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강릉을 가장 북적이게 한 것은 커피였다.
- 번화한 도심도 아닌 한적한 바닷가에 그윽하게 퍼지는 커피향….
- 낭만 가득한 추억의 명소였던 이곳이 ‘커피’와 만나면서 특성화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 강릉이 최근 사람 냄새, 커피 냄새 가득 찬 곳이 되고 있다. ‘커피 한 잔’이 주는 알싸한 낭만이 강릉의 솔향기와 이렇게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것이리라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커피’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이 작은 도시에 커피 명인이 하나둘 자생적으로 터를 잡기 시작하더니 이들이 조금씩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이방인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강릉시였다. 커피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이들과 함께할 문화 사업을 고민하던 강릉시가 ‘커피축제’를 기획한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역축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강릉을 찾았고, 단 두 차례의 행사를 치렀을 뿐이지만 이제 강릉은 바다를 바라보며 갓 볶은 고급 커피를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지역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세계적인 커피 로스팅 도시로
“전세계적으로 커피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원두는 생산하지 않으나 재가공, 즉 로스팅 기술의 고급화로 전세계에 고급 원두를 수출하고 있지요. 이탈리아나 미국의 시애틀 등도 커피 원두 생산지가 아닙니다. 질 좋은 원두를 재가공하는 기술을 브랜드화해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최명희(56) 강릉시장은 강릉에 자생적으로 형성된 커피 명가들을 관광명소에 즐비한 ‘카페’ 수준으로 머물게 하고 싶지 않다고 못 박았다. 자연 경관이 미려한 강릉은 커피 한 잔의 낭만을 즐기기에 더없이 멋진 곳이지만, 대도시만 나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커피 전문점들과 강릉의 커피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상품화되지는 않았지만 강릉의 왕산지역에는 이미 커피나무를 재배하는 농가까지 들어서 관광지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직 상품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생산량이 늘어날 경우 유통과 판로 문제 등을 시에서 적극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릉은 커피를 로스팅하기에 좋은 자연 환경을 갖췄다. 바다와 산, 호수를 모두 끼고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은 커피의 낭만을 즐기기에도 더없이 적합하지만 맑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까지 갖추고 있어 국내 어느 도시보다 커피 보관에 최적지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명희 시장은 이러한 천혜의 관광자원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도시에 ‘커피’라는 트렌드를 접목해‘강릉커피’를 브랜드화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강릉커피’의 브랜드화를 위해 관련 CI를 개발, 모든 분야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강릉 커피가 유명해진 것은 강릉시의 자체적인 노력도 컸지만 그에 앞서 자생적으로 터를 잡은 커피 명인들의 아지트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강릉의 명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커피축제’를 열 정도로 강릉에 커피 문화가 발달하게 된 데는 강릉 커피 1세대 명인들의 공이 가장 컸다. 커피공장을 운영하는 ‘테라로사’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일본식 핸드드립 커피를 보급한 1세대 커피 명인 박이추 선생의 ‘보헤미안’ 등 커피를 사랑하는 명인들이 번잡한 대도시 대신 아름답고 고즈넉한 예향의 도시 ‘강릉’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단순히 커피를 로스팅하고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커피아카데미 등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커피를 배우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강릉지역 사람들의 커피 사랑에 불을 지폈다. 이제는 하루 동안 다양한 커피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커피 여행상품’까지 등장했다.
2010년 10월에 열린 강릉 커피축제를 찾은 관광객들.
되짚어보니 정말 그렇다. 바닷가 마을은 많지만 강릉처럼 커피에 얽힌 사연과 추억이 많은 곳은 없었던 듯싶다. 게다가 옛 선조들이 산과 바다, 호수를 바라보며 즐기던 차 문화의 정갈함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니 ‘강릉커피’는 브랜드로서의 차별점을 확실히 가질 수 있을 듯하다.
이미 강릉에 터를 잡고 커피를 로스팅해 판매하는 업체만 30여 개, 전문성은 충분히 확보한 셈이다. 강릉시는 적극적인 홍보와 판로 개척을 통해 강릉을 세계적인 커피 로스팅 지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야심 찬 꿈을 품고 있다.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
2009년 처음 열린 강릉 커피축제에 다녀간 인원만도 비공식 집계로 20만명, 강릉톨게이트를 통과한 차량만도 열흘 동안 자그마치 8만6860대였다. 지난해 가을 제2회 커피축제에는 1만여 대가 늘어난 9만6926대가 강릉을 방문했다. 경제적 파급효과는 15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일반적인 지역 축제에 비해 타 지역에서 찾아온 방문객 숫자가 어마어마한 것도 놀랍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인원이 그 정도라는 사실은 전국적으로 ‘커피 열풍’이 얼마나 거센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저 역시 커피를 좋아해서 시민들과 커피 타임을 즐기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를 먼저 알아본 시민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은 모두 타지에서 강릉 커피를 즐기기 위해 오신 분들이죠. 강릉 시민들은 제 얼굴을 다 알아보시니까 저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는데 타 지역 분들은 제가 인사를 건네도 누구신가 하더라고요. 무엇보다 강릉에 젊은 분이 많이 찾아오시는 것이 기쁩니다. 도시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있으니까요.”
