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자신의 한계를 알고 환자를 스승으로 여기는 의사가 명의”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1-06 09: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애주가에 술 전문가로 왕성한 기고·강연 활동
    • 술병·종 미니어처, ‘몸짱 교수’, 강남 학원가의 ‘외국어 고수’
    • 전문서적 8권 펴낸 심혈관수술 권위자, 최근엔 흉부외과 정맥류 선구자
    • 젊은 시절엔 병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 요즘은 환자 내면을 본다
    • 60대 여 정맥류 환자, 수술 직후 “이제 치마를 입을 수 있겠죠?”
    • 심장수술 후 아이가 죽었는데도 고마움 표시한 부모와 함께 울었다
    • “술이 건강에 안 좋다”는 일반론은 잘못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몸짱 교수’로 통하는 김원곤 교수. 뒤편 벽에 걸린 사진은 2009년 5월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고상하면서도 고달픈 직업이다. 병을 고치고 생명을 구하는 데서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지만 인간이라는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의 밑바닥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것은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섬광과도 같은 생명의 명멸을 지켜보는 데 따른 고뇌와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의사를 제대로 하려면 의술 못지않게 인내와 평정심이 필요하다. 체력도 좋아야 한다. 고난도의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의 경우 더욱 그렇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학과 김원곤(56) 교수는 매우 독특한 교수다. 서울대병원 웹진에 ‘김원곤 교수의 엔돌핀 술 이야기’를 연재하는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술 전문가다. 술 마시기를 즐길 뿐 아니라 술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술병과 종 미니어처(모형) 모으기가 취미다. 그가 모은 술병 미니어처는 1500여 개에 달한다. 종 미니어처도 300개나 모았다. 누구는 그를 ‘몸짱 교수’라고도 부른다. 몇 달 전 ‘누드사진’을 찍어 의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오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다진 그의 몸은 20대 젊은이 못지않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그를 ‘날라리’ 의사로 여기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의 실력을 미심쩍어하는 독자라면 다음 얘기를 듣고 적이 안도할지 모른다. 국내 심혈관(心血管) 분야 권위자인 그는 흉부외과와 심장병, 심장수술에 관한 책을 8권이나 낸 학구파다. 의사가 번역서라면 모를까, 집필저서를 이렇게 많이 낸 것은 유례가 없다고 한다.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흉부외과와 관련된 역사논문을 수편 썼는데,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환자가 이재명 의사(義士)의 칼에 찔린 이완용이었다는 기록을 처음 발굴하기도 했다(2008년 12월18일 동아일보 기사 참조).

    기왕 늘어놓는 김에 이 얘기도 하고 넘어가자. 그는 ‘외국어 귀재’다.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한다. 누구처럼 우리말까지 넣은 숫자가 아니라 진짜 외국어만 말이다. 서울의 강남 학원가에서 ‘정체불명의 외국어 고수’로 통한다. 그는 최근 한 방송사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허경영씨를 비롯해 ‘엉뚱한 사람’들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쪽에 어떤 키워드로 다가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의료계 기인’으로 보는 것 같아 (출연을) 거절했어요. 내가 독특하긴 하지만 기인은 아니거든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죠.”



    “60세에 사진집 낼 계획”

    흉부외과는 생명의 원동력이라 할 만한 심장과 폐를 다룬다. 그런데 서울대병원 흉부외과는 정맥류 치료도 한다. 정맥류 치료가 흉부외과의 영역인 혈관 치료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는 정맥클리닉을 운영하는데 그 책임자가 바로 김 교수다.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키가 훤칠한 그가 반갑게 맞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180㎝란다. 수북이 쌓인 책들보다 눈길을 끈 것은 안쪽 벽에 걸린 사진이었다. 문제의 누드사진, 상반신을 벗고 근육을 뽐내는 사진이다. 5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깔끔한 몸매다. 뭣보다도 군살이 전혀 없다. 가슴근육은 균형이 잡혀 있고 복부근육은 매끄러우면서도 탄력적이다. 양팔의 근육도 기운차 보인다. 2009년 5월, 사진이 취미인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스튜디오에서 찍어준 사진이라고 한다. 그는 “주변의 반응이 참 좋다”며 “몇 년 더 몸을 가꿔 60세가 되면 사진집을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떤 일을 하고는 싶은데 의지가 약해 잘 진행되지 않는 경우 약속을 공개적으로 해서 그 압박감으로 해내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2008년 송년회 때 흉부외과 직원들 앞에서 언제까지 옷을 벗은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킨 거죠.”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근육”이라는 그의 설명에 공감이 간다. 20대 후반에 나도 해봤기 때문이다. 역기 따위의 도구를 이용한 인공적인 근육은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진다. 또 달리기를 하면 복근이 탄탄해진다는 건 경기 중 윗옷을 걷어 올리는 축구선수만 봐도 알 수 있다.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1975년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이던 김원곤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의·치대 역도부 회원들과 함께 교내 단과대학 대항 씨름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앞줄 오른쪽 끝에서 세 번째가 김 교수. 김 교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시 서울대 의대학장 권이혁씨다. 권씨는 뒷날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보사부·환경처 장관을 역임했다.



