이듬해 박신양, 김남주가 주연한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로 연기 활동을 시작한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오종록 PD는 신인답지 않은 그의 끼와 가능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1999년 그를 다섯 남매의 삶을 그린 드라마 ‘해피투게더’에 남매 중 막내 역으로 캐스팅한다. 이 작품은 이병헌, 송승헌, 김하늘 등 화려한 출연진과 탄탄한 스토리가 어우러져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조연으로 맛깔스러운 연기를 펼친 전지현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한 복사기 광고에 출연한 그는 눈을 뗄 수 없는 뇌쇄적인 테크노댄스로 단숨에 몸값을 올린다. 그가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당찬 이미지를 표방한 X세대의 대표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 여세를 몰아 스크린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그는 ‘화이트 발렌타인’(1999) ‘시월애’(2000)에 잇따라 출연한다. 2001년엔 ‘엽기적인 그녀’로 아시아를 사로잡으며 미모의 한류스타로 배우인생의 전성기를 누린다.

    ▼ 원래 꿈이 배우였나요?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꾼 건 아니에요. 우연한 기회에 잡지 표지모델을 하고 그것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하다 보니 잘하고 좋아지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 일을 하면서 배우생활을 오래 하고픈 꿈이 생겼고, 그 꿈을 이뤄가고 있어요”

    ▼ 서울 강남에 있는 언북초등학교, 언주중, 진선여고를 나왔던데 학창 시절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발랄했어요. 남자친구보다 여자친구가 많았어요.”

    ▼ 강남에 계속 살았으면 어려움 없이 자랐겠네요?

    “맞아요. 줄곧 강남에서 살았어요. 집안에 특별하게 내세울 건 없지만 가정형편이 나쁘진 않았어요. 또 중학교 시절부터 일을 해서 나름대로 돈을 벌고 있었고요. 일을 하면서도 학교생활에는 충실했어요. 몰두해야 할 일이 있어서인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방황하고 힘들 만한 시기를 잘 비껴갔죠.”

    ▼ 연예인이라 학교생활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전 한 번도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 할수록 외로워진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어요. 그래서 친구관계나 학교생활로 속을 끓인 적은 없어요. 대신 일상 속에서 추억을 만들어가는 평범한 삶이 어떤 건지는 몰라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최근에 ‘신랑(남편 최준혁씨)’이 대학 졸업할 때 선배가 바지를 벗겨 난처했던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어요. 그때 든 생각이 ‘난 당시에 뭘 찍고 있었지?’였어요. 그 사람에겐 추억이 있지만 제겐 작품 속 추억이 전부거든요. 다시 태어나서 일과 추억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거냐고 서로에게 물었는데 그 사람은 추억, 저는 일을 선택했어요. 일 때문에 잃은 건 없어도 얻은 건 많으니까요.”

    “운동 안 하면 불편해요”

    ▼ 일하면서 얻은 별명은 뭔가요?

    “해외에선 절 ‘지아나’라고 불러요. 외국 사람들 귀에는 ‘지현아’가 ‘지아나’로 들렸던 거예요. 저도 지아나가 발음하기 편하니까 외국에서 활동할 땐 지아나라는 이름을 써요. 제 별명이자 영어 이름인 거죠.”

    ▼ 슬럼프를 경험해봤나요?

    “일이 많이 안 들어올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슬럼프라고 인정할 만큼 낙담하거나 애타하지는 않았어요.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힘든 일이 있을 땐 운동으로 극복하거든요.”

    ▼ 어떤 운동을 즐기나요?

    “헬스클럽에서 땀 흘리는 것 자체를 좋아해요. 예전에는 아령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이두박근이 커져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요즘은 쉽게 살찌는 부위를 집중 공략하면서 체지방을 태우는 유산소운동 위주로 해요. 워낙 먹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쪄요. 한때는 먹기 위해 운동했어요. 먹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드니까 먹되 운동하자,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운동을 제가 즐기는 수준까지 갔어요.”

