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세에 100달러 쥐고 渡美, 8년 만에 부모님과 전화
- “총장직 이제 그만” 사양하자 이사회가 연임 결정
- 지역 명문 자부 성서캠퍼스, 공자아카데미 등 중흥 이끌어
- “처한 상황에서 최선…엉뚱한 것 추구하지 않아야”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걸출한 인물’ ‘탁월한 역량’ 같은 긍정적 평가보다는 ‘너무 오래한다’ ‘장기집권’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그는 이번 총장 선임 과정에서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이사회에 강하게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 경영이 갈수록 만만찮은 상황에서 대학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가 기준일 뿐 총장의 나이나 연임 여부 등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이사회의 판단이었다.
‘28년’ 총장 임기 시작
사립대의 경우 총장 선임 권한은 재단이사회에 있지만 아무리 이사회라 하더라도 총장으로서 함량 미달인데‘낙하산’처럼 앉히려고 하면 대학 구성원들의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만약 총장 선임 과정에서 이사들 사이에 갈등과 파행이 불거졌는데도 ‘밀어붙이기’ 식으로 임명을 강행하면 교직원과 학생, 동문, 지역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동안 신 총장이 보여준 리더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오래한다’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분위기다.
계명대 총장후보추천위원회는 올해 6월 10대 총장을 선임하기 위해 후보 14명을 이사회에 추천했고, 이 중에서 신 총장 등 3명이 최종 후보로 올라갔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이사회가 개최한 학교발전계획 발표에서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2명은 발표회에서 신 총장을 적임자로 추천했다. 신 총장도 “그동안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더 이상 총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이사회는 신 총장의 연임을 결정했다. 기자는 계명대의 총장 선임 과정을 보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대학은 국립이든 사립이든 사회적 재산인 공공재다. 총장의 역량을 관찰자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 열정과 순수를 상징하는 붉은 벽돌과 흰 기둥으로 지어졌다.
‘인식의 균형’을 위해 기자는 또 총장 직선제가 간선제(이사회가 선임)보다 바람직한 것처럼 여겨지는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직선제는 대학 구성원들이 총장을 투표로 선출하므로 아주 민주적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다. 진정한 직선제는 투표권을 교수뿐 아니라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 동문, 지역사회까지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직선제라 해도 교수가 사실상 총장을 선출하고 교직원과 학생에게 겨우 몇 개의 투표권을 할당하는 것이 대학가의 현실이다.
15세에 생선운반선으로 미국행
신 총장의 이력은 화려함 그 자체다. 프린스턴대 박사(독일문학)에 뉴욕시립 퀸스칼리지 교수, 연세대 교수, 세계대학총장회의 이사, 폴란드 스웨덴 이탈리아 명예영사, 중국 공자아카데미 이사, 폴란드 국립쇼팽음악원과 중국 푸단(復旦)대 등 13개 대학 명예박사 또는 명예교수, 그리고 독일 폴란드 정부 훈장, 프린스턴대 대학원 ‘주요 동문 100인’ 선정 등 그동안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남긴 발자취다.
6·25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6월 대구 계성중을 졸업한 ‘소년 신일희’는 부모님이 마련해준 100달러를 쥐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생선운반선을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2주 만에 미국 서부 샌디에이고 해안에 도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2주 후 동부 뉴욕에 도착한 뒤 목적지인 코넷티컷 주 켄트 시에 있는 켄트고교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멀미에다 망망대해여서 겁이 나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뜻이 있어 미국에 가라고 했나보다’ 생각했을 뿐 싫다거나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 신태식(1909~2004) 박사는 평양숭실전문학교와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계성중 영어교사로 교육계에 몸담았다. 계성학교 교장 때 기독교 학교인 켄트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녀 한 명은 유학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어린 장남을 머나먼 미국에 혼자 보내면서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짧은 당부만 했다.
신 박사는 종합대학 승격 전 계명대 학장을 지냈으며 계명대 설립과 초기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계성중 졸업생으로 평생 가까웠던 박목월 시인은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을 존중하는 시를 남겼다.
신 총장은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서 돈을 아끼기 위해 양파를 넣은 샌드위치로 버텼다. 아버지의 말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켄트고는 부모의 경제 사정에 따라 학비를 받기 때문에 신 총장은 학비를 내지 않았다. 전쟁이 막 끝난 나라인데다 부모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점을 배려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숙사비와 생활비는 모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 집에서 학비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농장의 잡일부터 화장실 청소, 식당 접시닦이, 골프장 캐디 등 틈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대구를 떠날 때 어머니(전갑규 여사·1994년 79세로 별세)가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건네며 “어려울 때 팔아 쓰라”고 했지만 팔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볼 때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한다. 신 총장은 이 반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를 조금 배웠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 몇 쪽을 하루 종일 붙들고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켄트고 재학생은 200여 명. 유일한 외국인이던 신 총장은 1958년 5월 졸업 때 최우수 졸업생으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 성적은 우등이었지만 인성 등을 종합 평가해 선정하는 상이었다. 그는 “지금 돌아봐도 고교 때가 가장 소중한 때였다”며 “모든 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많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 합격
신 총장은 코네티컷 주에서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8년 만에 대구에 계신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편지는 종종 주고받았지만 전화는 할 형편이 아니었다. 전화요금도 비싼 데다 국제전화를 하려면 하루 전에 신청했다가 연결될 때까지 24시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처지로서는 어려웠다.