    그가 근육에 관심을 가진 건 학생 시절부터다. 본과 2학년이던 1975년, 그는 서울대 의·치대 역도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냈다. 의과대와 치과대 학생들 중 힘깨나 쓰는 학생들이 역도부로 모였다. 창단부원은 12명.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입회원을 받고 있는 장수 동아리로 매년 가을 경연대회를 열고 있다. 현 회원은 30명 안팎인데, OB(Old Boy)회원 모임도 활성화돼 있다.

    창단 시절의 일화다.

    “처음에 운동기구를 살 돈이 없었어요.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단과대학 대항 씨름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에서 입상하면 돈 준다고 해서 부원 5명이 출전했습니다. 우승했죠. 상금으로 5000원인가 받았습니다. 초코바 아이스크림이 30원 하던 때였죠. 우승상금에 조금 더 보태서 운동기구를 사들였습니다.”

    흉부외과라는 명칭은 흉부 및 심장혈관외과를 축약한 것이다. 가슴과 심장혈관에 있는 모든 병을 외과적으로 치료하는 곳이 흉부외과다. 하지만 진료과의 이름과 장기의 해부학적 위치가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장기와 병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가슴에 있다고 다 흉부외과의 치료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방수술은 일반외과에서 한다. 반면 복부 대동맥 수술은 흉부외과에서 한다. 척추질환을 두고 신경외과와 정형외과가 영역 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수술 후 죽은 아이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훔치는 김원곤 교수

    “너 오늘 환자 옆에서 자!”

    그가 교수 직함을 갖고 진료한 지는 23년 됐다. 초기 10년 동안은 심혈관 수술에 주력했고 이후 10년은 심혈관 연구에 전념했다. 3년 전부터는 정맥류라는 새 영역을 개척해 선구자 노릇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의 정맥류 수술은 그가 거의 도맡고 있다. 그렇긴 해도 전공이 심혈관이므로 요즘도 심혈관 계통을 연구하고 관련 책도 집필하고 있다.

    김 교수처럼 임상교수로 오래 일했던 의사가 연구교수로 옮겼다가 진료 분야를 바꾼 것은 드문 사례로 꼽힌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는 변화의 시도였죠. 흉부외과의 인기가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학회 차원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죠. 요즘은 흉부외과에서 정맥류를 다루는 병원이 많아졌어요.”

    그가 서울대 의대에 들어간 것은 1972년. 대학병원 의사가 되려면 20년 가까운 지난한 수련기를 거쳐야 한다. 과거엔 학부과정이 예과 2년, 본과 4년 해서 6년이었다. 4년제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은 2년 더 공부하는 셈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인턴 1년, 전문의 과정 4년을 마쳐야 한다. 남자의 경우 군복무도 한 과정이다. 3년 동안 군의관을 하거나 공중보건의로 군복무를 대체해야 한다. 전문의 과정이 끝나면 2~3년간 펠로(fellow) 과정을 밟는다. 김 교수는 그중 레지던트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외과 중에서도 가장 힘든 데가 흉부외과입니다. 레지던트를 할 때 다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선배가 ‘너 오늘 환자 옆에서 자!’라고 지시합니다. 그럼 밤새 병실을 지켜야 합니다. 평일엔 집에도 못 들어가다가 주말에 한 번씩 들르는 정도였습니다. 보람을 느끼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 의사 지망생들의 흉부외과 기피현상이 심각한 모양이다. 마치 일반 대학에서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는 ‘문사철(文史哲)’의 비중이 낮아져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처럼.

