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으로 평양을 다녀온 한국 체육계의 거목 김운용. 그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 스포츠계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해왔다. 젊은 시절 여러가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70년대 이후부터는 오직 국제 스포츠 외교에 승부수를 던졌다.》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정식 취임한 보름후인 1981년 9월18일 김포공항.
서울발 서독 프랑크프루트행 대한항공 901편은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난 것일까?
그러나 승무원들은 그다지 특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출발예정시간을 30여분이 지나서야 검은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서둘러 탑승했고, 그제서야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비행기는 서울 하늘로 솟아올랐다.
“ 세울, 꼬레아!”
「선더버드 9·20 작전」
선더버드 작전이란,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 위한 정부주도의 극비작전암호다. 이 비행기에 마지막으로 탄 승객은, 그때까지 정치와 체육계에서 물러나 있던 비밀특사자격 박종규씨(전 청와대 경호실장)였다.
우리의 여러가지 유치전략 가운데 하나인 이 작전은 박종규씨를 비롯한 우리 대표단이 당시 서독의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메이커인 아디다스(Adidas)의 다슬리회장과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ANOC)의 바스케(멕시코)회장 등과 긴밀하게 접촉,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1981년 6월이 다 지나서였다. 국내는 5共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을 본 세계는 한국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문제 투성이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미 일본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속히 국민의 단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과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외교적인 이익을 고려해 올림픽 유치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서울에서 열린 첫 국제 규모의 세계사격대회를 성공리에 치르고 난 직후인 1978년이었다.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9년 봄 국민체육심의회를 통해서였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택수 IOC위원, 정상천 서울시장, 박찬현 문교부장관, 박종규 사격연맹회장과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와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집행위원을 맡고 있던 나를 포함한 심의회에서 올림픽 개최여부를 심도 있게 논의했지만 박종규씨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연이은 12·12사태 등으로 올림픽 유치논의는 일단 중단되었다.
5共 들어 다시 올림픽 유치 논의가 시작됐는데 국민의 단합과 국위선양, 대외 홍보에서 올림픽보다 나은 범국가적 이벤트는 없다고 판단, 이를 적극 추진키로 했다. 이때 박종규씨의 설득이 큰 힘이 되었다.
유치단이 서울을 출발하기 4개월 전인 81년 5월 체육계에선 경제계의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장를 비롯, 언론계의 이원홍 KBS사장,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대한체육회장, 이연택 국무총리실 행정관 그리고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WTF) 총재직을 맡고 있던 나를 포함해서 올림픽 기획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처음에 참여했다가 막판에 빠져나왔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어느 날 IOC 사무총장 모니크 베를리우 여사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올림픽 개최지 선정이라는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총회에 한 사람이 두 단체의 업무를 보는 것은 규정상 불가능하므로 내가 맡고있는 국제경기연맹 (GAISF) 회장과 서울 올림픽 유치단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GAISF회장 자격이 유치 활동을 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였다. 나는 이 충고에 따랐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
제 24회 올림픽 개최 도시가 서울로 결정되었다.
“ 세울 , 꼬레아!”
지금까지도 나의 귓전에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그 한마디가 생생하기만 하다. 이 말은 동방의 작은 나라를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급부상시키는 동시에 나의 어깨 위에 스포츠 외교라는 막중한 책임을 올려놓았다.
총회가 끝난 뒤 그날 저녁, 쿠루트하우스에서 유치성공 자축 리셉션이 열렸다.
비록 스포츠인 출신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정주영 회장은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등 몹시 기뻐했다.