켄트고를 졸업한 그는 학교에서 가까운 트리니티대를 비롯해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 지원해 3곳 모두 입학허가를 받았다. 3개 대학 모두 장학금을 주기로 했지만 트리니티대 입학 조건이 가장 좋았다. 대학 공부도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여서 그는 트리니티대로 진학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대에 진학하고 싶어 미국의 기독교 단체에 장학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해나갈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을 듣고 미련을 두지 않았다.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시에 있는 트리니티대는 1823년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이다. 여기서 그는 수학 및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대학원은 프린스턴대로 진학해 독일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교수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여서 독일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1966년 6월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뉴욕시립 퀸스칼리지 교수로 임용돼 5년 동안 재직했다. 대학과 대학원 다닐 때 빌린 학자금을 갚기 위해서였다. 이후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1972~1974)를 거쳐 1974년 계명대에 부임했다.
신 총장에게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말은 매우 특별하다. 그의 삶을 하나로 꿰뚫는 유전자(DNA)이자 계명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소중했던 고교 시절도 타불라 라사를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했다.
타불라 라사는 원래 유럽 근세철학에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백지(白紙) 상태’라는 이 말은 사람의 인식은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지만 경험 등 외부 작용을 통해 인식이 쌓인다는 주장과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인식 기반이 있다는 논쟁 과정에서 유명해졌다.
개척정신으로 일군 상아탑
계명대에는 49개국 1300여 명의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특히 2007년 설립한 KAC(계명아담스칼리지)는 4년 동안 영어로만 강의하는 영어 전용 특성화 단과대학이다.
그는 초대 총장에 취임하자 당시 대구 대명동에 있던 좁은 캠퍼스 대신 지금의 메인캠퍼스인 성서캠퍼스를 조성했다. 돌산을 밀어내고 조성된 성서캠퍼스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로 가꿔져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자주 활용된다.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상징물이 2개 있다. 입구 양쪽에는 큰 흙항아리(높이 130㎝, 둘레 400㎝) 2개가 놓여 있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정면 벽에는 ‘백지’ 그림(가로 250㎝, 세로 320㎝)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밑에는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타불라 라사 정신을 통해 만들려는 ‘얼굴’(정신의 모습, FACE)은 △Frontiership(도전적 개척정신-교육특성화 및 창업 활성화) △Altruism(윤리적 봉사정신-봉사활동의 생활화) △Culture(국제적 문화감각-교육과정의 국제역량 강화 및 학생들의 국제성 향상) △Expertise(창의적 전문성-융합형 교육과정 및 자기주도적 학습능력 강화)이다.
이러한 계명대의 노력은 각종 평가사업에서 ‘우수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고 지역사회의 평가도 높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잘 가르치는 대학을 선정해 지원하는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어전용 특성화 단과대학인 KAC(계명아담스칼리지)를 비롯해 폴란드 국립쇼팽음대와 공동으로 개원한 계명쇼팽음악원, 창업교육 선도대학, 섬유패션산업 특성화 국책사업, 공학교육혁신센터, 정부초청외국인유학생 한국어교육기관,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에까지 개설한 계명한국센터, 50개국 280개 대학과 교류협력 등 계명대의 국내외 교육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학생들의 활발한 봉사활동도 교직원들이 매월 봉급의 1%를 떼 모은 기금에서 경비를 지원한다.
계명대는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했지만 ‘대학’의 정신은 기독교의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2004년 설립한 중국센터를 계기로 2007년 문을 연 공자아카데미는 좋은 사례다. 신 총장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공자아카데미 회의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이사로 선임됐다. 그는 “기독교 교리로 보면 공자와 유학은 이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와 공자는 진리를 위해 창의적이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학생들이 넓은 세상을 주도적으로 호흡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정신이 개방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도산서원을 본떠 캠퍼스에 한학촌을 지은 것도 마찬가지다. 계명(啓明)이라는 교명은 대구의 명문학교인 계성학교와 신명학교에서 따서 지었지만 그는 “사람의 밝은 덕을 열어서 깨우치고 이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동양 고전 ‘대학’의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계명대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들은 1899년 영남지역 첫 병원인 제중원(현재 계명대 동산의료원으로 2015년 성서캠퍼스로 이전 예정)을 개원한 뒤 계성학교(1906)와 신명학교(1907)를 설립했다. 가곡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담쟁이덩굴 언덕)은 당시 선교사들이 살았던 대구 중구 동산동 언덕이다. 계성학교를 다닌 작곡가 박태준이 신명학교 여학생을 그리워하며 지은 노래다. 요즘 이 청라언덕 일대는 대구의 도심골목투어 핵심코스로 주목받으면서 찾는 발길이 이어진다.
‘행소’의 리더십과 팔로어십
신 총장의 호는 ‘행소(行素)’다. 20여 년 전 중국 베이징 사회과학원과 교류할 당시 한 지인이 지어준 것이다. 행소 또한 타불라 라사와 함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유학 고전인 ‘중용’(14장) 구절에서 딴 말로 ‘군자(리더)는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 엉뚱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대 총장 취임사는 매우 절제되고 차분한 느낌을 주지만 대학의 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긴장과 고통을 함께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깊은 우려와 희망이 섞여 있다. 1978년 초대 총장 취임사와 비교해보면 고민의 깊이가 훨씬 더하다. 그는 “우리 스스로를 ‘고아(孤兒)’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바깥에서 돌봐줄 울타리가 없어 홀로 서야 하며 모든 구성원이 주인정신으로 리더십과 팔로어십(followership)을 실천하면서 힘써 노력하는 길 이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1954년 15세 때부터 헤쳐나온, 사면초가 상황에서도 자신을 단련하고 실력을 키운 절박한 경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1954년은 선교사들이 힘겹게 대학을 세우던 때였다. 그의 삶에는 1954년의 두 가지 의미 있는 경험이 겹치면서 대학을 위해 깃털만큼의 소홀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엄격한 태도가 읽힌다. ‘타불라 라사’와 ‘행소’를 통해 끊임없이 대학을 완성해 나가려는 의지와 사명, 에너지로 느껴진다.