    “예전에 비해 흉부외과의 인기가 크게 떨어진 것은 웰빙과 여가활동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의 가치관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시간을 즐길 수 없는 과에 대한 선호도가 많이 낮아진 거죠. 이것은 사회 전체의 가치관이 변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의대생 중) 여학생 비율이 높아진 것도 한 원인입니다. (여학생은) 아무래도 업무강도가 높은 과를 피하는 편이죠. 부모들도 말리고. 몇 년 전 레지던트를 하다가 그만둔 후배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여자가 흉부외과를 그만두라고 적극 말렸던 겁니다. 나중에 다른 과로 옮겨가 새로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이처럼 전국적으로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이 생기면 남은 사람의 일 부담이 커집니다. 그러면 지망생은 더욱 줄게 됩니다. 악순환이죠.”

    그의 표정에 흉부외과 의사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흉부외과는 임상학의 꽃입니다. 모든 과를 돌면서 공부하는 인턴들이 흉부외과를 돌고나서는 다들 ‘정말 좋은 과이고 임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과’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안 가겠다’라고 하는 게 문제죠. 그래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연애는 흉부외과와 하고 결혼은 다른 과와 한다’고 합니다. 우리 때만 해도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흉부외과를 선택했습니다. 순수했던 시절, 정말 좋아 보였죠. 힘들지만 보람을 느꼈고요. 그 뒤로 운명처럼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모 대학교 의과대에 가까운 친척이 다니는데,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요즘 흉부외과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간다고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득 그의 손에 눈길이 미쳤다. 키에 걸맞게 커다란 손이었다. 손가락도 길었다. 손이 크면 수술하는 데 유리할까.

    “예전엔 수술을 전부 손으로 했잖아요. 그래서 손가락이 길면 수술에 유리하다는 농담이 통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정교한 기계가 손으로 할 일을 대체합니다. 손 크기와 관계없이 손재주가 중요한 거지요.”

    외과수술에서는 체력도 중요하다. 여자는 물론 남자도 체력이 몹시 약하면 외과를 선택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충분히 잠을 못자는 걸 떠나서 일단 수술장에 들어서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고정된 위치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어야 하거든요. 긴장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요. 기본 체력이 없으면 곤란하죠.”

    흉부외과 수술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열 몇 시간씩 한다는 수술은 다른 과 얘기다. 심장에 그냥 칼을 대면 수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곧바로 피가 뿜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장수술을 하려면 일단 심장을 멈춰놓아야 한다. 그런데 심장이라는 게 한정 없이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제한된 시간에 빨리 끝내야 한다. 안전하고도 노련하게 제때 끝내는 게 중요한 것이다. 보통 네댓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걸리는데, 다른 과 수술과는 긴장의 강도가 다르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심장수술 기술이 처음 개발될 때만 해도 유명한 외과의사들조차 심장수술은 불가능한 걸로 생각했습니다. 심장은 바늘 하나로만 찔러도 압력 때문에 피가 천장까지 솟구칩니다. 심장이 피로 차 있으면 안에 아무것도 안 보이죠. 그걸 어떻게 째서 병을 치료하느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심장은 산소가 들어있는 피를 우리 몸에 내보내는 장기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의사들은 심장 대신에 피를 몸 전체로 내보내는 기계를 개발했다. 수술하는 동안 심장 대신에 기계로 피를 내보내는 한편 심장은 특수한 약으로 마비시켜 기능을 정지시킨다. 그러면 심장 대신 기계가 우리 몸에 피를 공급해준다. 그 사이 의사는 심장을 절개해 수술을 한다. 수술이 끝나면 절개한 부위를 닫고 피를 다시 심장으로 보내 심장을 뛰게 한다.