    ▼ 운동을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편인가요?

    “매일 아침시간대에 운동해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운동을 거르지 않아요. 헬스클럽 가면 매번 같은 사람들을 봐요. 늘 같은 시간대에 운동하니까 보게 되는 거죠. 다들 운동이 생활의 일부가 된 사람들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운동을 안 하면 몸이 불편해해요. 요즘 바빠서 2주가량 운동을 못했더니 갑갑해요. 땀을 좀 흘리고 싶은데 ‘베를린’이라는 영화도 찍고 인터뷰도 해야 해서 운동할 시간이 안 나더라고요.”

    ‘엽기적인 그녀’ 뛰어넘기

    발칙한 ‘도둑’ 연기로 부활 전지현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드라마가 2편뿐이다. 현재 촬영 중인 ‘베를린’을 포함해 영화가 11편으로 월등히 많다. 이 가운데 흥행한 작품은 ‘엽기적인 그녀’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2004) 정도. 그런데도 그가 지난 10년간 스크린 활동을 고집해온 이유가 뭘까.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한때 제가 ‘엽기적인 그녀’로 큰 성공을 거뒀을 당시 한국 영화가 한류의 중심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 영화에 관심이 갔고, 한류의 중심에 있으면서 영화에 집중하게 된 거예요. 어떤 작품이든 소재와 역할이 좋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해요. 다만 그동안 쭉 영화 시나리오만 봐와서 드라마 대본 검토하는 게 어려워요. 시나리오처럼 완성된 내용이 아니라 1, 2부만 보고 출연을 결정해야 하니 불안하죠. 감이 없어서요. 영화는 감독 위주인 데 반해 드라마는 작가 위주라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최근 친한 드라마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드라마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고 있어요.”

    ▼ ‘엽기적인 그녀’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여자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엽기적인 그녀’ 이후 그와 장르가 비슷한 여성 캐릭터 위주의 영화가 많이 나와 히트를 했죠. 영화로 한류열풍을 일으켜 문화 트렌드를 바꾸고 영화배우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 전지현에게 ‘엽기적인 그녀’란?

    “지금의 절 있게 해준 대표작이죠. 어릴 때 대표작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고 행운이었죠.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매번 ‘엽기적인 그녀’처럼 성공할 만한 작품을 골랐지만 관객의 기대치에는 못 미쳤어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영화가 계속 흥행 부진으로 이어지면서 연기보다 광고로 잘나가는 CF스타니, 신비주의니 하는 질타 아닌 질타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이미지로 굳어가는 게 씁쓸했지만 배우생활을 오래할 거라는 의지가 확고했기에 초연할 수 있었어요.”

    ▼ 작품이 흥행에 실패해도 상처를 안 받는다?

    “속이야 좋진 않죠. 다만 결과보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데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배우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작품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어요. 연기도 캐릭터에 따라 기복이 있을 수 있고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배우를 탓하고 질타하며 그 사람을 다 아는 듯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싶어요. 배우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해야죠. 물론 작품을 할 때마다 평가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전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도둑들’ 같은 작품을 기다렸죠(웃음).”