나의 후원자, 사마란치
세월이 지나면 새 친구 사귀기도 어렵고, 기왕에 있던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신분이나 활동범위, 경제력 등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25년 간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 중 하나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75년 로마 NOC(국가 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첫 대면부터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다음해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GAISF 총회에서는 당시 IOC부위원장이던 그가 내게 꽃을 보내왔다. 서로 가까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을 펴면서부터였다.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많은 난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올림픽 게임 이래 가장 훌륭하게 치러낸 대회였다고 자부한다. 특히 서울 올림픽 경기 스케줄과 TV방영권 문제가 어렵게 꼬일 때 이를 함께 해결하면서 우리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는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과 GAISF의 토머스 켈러 회장이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켈러의 뒤를 이어 이 단체의 회장 선거에 출마했고, 켈러의 출마 포기 선언 후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GAISF회장이 된 이후 내가 선택한 것은 IOC와의 대립이 아니라 평화였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올림픽 정신에 근거하여 상호 동반자 관계를 형성, 국제 스포츠계의 평화를 유지하자는 나의 뜻을 사마란치가 수용했다.
사마란치는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에스파냐 (스페인)가 민주 왕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그는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거나 서울 평화상을 받으러 오는 등 그 동안 서울만 30차례 방문했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미래를 매우 밝게 보는 친한파가 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12월16일 대통령 선거를 하던 날. 그는 30분 간격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개표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낮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소식을 전하기 쉬웠지만, 한밤중에도 그는 30분 간격으로 전화를 했다. 자다가 일어나 텔리비전의 개표상황을 말해 주는 것을 보면서 집사람이 “사마란치 위원장 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을 정도였다.
이튿날 다시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과 전화였다.
“김 위원, 어제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가 불안해져 올림픽을 치르는데 장애가 될까 싶어 걱정이 돼서 그랬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앞으로 크게 성공할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은 그 품성과 능력을 가지고 머지않아 세계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그가 서울에 올 때마다 나는 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다. 공식 스케줄 외에 그의 사적인 활동은 저녁을 먹는 것이 고작이라는 점이다. 그는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다. 식사시간에도 와인 한두 잔이 고작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밤 아홉 시 전에 끝내고 열 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든 꼭 미사에 참석한다.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다.
1982년 박종규씨가 사마란치를 서울의 한 요정으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 사마란치는 향응이 제공될 기미가 보이자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일이 있어 먼저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밖에 모른다.
나는 그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을 되찾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한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김 부위원장 없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전보를 치고, 확인 전화를 걸어 나의 안전을 묻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1990년 내가 망막박리 현상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누워 있을 때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가 하면 수술 후의 경과를 스위스 병원에서 체크할 수 있게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한때 아마추어 정신을 옹호하는 올림픽이 상업주의에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이에 대해 사마란치는 평소의 소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스포츠는 혼자서 설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꾸준한 경제적인 후원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스포츠가 발전하지 못합니다. 돈이 스포츠나 선수를 지배하면 안 되지만 스포츠를 위해 돈이 쓰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나는 상업주의 경향은 오히려 올림픽 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까지 자만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희망과 목표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라는 것, 1차 목표를 2차 목표로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는 차선책도 멀리 보면 최선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함은 언어와 피부와 민족의 장벽을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다음해 2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야당 지도자를 초대했다.
민정당 윤길중 대표를 포함, 신라 호텔에서 조찬 형식으로 만난 자리에 나는 IOC 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3김씨는 남북 체육교류에 쏟는 IOC의 노력과 북한이 주장하는 올림픽 공동 개최의 비현실성에 대해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한국 국민과 IOC가 다시 한번 노력해야 하며 서울 올림픽 성공을 위해 민족 차원에서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만남은 올림픽운동과 민족 통합을 위해 아주 효과적이고 알찬 자리가 되었다.
영국의 자존심, 앤 공주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총재의 요청으로 재야 대표들과 만나 IOC의 입장과 노력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나도 한국의 IOC위원 자격으로 자리를 같이했다.