    “세월의 힘, 인생의 힘”

    김 교수가 자신의 주도로 수술을 한 것은 교수가 된 1986년부터다. 그간 수많은 수술을 했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그는 의술은 인술(仁術)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환자가 의사의 가장 큰 스승이죠. 과거엔 환자를 병으로만 대했습니다. 흉부외과의 경우 워낙 환자의 병이 무겁고 바쁘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많은 의사가 병 고치는 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젊은 시절엔 병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병을 떠나 환자의 내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외래를 볼 때도 어떻게 지냈는지,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환자가 사적인 이야기도 하고 직업 얘기도 합니다. 요즘은 환자와의 관계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인상 깊었던 수술사례를 말해달라고 하자 정맥류 환자 얘기를 꺼냈다. 60대 여성인 이 환자는 정맥류가 심해 다리에 새끼를 두른 것처럼 혈관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왔다. 게다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남편이 옆에서 ‘통역’을 해줘야 했다. 정맥류를 앓은 지 오래됐으나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수술시기를 마냥 늦춰온 환자였다.

    환자의 의식이 깨어 있는 국소마취 수술을 하는 경우 의사는 환자에게 그때그때 상황을 말해준다. 지금 마취주사를 놓습니다, 조금 따끔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귀가 잘 안 들리는 환자가 아니던가.

    “수술조수에게 종이를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수술진행 상황을 글로 적어 환자에게 보이도록 한 거죠. 나중에 수술조수가 말하기를, 환자가 수술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나도 고맙더군요. 내 노력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또 하나 놀랐던 건, 나는 그 환자가 미적인 데는 전혀 관심 없을 줄 알았어요.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면서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참아왔으니. 그런데 수술이 끝나자 환자가 수술대에서 일어나면서―그때 수술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즐겁게 웃었습니다―큰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 치마를 입을 수 있겠죠?’ 이 환자는 치마를 입는 게 소원이었던 겁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느꼈죠. 아, 환자를 병으로만 치료할 게 아니구나. 요즘 저는 지나칠 정도로 환자와 대화를 많이 합니다. 간호사가 뭐라고 해요. 너무 잘해주면 환자가 고마움을 모른다, 너무 잘해줘도 곤란하다고. 하지만 저는 잘해주고 싶어요.”

    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세월의 힘이고 인생의 힘”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용서심도 커지고 이해심도 많아진다고 하잖아요. 그런 게 맞물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병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병 치료보다 중요한 건 인간관계

    의사와 환자의 신뢰관계를 강조한 그가 기억 속에서 오래된 사건 하나를 끄집어냈다. 17~18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서너 살짜리 아기였어요. 심장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수술 부위가 감염돼버렸습니다. 몸 상태가 계속 안 좋아졌죠. 악순환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몇 달간 계속 나쁜 코스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결과가 안 좋았죠. 사실 감염은 누구 잘못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30대였어요. 아빠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것 같고. 몇 달 동안 아이 돌보느라 생활도 내팽개치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죽고 난 후 저한테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더라고요. 그들을 붙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티슈가 놓인 탁자 쪽으로 가서 안경을 올리고 티슈로 눈가를 닦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가슴 깊은 곳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는 듯한 목멘 소리로 얘기를 마무리했다.

    “애도 안됐고, 부모도 안됐고….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흉부외과에는 워낙 위험한 환자가 많습니다. 결과가 그렇게 됐는데도 원망하지 않고 고맙다고 하니…. 의사가 병으로만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치료하는 동안 부모와 많은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들은 그 애가 가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얘기했고 저는 의료진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죠.”

    심장수술 후 감염으로 사망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상존한다. 그 가능성이 0.1%라 해도 당사자에게는 100%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감염에 따른 사망사고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가 든 사례는 의사와 보호자가 마음이 잘 통한 경우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수술받은 환자의 사망은 종종 의료분쟁의 대상이 된다.

    “나는 아직까지 심각한 분쟁을 겪은 적은 없습니다. 거친 항의를 받은 적은 몇 번 있지만 물리적 폭력을 당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동료의사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건 더러 목격했지요. 칼, 심지어 엽총으로 위협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물리적 폭력 행사보다는 재판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요. 수술이 위험할수록 의료분쟁의 소지가 커집니다. 수술은 다 힘들지만 과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성형외과 수술을 받다 죽으면 대체로 의료진 과실 탓입니다. 하지만 흉부외과의 경우 의료진 과실 외에도 변수가 많습니다. 핵심 장기를 다루기 때문이죠. 심장수술은 ‘safety margin(安全域)’이 작아요. 다른 장기는 재수술이나 재조정이 가능하지만, 흉부외과 수술은 조금만 잘못돼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심혈관분야 권위자인 김원곤 교수는 3년 전부터 정맥류 치료를 도맡고 있다.