이제 딱히 커피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먼 길을 달려 강릉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강릉축제를 통해 강릉의 매력과 커피 맛에 반한 사람들이 다시금 강릉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강릉 역시 크고 작은 지역 축제가 있지만 커피축제만큼 크게 성공을 거둔 사례는 없다.
“기존의 지역 축제는 주행사장을 한 곳으로 정해두고 그곳에서 이벤트나 공연 등을 펼치는 식이었죠.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고 전 국민이 함께 즐긴다는 취지를 살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하고 식상한 느낌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커피축제는 인포메이션 기능의 소규모 행사장만을 두고 로스팅 등 다양한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온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행사장은 강릉 시내에 있는 커피전문점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커피전문점마다 다른 특유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강릉시내를 누비며 집집마다 다른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성공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환경 미래 도시
물론 최 시장도 커피와 관광산업만으로는 침체된 강릉의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980년대에 비해 강릉이 상대적으로 침체된 분위기를 면치 못했던 이유로 그는 수도권과의 접근성을 가장 먼저 꼽았다. 서해에 비해 동해는 상대적 접근성이 떨어져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점차 소외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이면 서울에서 강릉까지 고속철도가 완공됩니다. KTX를 타면 1시간 만에 올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거죠. 고속철도를 비롯한 다양한 교통·숙박시설의 확충은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인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완공해 정상화할 계획입니다.”
서울과 강릉을 잇는 고속철도 외에도 2019년에는 부산에서 강릉, 고성, 거진을 잇는 동해선이 완공된다. 올해 착공되는 제2영동고속도로를 비롯해 서울과 춘천, 양양을 잇는 동서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는 2015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고속철도 시대를 대비해 강릉은 다양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2010년 말 완공된 예술창작인촌을 비롯해 현재 건립 중인 영상미디어센터와 아트센터 등은 동해안을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릉은 명실 공히 현대문화와 전통문화, 서구의 멋과 우리 전통의 멋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는 도시로 거듭날 것입니다.”
강릉은 2012년 ICCN 세계무형문화축전을 개최,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를 세계화하고 곳곳에 문화시설을 확충해 ‘걸으면서 즐기는 단오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다. 크게는 영동권의 문화예술 구심점이 될 ‘강릉아트센터’와 ‘임영관아지 사적공원’‘허균·허난설헌 공원’ 그리고 수로부인을 테마로 한 ‘헌화가 스토리 벨트’ 등을 조성하고 작게는 도시 곳곳에 문화 거리를 확충해 벽화골목과 전시 공간 등을 만들어 도시 전체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문화단지로 거듭나게 된다.
“강릉이 꿈꾸는 비전에는 2009년 대통령 주재로 열린 강원지역발전 토론회의 저탄소 녹색시범도시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강릉시는 녹색시범도시 추진 전략팀 2개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경포천 생태습지 복원과 생태하천 살리기, 경포 생태관광 자원화, 순포개호 생태하천 복원, 녹색도시 오수간선 사업 등 강릉이 가진 자연 환경을 적극적으로 되살리고 보존하는 사업을 통해 환경과 경제가 상생하는 녹색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단순한 관광도시가 아닌 친환경 녹색도시, 경제와 문화가 어우러진 환경도시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강릉시와 동해시, 삼척시가 주축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 또한 이러한 미래 산업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동해안 지역 도시들의 숙원사업이다. 강릉시는 2022년까지 옥계지구 2.2㎢에 첨단소재 융합산업지구를, 구정지구 3.2㎢에 주거·교육·문화지구를 건립함으로써 대규모 민자유치 기반을 확립해 지역 자체의 고용창출과 소득생산의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다.
최 시장이 세운 ‘강릉비전 2020’은 강릉이 관광 중심의 소비도시에서 관광과 문화가 접목된 ‘창조도시’로 거듭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동해를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적극 활용, 물류복합 거점도시로 성장해 강릉이 ‘환동해 경제권 시대’의 주역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강릉시가 꿈꾸는 미래 비전이다. 커피를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단순한 지역 축제의 소재거리가 아닌 지역 특성화 산업의 일환으로 성장시켜나가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커피와 강릉, 그것은 강릉이 꿈꾸는 미래 도시의 작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겨울이 끝나기 전,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 명인이 손수 로스팅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올 한 해를 설계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