그 만남이 있은 후로 재야 지도자들이나 학생들의 올림픽 공동개최 요구는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사마란치 위원장이 스포츠 지도자로서 왜 정치인들을 만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야 정부도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98년 2월25일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본래 영국 왕실은 격식과 까다로움으로 이미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들은 여자들끼리 나란히 앉는 법도 없으며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중에도 앤 공주의 성격은 매우 까다롭고 유별나기로 국제사회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직접 사인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시녀가 대신 할 정도다. 또한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저명인사로 통하는 앤 공주는 너무나 꼿꼿한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한다.
88서울올림픽 전에 그녀가 국제승마연맹 회장으로서 서울에 왔을 때다. 만찬이 있었는데 옆에 앉았던 체육계의 모간부가 메뉴에 서명을 부탁한 적이 있다. 물론 그녀는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체만체했다. 앤 공주의 이런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앤 공주와 잘 지내는 편이다. 그 이유는 서로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신의를 갖고 그녀를 대했으며, 그녀도 자연히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앤 공주가 사마란치와 불화를 겪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사마란치 위원장이 추진해온 올림픽의 상업주의와 프로화, IOC위원의 임기 연장(80세)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특히 부다페스트총회에서는 IOC전체를 ‘노인당’으로 구성,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냐면서 반대의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이는 아직도 과거에 집착하는 앵글로색슨족과 스페인 마피아라 불리는 집단의 대립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 사마란치는 현실주의자고, 앤 공주는 전통주의자다. 사상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불협화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느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적극적인 사회활동이다. 그녀는 지금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 자선사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저에게 점심을 사고 싶으시다면 대신 그 돈을 아동기금에 내주세요.”
자신을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닐 정도다.
나는 1950년 6월1일 연희대 (연세대학교 전신) 1학년을 마치고 제 2회 행정고시, 행정 3부(현 외무고시)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1학년만 마치면 본고사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입학 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준비를 해나갔다. 6월에 한 학기가 시작되던 때라 5월말 2학년에 진급할 자격을 얻고, 8월에 시험을 치른다는 계획이었다. 그해 6월20일, 종로 세무서에 가서 2000원 짜리 인지를 산 후 옛날 중앙청 한 모퉁이에 있던 고시위원회에 원서를 제출했다. 8월3일에 고사장에 집합하여 4일부터 12일까지 시험을 치르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그러나 그 긴장은 5일 후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6월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남쪽을 향해 포탄을 쏘아댄 것이다. 시험은커녕 국가의 존위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곧바로 입대했다. 조국이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당시에는 입대해서 싸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고, 인생에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고 군인이 되겠다는 것말고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외교관의 꿈 접고 입대하다
입대 후 나는 연락장교로 일했다. UN연락장교단이 있었는데 짧은 기간 교육을 마치면 곧바로 장교에 임관될 수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한 덕분에 미군과 연락하고 통역하는 것을 주임무로 했다. 그러나 적과 대치하면서 피 흘리고 목숨까지 바치는 젊은이들이 즐비한데 후방에서 통역이나 하는 내 모습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1951년 7월 부산 동래에 있던 보병학교에 들어가 보병장교로 다시 임관되었다. 1953년 7월27일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나의 군생활은 계속되었다. 19세에 중위, 21세에 대위, 23세에 소령이 되었고, 29세에 중령으로 예편(1961년 6월)했다.
군인 신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 미국 텍사스에 있는 웨스턴 대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정치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중 ‘피스톨 박’으로 널리 알려진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군사영어에 능통한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 등과도 함께 공부했다. 조 전 장관은, 58년 내가 아내 박동숙(朴東淑)을 만나 당시 체신부 장관이었던 이응준(李應俊) 장군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릴 때 사회를 볼 만큼 우리는 막역한 사이였다.
귀국 후 군인 신분으로 58년 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60년 비로소 학부 공부를 마쳤다.
그 동안 육군 제1군 사령관으로 있던 송요찬(宋堯讚) 장군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의전 통역 관계 일을 담당했다.
송사령관(중장)이 59년 2월 백선엽(白善燁) 대장의 뒤를 이어 제 11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자 나도 함께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나는 소령계급으로 수석 부관이었다.