    심장을 손으로 만지는 특권

    “그동안 생명을 얼마나 살렸느냐”고 묻자 그는 “많죠”라며 웃었다. 그에 따르면 흉부외과 의사가 환자를 살린 건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대한민국 흉부외과 의사치고 이런 느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환자는 내가 수술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핵심 장기를 다룬다는 자부심이죠. 사람은 심장과 폐만 있으면 일단 삽니다. 흉부외과 의사는 수술이 아닌 응급상황에서, 즉 주변에서 누군가 심장이 정지돼 넘어졌다고 해도 웬만해선 내가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죠. 심장이 정지되면 4~5분만 늦어도 죽습니다. 병실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쓰러진 환자를 발견하고 내가 살렸다, 이런 일화는 다들 갖고 있지요. 다른 과 의사는 못 살리는 거지요. 그런데 일생에 딱 한 번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워낙 일상화된 일이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안 됩니다. 심폐소생술이라고, 인공호흡시키고 가슴을 누르잖아요. 흉부외과 의사는 이런 일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심장을 절개해 손을 넣어 직접 심장을 주무르는 겁니다. 내부 심장 마사지라고 하죠. 이대로 두면 죽음밖에 없다고 판단될 경우 마지막 수단으로. 경험 많은 의사라면 다 해봤을 겁니다. 특별히 일화라고 할 것도 없지요.”

    심장을 만질 때 두렵지는 않을까.

    “직업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죠.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생각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모든 게 경험이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를 보는 게 일상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을 만지게 됩니다. 내가 언제든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흉부외과 의사의 큰 매력이죠. 요즘은 세월이 바뀌어 그런 피 튀기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하지만. 매력이 취약점이 된 거죠.”

    심장을 만질 때의 느낌은 어떨까.

    “심장은 굉장한 동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지되면 힘이 없어집니다. 느낌이 묘하죠. 어린아이 심장을 다룰 때는 손을 다 넣지 못해 집게손가락으로 넣어 만집니다. 심장을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도 흉부외과 의사밖에 없습니다. 그때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죠. 심장에서 수축 기능을 담당하는 게 좌심실인데,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눌러줍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사망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수술이 심장수술이다. 심장수술은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한 다음 절개하고 고장 부위를 고친 후 꿰매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심장이 견디지 못하면 사망한다. 원인은 수십 가지다. 심장 자체가 워낙 나빠서일 수도 있고 외부 자극이 원인인 경우도 있다. 출혈이나 감염도 원인이다. 심장이 뛰는 것은 근육이 수축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술이 잘됐어도 심장 수축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다. 여기서 의료분쟁이 발생한다. 환자 측은 ‘수술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따지고, 병원 측은 ‘여러 원인이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맞서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서로 처지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에 비해 심장이식수술은 성공률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좋은 공여자, 즉 뇌사상태의 공여자로부터 자신한테 맞는 장기를 얻는 것이 관건이지, 수술의 술기 자체는 난이도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의사의 위치를 명확히 알아야”

    평생 숱한 죽음을 보면서 살아가는 의사들은 죽음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까. 김 교수는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라고 했다. 아무래도 어린 생명의 죽음이 더 안타깝지만, 성인의 죽음이라도 라뽀(rapport·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뜻하는 프랑스어)가 얼마나 형성돼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내면의 사연을 알면 알수록 슬픔의 강도가 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많이 접하면 그만큼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많이 본다고 무덤덤해지는 건 아닙니다. 자기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사고로 몇 십 명이 죽어도 와 닿지 않다가 주위에서 누가 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견디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바로 옆에서 자기와 얼마나 소통하고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응급실로 들어와 곧바로 죽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반면 몇 년간 소통하고 우여곡절 끝에 죽으면 각별한 느낌이 들죠.”

    “삶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질 듯도 싶다”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과생들이 본과 1학년 때 해부학 실습을 하면서 처음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실습장에 들어서면 포르말린으로 절인 수십 구의 시체가 침대마다 죽 놓여 있습니다. 정말 황량합니다. 그걸 보면 누구나 다 인생이 참 별게 아니구나, 느끼게 되죠. 간혹 그런 걸 못 견뎌 탈락하는 학생도 나오고요.”