    배우 전에 좋은 사람이고 싶어

    ‘도둑들’은 그가 2008년 황정민과 호흡을 맞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이후 4년 만에 출연한 한국 영화다. 그 사이 그는 해외에서 다국적 합작영화 ‘블러드’(2009)와 폭스가 제작한 미중합작영화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를 찍었다. 당시 경험에 대해 묻자 그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속사포처럼 말을 토해냈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이었죠. 할리우드는 섬세한 부분까지 역할 분담이 기막히게 잘돼 있었어요. 모든 작업이 자로 잰 듯이 진행돼서 전 그 안에서 연기만 잘하면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간단치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해외에서 촬영한다는 자체가 힘들었어요. 말이 안 통하니까요. ‘블러드’ 첫 촬영 때는 한 줄짜리 영어 대사도 벌벌 떨면서 했어요. 잠도 못 자고 대사를 외워도 자꾸 헷갈리더라고요. 대사가 많지 않은 액션영화라 그나마 다행이었죠.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해외진출을 안 하려고 했는데 ‘설화와 비밀의 부채’라는 작품이 들어왔어요. 액션도 없고 대사로만 이뤄진 드라마 장르더라고요. 쉽게 찍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밥상이 차려지기만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자, 나만 할 수 있는 영역을 해외 진출을 통해 구축해보자는 생각이었죠. 배우생활을 오래하는 게 꿈이기 때문에 활동 무대를 넓히려고 그런 도전을 했던 거예요. 그 바람에 한국 영화와 잠시 멀어지긴 했지만 저 자신을 좀 더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다시 해외 활동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가 지나온 나날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009년, 데뷔 시절부터 몸담았던 소속사 대표가 그의 휴대전화를 불법 복제해 그를 몰래 감시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을 때가 아닌가 싶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컸을 법한데 그는 소속사를 박차고 나올 것이란 예상을 깨고 2010년 1인 기획사를 차려 독립하기 전까지 계약 관계를 유지했다. 왜 그랬을까.

    “이별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워낙 오랫동안 한 소속사에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와서 뭔가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게다가 회사 안에 제 일을 돕는 전담팀이 따로 있어서 소속사와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한 것이지 계약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어요.”

    ▼ 닮고 싶은 롤 모델이 있나요?

    “없어요. 다만 어떤 작품에서든 일관성 있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는 해요. 못하니까, 잘 모르니까 노력하는 거죠. 이번에 ‘도둑들’ 하면서 느낀 건 좋은 배우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저도 배우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화면만 보고도 느낌이 오잖아요.”

    ▼ 좋은 사람의 기준이 뭔가요?

    “기본에 충실한 사람 아닐까요. 연기하다 보면 관객의 시선을 의식해 좋은 이미지로 비치려고 가식이나 전략 같은 불순물을 자신도 모르게 첨가하게 돼요. 하지만 그런 건 오래가지 못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숨기려 해도 들키게 마련이죠. 그래서 저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어필하기보다 제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절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성장했잖아요. 성장해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줬고요. 그렇게 잘 사는 것이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제 결혼까지 해서 그런지 여배우로 나이 들어가는 게 더 기대되고,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신랑 매너와 이해심 최고”

    전지현은 4월 13일 외국계 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다니는 동갑내기 금융맨 최준혁 씨와 결혼했다. 최씨는 한복 디자이너로 유명한 이영희 씨의 외손자이자 최곤 국제강재 회장의 차남이다. 최 회장은 알파에셋자산운용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맞아요. 아버님이 아주 예뻐해주세요.”

    ▼ 결혼 소식을 갑작스러워 하는 팬도 있어요. 연애하는 게 알려져 좀 서두른 건가요?

    “아뇨. 그냥 때를 맞춰서 한 건데요(웃음). 연애를 1년 반 했으니까.”

    ▼ 남편이 어릴 적 친구라면서요?

    “같은 동네에서 자랐어요.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이 소개해서고요.”

    ▼ 웃음 코드가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만난 건가요?

    “웃음 코드가 같은 건 중요하죠. 이상형이란 건 없는 것 같고요. 어릴 적에는 ‘이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이 들수록 ‘나에게 어떤 사람이 맞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상대가 나에게 잘 맞는 것만큼 내가 상대에게 잘 맞는 사람인지도 중요한 문제죠. 결혼은 저 혼자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말끝에 “남편과 잘 맞나보네요?” 하고 질문을 던졌더니 그가 얼굴에 화색이 돌며 수줍게 입을 연다.

    “저희는 잘 만난 것 같아요. 일단 닮았어요. 외모도 많이 닮았고 분위기도 많이 비슷해요. 알게 모르게 그런 데서 오는 편안함이 있어요. 신랑은 기본적으로 이해심이 많고 매너가 좋아요. 매너는 몸에 배어 있어요. 사실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그런 거잖아요.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매너 좋고 잘 이해해주는 남자요. 그래서 저도 그런 면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 결혼 후에 달라진 게 있나요?