송총장의 재임중 4·19가 터졌다.
4·19 민주 혁명은 3·15 부정 선거에 대한 항거로 시작되었다. 경남 마산(馬山)에 이어 서울에도 이 소식이 전해져 드디어 고려대 등의 데모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너무나 폭압적이었으며 비민주적인 발상이었다.
정부는 관변 깡패들을 이용해 고대생의 데모행렬을 습격(4월18일)하였고, 이에 격분한 전국의 각 대학교와 일부 고등학생 등이 이에 정면으로 항거했으며 시민들 또한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행렬이 경무대에 이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수백 명의 학생·시민들이 꽃다운 한 생애를 비참하게 마쳐야 했고, 항거 수위는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4월19일 오전 11시경 효자동(孝子洞)거리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오후 3시쯤 송장군이 경무대로 불려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미 내각이 총 사퇴하고, 명령계통은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서 송요찬 계엄사령관으로 바로 이어질 때였다. 그런데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당선자가 당초 사퇴할 것이라는 소식이 사퇴고려 쪽으로 번복되자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다다랐다. 드디어 사태는 이미 정부에 대한 불신감에서 배신감, 마침내 국가에 대한 증오감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4월25일 교수단 데모와 전국적인 시위는 이승만 박사의 하야(4월 26일)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학생 혁명이었다.
당시 수석 부관실에는 나를 팀장으로 육사 11기 수석 졸업생인 김성진(金聖鎭) 대위(전 체신부·과학기술처 장관)와 12기 수석 졸업생인 이병간(李丙幹) 대위(작고·예비역 소장)가 각각 내근과 수행부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4·19와 관련해 최근 밝혀진 일화가 하나 있다. 신동아(新東亞) 2000년 5월호 별책부록인 ‘16대 국회의원 인물 사전’을 들추다 한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서울 용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한 설송웅( 松雄)씨는 4·19당시 중동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시민 대표 6명 중 1명으로 뽑혀 송 계엄사령관과 조재미(趙在美) 15사단장 안내로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가 이대통령에게 하야(下野)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는 말을 듣고 당시 안내했던 이병간 대위의 보고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그는 지역구로 나는 전국구로 함께 첫 금배지를 달게 되었으니 정확히 40년이 흐른 세월 앞에 인생무상을 되씹을 수밖에. 송장군은 4·19가 마무리되는 5월 허정(許政) 과도 내각이 들어서면서 최영희(崔榮喜) 장군에게 육참총장 자리를 넘겨주고 예편,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육군 소장 주도의 군사 쿠데타.
미국에 머물고 있던 송요찬 장군은 혁명 정부의 요청으로 그해 6월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나도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한 달 뒤 송장관이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으로 영전되자 함께 의전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후에 김현철씨가 내각수반을 맡았고 나는 이 두 분을 모시고 일한 보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5·16 군사 쿠데타 2주년을 막 넘긴 63년 8월8일 동아일보가 3면 전면에 걸쳐 송요찬 전 군정 내각수반이 ‘박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편지를 실었다. 송 전 수반은 이 장문의 공개 편지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민정으로 가는 길목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군정 당국은 곧 6·25 전쟁 당시 장교를 사살했다는 혐의 등으로 송장군을 구속했다. 마침 나는 미국에 공무로 출타중이었는데 아무런 기색도 모르고 귀국하다 공항에서 곧 바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들은 송장군의 의전 비서관으로 재직했다는 이유로 ‘공개장’작성 관여와 외국언론에 전달 여부 등을 추궁했다. 사실 전혀 모르는 일이라 관련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나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을 뒤늦게 안 김현철 내각수반 (1962년 7월 ∼ 1963년 12월)이 “현재 나의 의전 비서관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강력 항의해서 나는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음날 사표를 들고 내각수반 공관을 찾았으나 김수반의 만류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나는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 비서관으로 있는 동안에도 카이로 총영사, 콩고 대리 대사 등으로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19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미대사관(대사 金貞烈) 참사관으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 당시 나는 많은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다.