    흔히 최고의 의술은 인술이라고 한다. 몇 년 전 방송드라마 ‘허준’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김 교수에게 참된 의사의 길을 물어보았다.

    “학생 시절 가장 좋은 의사가 누구냐를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답변 문항이 여러 개였습니다.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 병을 잘 고치는 의사, 연구·노력하는 의사…. 당시 설문조사를 담당한 교수가 경험이 많은 의사들에게 비슷한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뜻밖에도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의사’라는 답변이 많았어요. 그게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학생 때는 아직 경험이 없으니. 한계를 안다는 건 우선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기술의 한계를 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을 정확히 안다는 뜻이죠. 또 하나는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안다는 뜻입니다. 환자가 의사한테 온 건 병 때문이지 의사가 인격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거죠.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깊이 인식하면 오히려 환자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죠. 환자가 의사의 스승이라고.”

    의사라면 아무래도 일반인에 비해 건강한 생활을 하리라는 게 일반적인 예측이다. 자신의 건강은 안 챙기면서 남의 건강을 챙긴다는 건 모순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다”고 말한다.

    “의료현장에 있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의학적 정보와 검사에 쉽게 접근하기는 하죠. 예컨대 흡연의 폐해를 잘 알기에 좀 더 조심하죠. 몸이 조금 이상하면 바로 위내시경을 해본다든지.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규칙적 생활을 하려 해도 밤에 잠 못 자고 수술장에서 불편한 자세로 몇 시간씩 서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죠. 공기도 안 좋은 곳에서. 이론을 알기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현실은 별개입니다.”

    “주량요? 좀 마시죠”

    의사라고 술 마시지 말란 법은 없지만, 김 교수처럼 술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는 경우는 흔치 않다. “술 전문가라고 소문 나 있다”는 말에 그가 컥컥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더욱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는 현재 서울대병원 웹진에 ‘김원곤 교수의 엔돌핀 술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웹진은 20만명에게 e메일로 발송되고 있다. 2009년 4월부터는 ‘신동아’에 ‘영화 속 술’이라는 주제로 매달 기고하고 있다. 지난 1년여 동안 의학신문에 연재한 ‘미니 술 이야기’는 얼마 전에 끝냈다.

    “내 글은 술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술에 얽힌 역사와 문화, 술과 인생의 관계에 대해 쓰죠. 흔히 술 이야기 하면 술 기행(奇行)을 말하는데, 그런 것과 제 글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신동아’에 연재하는 ‘영화 속 술’은 술 먹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술에 대해선 좀 아니까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영화 관련 소재가 무궁무진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놀랍게도 술과 관련한 영화 이야기가 인터넷에 겨우 10개 정도밖에 나와 있지 않더라고요. 큰일 났다 싶었죠. 어느 영화에 어떤 술이 나오는지 일일이 알 수 없으니까. 하나하나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일랜드 술을 쓰고 싶으면 아일랜드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찾았지요. 칵테일 하면 틀림없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오겠다 싶어 그런 영화를 찾았고요. 사실 고역입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 보면 쓸 수가 없거든요.”

    최근엔 강연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전부 술이 주제다.

    “몇 달 전 동기인 일반외과 과장이 술 강의를 부탁하더라고요. 학회를 하면 하루 종일 토론이나 발표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중간에 여흥프로 비슷한 것도 끼워 넣잖아요. 강의료도 준다면서 하도 부탁해서 응했지요. ‘신동아’에 싣는 글처럼 영화와 술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술 이야기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또 영화 이야기는 다들 좋아하잖아요. 그게 소문이 나서 저번 달에는 대한의학회 간부 모임에 가서 강연했습니다. 이달(2009년 12월)에도 강연이 잡혀 있어요. 제가 이렇게 참 요란스럽습니다(웃음).”

    ‘Mini Bottle Collector’ 서울대 의대 김원곤 교수

    김원곤 교수는 50대에 들어와 4개 외국어 정복에 나섰다.