    “어릴 적부터 일과 생활을 별개로 취급해 달라진 건 거의 없는데, 전보다 확실히 여유로워졌어요.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느낌이 연애할 때하고는 다르더라고요. 무서울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느껴져요. 그래서 대본을 읽거나 연기할 때나 몰랐던 감정이 나오니까, 그런 점은 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죠.”

    ▼ 배우 이영애 씨와 친하다고 들었어요. 지난 2월에도 이영애 씨가 낳은 쌍둥이 남매의 돌잔치에 유일하게 참석한 스타로 이목을 끌었는데, 돌잡이 모습 보면서 아이 욕심이 생기지 않던가요?

    “이제 막 신혼인데요. 임신과 출산, 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 일하느라 못 간 신혼여행은 언제 갈 건가요?

    “확정적이진 않은데 9월쯤에는 시간이 되니까 그때쯤 가려고요. 장소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간 쌓인 오해와 진실

    ▼ 요리를 꽤 잘한다고 들었어요. 결혼을 염두에 두고 따로 배웠나요?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먹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맛보는 감각이 좋죠(웃음). 굉장히 까다로운 미식가는 아니지만 맛있는 걸 좋아해서 요리할 때도 제가 원하는 맛을 어느 정도 맞추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머니께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어머니가 요리를 무척 잘하세요.”

    ▼ 말을 풀어내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네요. 책을 많이 보나요?

    “어릴 때는 많이 읽었어요. 요즘에는 읽으려고 하면 통 집중이 안 돼요. 생각이 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영화도 집에서 못 봐요. 집중이 안 돼서 꼭 영화관에 가서 보죠.”

    그동안 그는 인터뷰를 즐기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에 관한 입방아도 잦았던 게 사실이다. 이참에 오해를 바로잡기로 하고 즉석에서 ‘진실게임’을 시작했다.

    ▼ 신비주의자다?

    “아니에요. 언론이 지어낸 말이죠.”

    ▼ 화교다?

    “가장 터무니없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을 때마다 황당했어요.”

    ▼ 춤에 능하다?

    “그렇지 않아요. 리듬은 잘 타요. (복사기 광고에서 선보인) 테크노댄스는 그냥 어렸을 때니까 시키는 대로 한 거지, 춤추는 걸 좋아하진 않아요.”

    ▼ 술을 잘한다?

    “못해요. 주량이 몇 잔까지도 안 가요. 한두 모금이에요.”

    ▼ 명품을 좋아한다?

    “싫어하진 않아요. 저도 여자니까 갖고 싶은 것은 많아요. 그래도 (명품에) 집착하진 않아요. 명품보다 그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니까요.”

    ▼ 사랑과 결혼은 별개다?

    “아니요, 같아요. 사랑하면 결혼해야죠.”

    ▼ 배우가 천직이다?

    “맞아요. 해가 갈수록 그런 느낌이 더해요.”

    ▼ 그동안 호흡 맞춘 상대배우 중 다시 작품을 같이 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요?

    “지금 ‘베를린’을 같이 하고 있는 하정우 씨요. 기회가 되면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어요. 여자가 봐도 질투 날 정도로 매력이 넘쳐요. 배우로서는 다재다능하고요. 연기도 잘하고 그림이나 다른 쪽으로도 뽐낼 게 많아 그런 점에서도 부러워요.”

    ▼ 배우가 안 됐으면 뭘 하고 있을 것 같나요?

    “상상 못하겠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잘하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다른 재주가 전혀 없어요.”

    ▼ 연예계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한 적 있나요?

    “없어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다 저에게서 비롯된 거니까요. 후회하지 않아요.”

    ▼ 후회 없는 삶을 산다니, 멋지네요.

    “아니에요. 김혜수 언니를 만나봐야 해요. 그 언니가 얼마나 더 멋진 배운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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