5.16ㆍ송요찬(宋堯讚)ㆍ나
나는 공항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배웅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내는 손님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늘 바빴다. 당시 워싱턴에는 한국 식당이 없던 까닭에 우리 음식을 대접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당시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 집에서 밥 한끼 먹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감히 자부할 정도다. 우리 집에서 하도 많은 고기를 소비하는 탓에 동네 슈퍼마켓에서는 우리가 식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 지경이었다. 초청대상에는 외국 사람들도 많았다. 이때 사귄 사람들은 내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1965년에 UN대표부 참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UN에서 일하는 동안 세계에 대해 진정으로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의 이름과 대사들의 이름을 외어야 하는 고충도 있었지만 한꺼번에 각국의 대사들이 일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서 장래 큰 도움이 되었다.
UN은 말 그대로 회의외교의 본고장이었다. 그곳에서 국제적인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고, 발언을 어떻게 하며, 기분이 언짢아도 참으면서 적절한 때에는 어떻게 반격을 해야 하는가 등을 실제적으로 몸에 익힐 수가 있었다.
1967년 영국 대사관 참사관으로 전근했다. 영국은 민주주의의 전통이 깊은 나라고, 세계를 자기 손안에 쥐고 흔들던 강대국이었다. 나는 거기서 교육제도, 복지정책, 근검절약, 애국심, 신사도 등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런데 1968년 1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 달 21일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이틀 후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국내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고, 무엇보다도 한미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박종규 실장이 연락을 보내왔다. “지금 청와대에는 미국 문제를 전담할 일급 비서관이 필요합니다. 즉시 귀국하십시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미국을 잘 아는 전문가가 많지 않았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미 군부에도 친구가 많았고 워싱턴과 뉴욕의 언론인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나는 좋은 기회다 싶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맡게 된 일은 귀국 때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청와대 경호관들이 미공군 특수부대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것은 그들의 자문역이었다. 우선 이 일부터 익힌 후 비서실로 옮기라는 이야기였다.
아내는 이 일을 두고 사기 당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도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조용히 가족들과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971년 뜻밖에도 전혀 다른 제의가 들어왔다. 난데없이 태권도 협회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추대에 의해 그 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 때 내 나이 40세였다.
불패 신화 계속 되다.
“아, 그럼 동방불패(東方不敗)시군요”
언젠가 내가 선거나 표 대결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자 어느 젊은 기자가 이런 말을 던졌다.
“뭐, 동방불패라고요?”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 기자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그 내용을 말했다. ‘동방불패’는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 크게 히트한 중국 영화의 제목으로 영화 속에서는 무림 최고의 고수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개인적인 선거에서나 나라의 명예를 걸고 싸운 모든 표 대결에서 한번도 지지 않았으므로 패배를 모르는 동방사나이라는 기자의 얘기였다.
나는 1986년 10월1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 91차 총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여섯 번째로 IOC위원에 선출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IOC위원이던 박종규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마란치 위원장이 나를 추천했다. 그때 우리 정부는 추천권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을 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측근들이 매우 탐냈던 모양이다.
그때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운용씨가 아니라면 한국은 IOC위원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IOC위원은 위원장의 추천으로 집행위원회를 거쳐 총회에서 선출하기 때문이다.
나는 IOC위원으로 피선된 지 1년 8개월 만인 1988년 8월15일 서울 IOC총회에서 IOC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집행위원회의 멤버가 됐다. 그리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는 부위원장에 뽑혔다. 지금까지 전개된 여러 번의 승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IOC 부위원장 선거였다.