    ‘50대에 시작한 4개 외국어 도전기’

    주량을 묻자 “좀 마시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좀 마신다’는 건 프로의 답변이다. 아마추어는 같은 물음에 ‘소주 몇 병’이라고 대답한다. 남에게 술 사는 걸 즐기고 술 잘 마시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지속적인 운동에 따른 강한 체력과 아내의 협조다. 결혼한 남자가 술을 즐기는 건 아내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내가 술 먹는다고 일을 게으르게 한다거나 딴 짓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마누라가 그런 걸 잘 아니까 기껏 한다는 얘기가 ‘12시는 넘기지 말라’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 정도죠.”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감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술 먹고 실수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이 들면서 간혹 ‘필름’이 끊긴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사가 술의 좋은 점을 강조하면 어색하지 않나”라는 내 질문이 무색하게 애주가다운 논리를 전개했다.

    “술이 몸에 안 좋다는 일반론은 잘못된 겁니다. 특히 심혈관 계통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는 술이 절대 나쁘지 않습니다. 외국의 건강지수 체크리스트를 보더라도 술은 어느 정도 마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담배는 피우는 양이 적을수록 점수가 높게 나오지만 술은 조금 마시는 경우가 전혀 마시지 않는 경우보다 점수가 더 높습니다. 물론 간처럼 직접적으로 술에 악영향을 받는 장기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할아버지가 알코올성 치매였거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면 마시면 안 되겠죠. 술은 조심해야 하지만 무조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단편적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술이 몸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폭음은 무조건 안 좋고요. 자기 몸에 맞게 적당히 마시면 삶의 활력소가 되죠. 담배와는 다릅니다.”

    하여간 이렇게 술을 즐기면서도 외국어 공부를 한다니, 여러 사람 기죽이는 얘기다. 그것도 영어를 뺀 4개 외국어는 쉰 살이 넘어 시작했다. 서울 강남 학원가를 드나든 지 6년째인데 4개 외국어학원을 교대로 다닌다고 한다. 다 고급반 과정이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자유자재는 아니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는 수준이다. 새해엔 이와 관련한 책도 낼 계획이다. 이미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가제는 ‘50대에 시작한 4개 외국어 도전기’.

    “책을 내려는 건 사람들에게 즐거운 자극을 주기 위해서죠. 50이 되면서, 더 늦기 전에 못한 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발이 일본어였는데, 해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그 뒤로는 운명적으로 이끌렸습니다. 학원을 6년째 다니다보니 수백 명의 수강생과 강사를 알게 됐습니다. 다들 궁금해 하죠, 제 정체를. 제가 신분을 숨겼거든요.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며 명함을 안 돌렸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명함을 만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명함을 들고 왔다. 아까 내게 건넨 서울대 의대 교수 명함과는 딴판이다. 직업이 ‘Mini Bottle Collector’이다. 이름은 영문으로만 적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꿨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당신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당신에 대해 금방 알 수 있다”라는 아내의 지적을 받고 나서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Won-Gon Kim’이 사라진 자리에 ‘Nicolas Kim’이 들어섰다. ‘Mini Bottle Collector’라는 직업은 그대로 둔 채.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 시절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럭비를 하고 폭력서클에 가담한 적이 있을 정도로 껄렁껄렁했다. 자연히 성적이 들쭉날쭉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갈등이 있었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결국 부친의 영향으로 의대를 선택했다. 의대를 나온 부친은 지방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장점은 뭐든 시작하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어학에 매달리는 것도 다 그런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역도를 비롯해 태권도, 유도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했다. 의대생으로서는 이색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일탈을 많이 했던” 문제학생이었다. 오죽하면 학생과장 교수가 “사범대 체육과로 전과시켜주겠다”고까지 말했을까.

    레지던트 시절 결혼을 했는데,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의 처가는 유명한 화학자 집안으로 결혼 당시 장인이 서울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딸이 결혼하려는 남자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을 접한 미래의 장인은 친척 의사에게 뒷조사를 부탁했다. 조사를 해보니, 운동을 좋아하고 대외활동에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점이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 노는 학생은 아니었다. 성적이 좋았던 것이다.

    그는 아들 둘을 뒀다. 둘 다 대학생이다. 큰아들은 화학과에 다니는데, 피는 못 속이는지 졸업 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갖고 있다. 둘째는 의대에 다니고 있다. 그는 젊은 날을 돌이켜보며 “학생 시절엔 역시 공부를 해야 한다”며 “끝까지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은 게 나를 지켜준 힘이었다”라고 말했다.



    Face to Face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