1992년 올림픽 개막 전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의 소피아 호텔에서 IOC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최대의 관심사는 부위원장 선거. 출마자는 나와 일본의 이가야였다. IOC에는 집행위원이란 직책이 있는데 집행위원에 선출된 지 4년이 지나면 부위원장 자리로 올라가든지 아니면 집행위원회에서 내려오든지 해야한다. 나를 후원하던 사마란치 위원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거목답게 노련했다.
“뚜껑을 열 때까지 모릅니다. 끝까지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북한 IOC 위원인 김유순(78년 피선) 위원장도 나의 승리를 점쳤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까 김형이 되겠던데요, 앞으로 사마란치 다음으로 위원장도 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도 있구요.”
투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54대 28이라는 더블 스코어로 이가야를 누르고 IOC 부위원장에 당선됐다. 이 큰 표차의 승리는 내 입지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더라면 내가 갖는 발언권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승부 중에서도 최대 하이라이트는 역시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이었다. 이 민족사적 쾌거는 나 개인에게도 많은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해 대부분의 언론들은 태권도의 쾌거를 스포츠는 물론 전체 10대 뉴스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1994년 9월5일, 이 날은 전 세계 3000만 태권도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이 날 파리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우리의 국기(國技)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 된 것이다. 이는 한국 태권도가 세계로 전파돼 나간지 불과 30년만에 ‘지구촌 스포츠’로 공인을 받았으며, 한국어가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와 함께 올림픽 경기 공식 용어가 됨으로써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의 위상과 자긍심을 급상승시켜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자 영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스포츠를 개발하여 동양에 보급했는데, 이제는 동양의 스포츠가 서양으로 수출되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까지는 숨가쁜 스포츠 외교문제를 극복한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올린 개가 뒤에는 아픈 기억도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이라는 사실 때문에 늘 되풀이되는 사건들이었다.
태권도의 역사와 관련해 생각해 볼 때 태권도의 발전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발전이었다. 내가 태권도협회를 맡았을 때, 해외는 물론 국내에조차 뚜렷한 기반이 없었다. 태권도를 발전시켜서 어떤 큰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금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변변한 중앙 도장 하나 없는 상태였다.
태권도, 올림픽종목 채택
그러나 내가 협회장을 맡은 후에 중앙 도장인 국기원을 지었고,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으며, 세계대회까지 열게 되었다. 또한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하고 아시안게임, 아프리카게임에서도 태권도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올림픽 시범종목에 올렸고, 지금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이 됐다.
최근 많은 사람이 2001년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할 것이냐고 묻는다. 지금 국제 스포츠계에선 사마란치 위원장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나를 비롯해 캐나다의 파운드, 호주의 고스퍼, 벨기에의 로게 등을 꼽고 있다.
캐나다의 파운드는 78년에 IOC 위원이 된 수영선수 출신이다. 그는 높은 지력(知力)을 소유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IOC 의 상업화에 공헌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회의 중 특별 사안에 대해 공개적인 논쟁을 피하지 않고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는 추진력이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호주의 고스퍼는 매우 실제적인 행정가 스타일이다. 다국적 기업의 고위직에 있기는 그는 이상주의자면서 전통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편인 동시에 현실을 잘 파악하기로 알려져 있다.
벨기에의 로게는 유럽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유럽 자체가 4분되어 있고 아직까지 한번도 올림픽을 치러보지 못하는 등 미검증 상태로 신뢰가 뒤떨어져 있다. 나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제경기연맹 회장으로서 각종 국제연맹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올림픽 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서울 올림픽을 창조해낸 업적을 높이 사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지난 25년 동안 세계 스포츠계에서 가장 폭넓은 친교를 가지고 있으며 과감하게 많은 일을 처리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고들 한다. 나는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때 가봐야 압니다, 천운도 따라야지요.”라고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출마할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온 내게 마지막 승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대표단 일원이 돼 곧 평양으로 떠난다. 이 자리에서 남북한 체육교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오는 9월 시드니 올림픽 10위 이내 입상 또한 내 눈앞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